※본 기사는 영화 《노 베어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검열당한 예술가의 영혼은 어떻게 부식되는가. 말문이 막힌 예술가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못다 한 말을 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나 크고 작은 비극의 정황들 속에서 그들은 예술의 힘을 의심하기도 하고 자신의 목소리 자체를 의심하기도 하며, 자신의 창작 활동이 지닌 무게와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거란 좌절에 빠지기도 한다.
그리고 그 상황 속에서도 누군가는 계속 말하기를 택한다. 가장 두렵고 비관적인 마음을 안고, 감히 낙관적인 전망을 제시할 수조차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을 솔직하게 발화한다. 그런 떨리는 목소리에서 우린 역설적이게도 가능성 없음의 가능성을, 실패한 말하기가 만들어낸 새로운 말하기를 목도한다. 자파르 파나히 감독의 영화 《노 베어스》는 그렇게 겨우 탄생한, 용기 있는 예술가의 또 하나의 참회록이다.
그렇게 영화는 만들어졌다
영화란 본래 ‘액션(action)’을 담는 예술이다. 영화 속 시간은 감독이 외치는 액션 소리에 맞춰 흐르기 시작해, ‘컷(cut)’ 사인이 떨어지는 순간 멈춘다. 그렇게 기록된 시간들이 편집으로 재차 걸러지고 엮어져서 엄선된 순도 높은 액션만이 영화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눈앞에 보여진다.
그러나 때로는 보이지 않게 된 것이 보이는 것보다 중요할 수 있다. 액션이란 소리가 울려 퍼진 이유는 쉽게 예측할 수 있으나, 컷 사인의 이유에는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감독의 통제 영역에서 작동하던 카메라 안 세계는 왜 중단됐는가. 왜 감독은 이 이상을 찍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는가. 왜 감독이 만든 세상이 어느 순간 감독이 통제할 수 없는 세상으로 넘어갔는가. 보통 영화 속 세상이 통제 바깥으로 넘어가는 순간은 잘 편집돼 관객에게까지 넘어오지 못하지만, 때로는 그 경계의 순간이 감독이 가꿔둔 울타리 안 세상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액션이 아닌, 컷에 귀 기울이는 감독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는 그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가 컷 사인에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뜻에 가까울지 모른다. 이란 국적인 그에게, 엄격한 검열로 가득한 자국의 영화 제작 환경은 바깥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컷 사인 그 자체였다. 대표적인 예로, 2009년 이란 민병대의 폭력으로 무고한 학생이 사살되자 자파르 파나히 감독은 전국적으로 이뤄진 추도식에 참석했다. 그 결과 그는 6년의 징역형과 20년간의 영화 제작 금지, 인터뷰 금지 처분을 받게 됐다. 국내외적으로 들어온 탄원에 징역살이를 면하게 된 이후에도, 그는 삼엄한 감시 속에 놓인다.
이처럼 극히 제한된 환경 속에서 감독은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시험하고 시도한다. 예컨대 추도식 참석 후 자택에 감금돼 법정 판결을 기다리던 그는 당시의 자신을 찍어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2011)란 다큐멘터리 영화를 만들고, 해당 영화의 필름을 케이크 속에 넣어 밀반출해 영화제에서 상영했다. 《닫힌 커튼》(2013)이란 작품에서는 자택에 구금된 자신을 영화 속 인물로 설정하고, 그를 본인이 직접 연기하며 자전적인 이야기를 극 영화를 통해 풀어낸다.
그의 영화에선 언제나 그가 무엇을 찍고 싶었고 찍었는가만큼, 무엇을 찍지 못했고 찍을 수 없었는가가 중요한 화두가 된다. 무엇이 영화를 멈췄는가. 무엇이 영화를 실패하게 만들었는가. 이 질문들은 자신의 행위 전반을 억압하는 정부의 검열에 대한 예리한 비판의식으로 이어진다. 동시에, 멈추지 않고 영화를 만드는 예술가로서의 자아에 대한 고민과 자기비판으로도 나아간다. 그리고 그 끝나지 않는 싸움 속에서 감독은 컷을 전면에 내세우는 영화 《노 베어스》로 관객들을 초대했다.
영화의 뒷면을 보여주는 영화를 보여줄 테니, 앞면에선 말할 수 없던 것들을 함께 말해보자고. 그 목소리는 능글맞지만 솔직하고, 부끄럼 가득하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하 영화 바깥의 자파르 파나히는 ‘감독’으로, 작중에 등장하는 자파르 파나히는 ‘자파르 파나히’로 통일해 표기합니다.
