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어도 너무 먼 탄핵
윤석열의 ‘후배’들, 서울대의 현재를 말하다
혁명 대신, 회전 속에서 시작하는 음악

윤석열의 ‘후배’들, 서울대의 현재를 말하다

12.3 내란을 대하는 서울대생의 자리를 찾아서
▲집담회 참여자 정보 ⓒ빈채현

  서울대생이 12.3 내란에 관해 말한다는 것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지난 세 달여 간 대학가에 오랜만에 익숙하고도 낯선 장면이 펼쳐졌다. 오늘날 대학생의 목소리는 모이는 방식부터 나아가는 방향과 세기까지 이전과 분명 달라졌다. 서울대는 이런 변화의 흐름 가운데서도 특히 자주 호명됐다. 언론과 댓글, 그리고 서울대생 자신도 이번 정국에서 계속 외치는 ‘서울대’는 어떤 의미일까. 기사와 언론 등 여론에서 드러나는 서울대의 책무에 대한 인식과 이 시대의 서울대생이 체감하는 서울대가 어떻게 닮아있고 또 다른지, 서울대 학부생 세 명과 이야기 나눴다.

▲집담회 참여자 정보 ⓒ빈채현

12.3 내란 이후, 서울대생의 기억 

  지난해 12월 3일 밤 이후, 서울대 곳곳에서 분주한 움직임이 이어졌다. 총학생회는 계엄령 직후 학생사회 대응을 위한 총학생회 운영위원회(총운위) 회의를 소집했다. 다음날, 날이 채 밝기도 전에 학내엔 학생들이 쓴 대자보가 여럿 붙었고, 게시판 앞은 대자보를 읽는 학생으로 북적였다. 5일 밤엔 전체 학부생의 약 17%가 참가한 전체학생총회(총회)가 열렸다. 이후 학과나 단과대 차원에서도 토론회, 세미나, 기자회견, 집회 등 대응이 이어졌다. 이 가운데, 각각의 서울대생이 경험한 내용은 저마다 다르다. 집담회 참여자들과 12.3 내란 전후로 학교 안팎에서 보고 들은 것을 얘기하며 논의의 물꼬를 텄다.

SJ 평소 서울대와 서울대생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나.

김호섭(김) 서울대 안에 워낙 다양한 사람과 단체가 있다 보니 직접 경험한 서울대도 매번 달랐다. 그럼에도 서울대는 다른 대학보다 정부 지원을 더 많이 받는 것이 사실이니, 서울대가 갖는 사회적 책임이 어느 정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성하(이) 좋은 생각을 하고 계신다. 나는 인터넷에 서울대생 특징 같은 글이 올라오는 걸 보면 내가 서울대생이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밖에서 나를 소개할 땐 서울대를 가장 먼저 뽑는다. 달리 소속돼 있는 단체가 있는 게 아니니까.

임준호(임) 별생각이 없었다. 누가 서울대 욕을 한다고 해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대학보다는 학과로서의 정체성이 더 컸다.

▲집담회 현장

SJ 이번 일을 거치면서 서울대생으로서 했던 것이 있나. 

 집회에서 서울대 깃발 아래 있었다. 굳이 깃발을 찾아간 이유는 같이 있다는 동질감을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총회에 갔다. 문제의식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는 건 확실히 느꼈지만, 실망한