필연의 실패를 안고서
극 영화 《노 베어스》는 튀르키예에서 찍고 있는 자신의 영화를, 이란과 튀르키예의 국경지대에 숨어서 비대면으로 연출 중인 자파르 파나히의 이야기다. 《닫힌 커튼》 때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 역시 현실과 영화의 구분이 모호하다. 감독 본인이 직접 자신을 연기하고, 출국 금지 때문에 튀르키예의 현장에 직접 가지 못하는 주인공의 상황 역시 감독의 현실과 일치한다. 작중 튀르키예에서 파리로 밀입국을 시도하는 이란 여성 ‘자라’를, 이란으로부터 입국 금지를 당해 현재 파리에 체류 중인 배우 미나 카바니가 연기한다는 점에서도 영화는 여러 사람의 현실을 작품에 개입시키고 있다.
이처럼 찍는 현실과 찍히는 영화가 서로에게 끊임없이 개입하는 《노 베어스》는, 현실과 영화의 관계를 보여주는 여러 이미지 작업물을 작품 내부에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그중에서도 자파르 파나히가 직접 창작을 시도하는 작업물로는, 앞서 언급했던 비대면으로 촬영 중인 영화와 그가 국경지대에서 손수 찍은 사진들이 있다.
자파르 파나히가 원격으로 촬영을 지휘 중인 영화는 밀입국을 위해 밀수업자들로부터 여권을 얻어내려고 하는 자라와 ‘박티아르’란 연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둘의 삶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겠다는, 모두 사실에 근거하겠다는 언급을 미루어 봤을 때 해당 영화는 다큐멘터리의 성격이 강한 작품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가 폭력으로부터 생존하기 위해 발악하는 연인을 담아내려 했던 이 영화는 거짓이 섞여 들며 처참하게 실패하고 만다. 거짓에 좌절한 자라가 자살하면서 촬영 자체가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자라가 좌절한 표면적 계기는 박티아르의 가짜 여권이었다. 밀수업자로부터 얻어낸 자라의 위장 여권이 효력을 잃기 전 박티아르는 황급히 자신의 위장 여권도 얻어내려 하고, 밀수업자와의 두 번째 거래를 마치자마자 두 사람은 곧바로 출국하기 위해 나선다. 카메라는 그런 둘의 뒷모습을 충실히 따라간다. 그러나 사실 박티아르가 받은 위장 여권은 효력이 없는 여권이었고, 이를 알게 된 자라는 공항으로 떠나는 연기를 하던 도중 연기를 포기하고 분노를 표한다. 자신은 박티아르와 함께 출국하는 게 불가능한 암담한 현실에 놓였는데 카메라는 거짓으로 희망적인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고 말이다. 이에 대해 자파르 파나히를 비롯한 제작진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고 부인하지만, 이들의 해명에도 자라는 현장을 이탈해 두문불출하다 끝내 스스로 생을 마감한다.
그러나 사실, 자라를 죽음으로 내몬 거짓말은 박티아르의 여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는 박티아르의 여권이 가짜인지 몰랐다고 해명하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모든 게 가짜”라고 지적한다. 스스로에게 진실한 삶을 살기 위해 투옥과 고문도 견뎌왔는데, 그 시간을 부정하고 “누군가의 신분증을 훔쳐서 거짓 인생”을 산다는 건 자라에게 있어서 이미 거짓 그 자체를 의미했다. 그렇기에, 이 일이 어떻게 진행되든 자라에게 행복이나 성공이라고 부를 만한 결말은 존재할 수 없었다.
모든 게 가짜라는 말을 듣는 순간 자파르 파나히는 “해피 엔딩을 만들려고”, “어두운 터널의 끝에 빛을 보여주려고” 자라와 박티아르의 이야기를 꾸미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국가 폭력 피해자들의 탈출을 서사화된 영화로 남겨 의미를 찾고 싶었던 창작자의 소망이 피사체의 좌절을 필연적으로 수반하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카메라는 자라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박티아르의 모습까지도 집요하게 찍어댔지만, 결국 자살한 자라의 시신을 확인하는 순간에서만큼은 더 이상 촬영을 이어가지 못한다.
영화 촬영조차 마무리하지 못하는 파국을 보여주면서, 감독은 진실의 힘에 기대는 듯하면서도 결국 창작자의 의도와 거짓이 범벅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근원적 특성을 관객들에게 적나라하게 공개한다. 피사체의 죽음이란 무자비한 결말로, 어쩌면 자파르 파나히 본인에게 매우 가혹한 방식으로 영화의 필연적 실패를 폭로한다.
그렇다면 자파르 파나히가 손수 찍던 마을 사진은 어째서 실패의 운명을 안고 있었을까. 사진은 날것 그대로의 마을 사람들을 피사체로 삼았고, 영상에 비해 인위적인 편집이 개입할 여지가 적은 작업물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로부터 자파르 파나히가 ‘고잘’과 ‘솔두즈’가 몰래 만나는 모습을 찍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발생한다. 마을엔 딸이 날 때부터 미래의 남편을 점지해 주는 전통이 있었다. 이에 마을 사람들은 고잘의 예비 배우자인 ‘야굽’을 위해 자파르 파나히에게 고잘과 솔두즈가 함께 찍힌 사진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의 요구와 반대로, 고잘과 솔두즈는 자신들이 사랑의 도피를 할 때까지만 자파르 파나히에게 사진의 존재를 부인해 달라고 부탁한다.
영화는 그가 정말로 고잘과 솔두즈를 찍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나 자파르 파나히는 사진을 찍었든 찍지 않았든 자신이 목도하는 현실에서 어떤 편에 서서 어떻게 행동할지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이때 자파르 파나히는 자신이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고 강경하게 부인하며 마을의 전통에 따라 맹세한다.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은 그의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솔두즈와 야굽의 갈등은 나날이 깊어진다. 결국 마을 사람들과 혁명 수비대의 압박으로 마을을 떠나게 된 자파르 파나히는, 국경을 넘어 도망치려다 총살당한 솔두즈와 고잘의 시체를 목격한다.
이처럼 감독이 작품 속에서 자신이 창작한 작업물들의 지속적인 실패를 그린 까닭은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는 여러 형식적 시도와 연출을 통해, 이란 사회에서 영화를 찍는 자신을 영화에 녹인다. 자신의 작업이 정말 현실을 담아낼 수 있었을까. 혹은 전달하고자 하는 말을 하기 위해 무언가 왜곡한 건 없었을까. 더 나아가서는 영화가 현실을 조금이라도 바꿀 수 있는가. 그 안에서 작동하고 있는 거짓과 의도가 어떤 폭력성을 잠재적으로 품고 있는 건 아닐까. 감독은 끊임없이 질문한다.

이런 솔직한 고백은 《노 베어스》 속 연출에서도 가감 없이 드러난다. 사진을 찍는 자파르 파나히의 전신은 그가 머무르는 집 문의 삐뚤어진 프레임 속에 놓이면서 카메라 구도에 의해 왜곡돼 담기는 피사체를 상징한다. 있는 그대로 현실을 담아내는 것처럼 ‘롱 테이크(long take)’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던 카메라는, 컷 사인 이후 자파르 파나히가 연기와 연출에 대해 피드백하는 장면까지도 담아내면서 이 모든 게 치밀하게 연출된 장면임을 보여준다. 마치 《노 베어스》 자체도 거짓과 실패를 담고 있다는 걸 숨길 생각이 없다는 듯이.
금 간 벽이 만들어낸 그래피티
그러나 감독이 영화의 뒷면을 보여준 까닭은 그것이 얼마나 추하고 위험하고 비겁한가 자학하기 위함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는 이 실패에서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사진과 다큐멘터리 영화 등 자파르 파나히의 작업물들은 모두 끔찍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이는 창작자의 실패라기보다는 실패의 성공이라 읽어야 마땅하다. 감독이 꾸며내고자 했던 모든 의도가 걷어지고 결국에는 진실만이 남아 창작자의 통제 바깥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감독이 어떻게 찍으려고 하든, 무엇을 찍지 않으려고 하든, 가장 날것의 진실이 컷 사인을 비집고 모든 상황을 압도한다. 때문에, 이런 실패의 모습을 목도했을 때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다시 영화를, 나아가 예술을 믿어볼 구석을 찾게 된다. 영화는 곧 연출이고 허구지만,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는 진실이 영화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꿈틀대며 영화의 틈새마다 깃들 것이란 걸 알게 된다.
그리고 이를 감독 스스로가 경험하는 장면도 영화 속에서 등장한다. 고잘과 솔두즈의 사진을 찍은 적이 없다는 자파르 파나히의 말을 마을 사람들이 믿지 못하자, 자파르 파나히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맹세의 방에 찾아가 맹세하고자 한다. 그는 처음에는 요구받은 발언을 그대로 읊으며 맹세를 시작했으나, 점차 마을의 악습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고 야굽을 화나게 만들면서 맹세를 끝맺지 못한다.

맹세의 순간에 놓인 자파르 파나히는 마치 대본을 받아 충실하게 연기해야 하는 배우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그는 마을 측이 요청한 말, 즉 자신의 진심 혹은 진실이 아니란 점에서 거짓을 맹세했어야 했다. 그러나 카메라 앞에서 일순간 그는 진심의 목소리를 내뱉고 만다. 카메라 앞에서 연출하는 게 업인 그조차도 새어 나오는 진실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실패에서부터 드러나는 진실의 가능성은 자파르 파나히 본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손으로 찍은 마을 족욕식 영상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마을 촌장의 소개로 자파르 파나히에게 거처를 마련해준 ‘간바르’는 자파르 파나히의 요청에 따라 마을의 족욕식 현장을 찍는다. 그러나 카메라 사용 방법을 잘 몰랐던 탓에 간바르는 카메라를 꺼야 할 때 켜고, 켜야 할 때 끄는 실수를 범하게 되고, 영상에 마을 사람들이 자파르 파나히를 의심하고 험담하는 장면들이 담기며 그들이 그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진실이 노출된다.
그뿐만 아니라 우여곡절 끝에 촬영된 세족식 현장의 촬영본에선, 통상적인 영화의 연출과 달리 마을 사람들이 카메라 너머의 간바르를 의식하며 놀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창작자의 존재까지도 영상 속에 포함됐을 때 보다 더 진실한 영상이 탄생한 것이다. 그렇게 누구나 말을 얹고, 떠들고, 조롱하고, 노래할 수 있는 진짜 현장의 모습은 자파르 파나히의 손이 아닌 처음으로 카메라를 쥔 간바르의 손에서 만들어진다.
그렇게 영화는 영영 시작된다
‘노 베어스(No Bears)’란 작품 제목이 무색하게 해당 영화에서 곰에 대한 언급은 단 두 번 나온다. 이는 마을 사람이 맹세의 방을 찾아가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그 길은 곰이 나와 위험하니 차를 마신 후 자신과 안전한 길로 같이 가자고 말하며 처음 언급된다. 그렇게 찾아간 찻집에서 그는 자파르 파나히에게 거짓 맹세를 해도 괜찮다는 충고를 남기고는 함께 가게를 나선다. 그리고 그는 사실 곰 같은 건 없었다며 말을 번복한다. “우리를 겁주려고 꾸며낸 이야기죠. 세상에 두려움을 만들면 권력을 휘두르기 쉽거든요.” 마을 속 곰에 대한 괴담을 거짓으로 일축한 그는, 자파르 파나히가 앞서서 가려고 했던 길로 걸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파르 파나히 혼자 그 길을 걷게 만든다.
영화에선 한 번도 곰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우린 이 곰이 실존하지 않는다고 믿을 수 있을까. 작품 중반부에서 자파르 파나히는 조감독의 안내에 따라 튀르키예와 이란의 국경선에 간다. 그는 겉보기엔 철조망이나 경비가 전혀 없어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국경선 근방을 의아해한다. 그러자 조감독은 보기엔 아무것도 없어 보이지만 밀수업자와 인신매매범들이 곳곳에 숨어 있어 실제로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라고 당부한다.
이처럼 곰은 눈으로 목도할 수 없지만 여전히 존재할 수 있는 무언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마치 창작자들의 창작 활동을 억압하는 정부 세력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혹은 그 검열 방식이 여러 명분과 속임수로 둔갑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처럼. 더 나아가서는 아직 검열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언제든 검열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이미 창작자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것처럼. 작중 등장하는 곰에 대한 또 하나의 언급인 “곰한테 혀가 잘려서 못 말하는 거예요?”란 야굽의 말이 의미심장한 까닭은 바로 그런 이유에 있다.
동시에, ‘노 베어스’란 표현은 없는 것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감독의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선별적으로 찍히고 저장된 찰나의 것이 아니라 잘려 나가고 지워지는 무수한 것들을 봐야 한다고. 없는 것은 정말 부재한 것이 아니라 때론 아주 거대하게 그 존재를 증명한다고. 제목에서부터 그의 솔직한 고백이 이어지는 것이다.
감독은 회의와 좌절, 그리고 그 속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가능성을 고백하는 수단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었다. 자신의 목소리인 영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다 한들 이에 대해 말하는 수단으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목소리는 영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의도를 담아 제작하다 실패하고 만 영화도, 작품 바깥에서 발화를 선택하다 실패하고 만 사진도, 실패를 경유해 말할 수 있게 된 진심도 모두 《노 베어스》란 영화를 만드는 행위 자체를 통해 다시 말해지고 있다.
2022년 해당 영화가 베니스국제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을 때 그가 히잡 시위의 여파로 다시 구금된 상태였던 것도, 그리하여 작품 바깥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것도, 자라 역을 맡은 미나 카바니가 그 대신 시상식에 참석한 것까지 마치 영화의 연장선상같이 느껴진다. 그의 영화는 그렇게 어떤 방식으로든 말을 이어나간다.

감독은 정부로부터 일생에 거쳐서 컷 사인을 받았다. 그러나 컷 역시 소리를 내는 행위라는 점에서 일종의 액션(action)이기에,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영화를 찍을 수 있었다. 컷을 모아 만든 영화의 순간들은, 감독이 계속해서 말할 수 있고 앞으로도 말할 수 있게 만든다. 그렇게 영화는 영영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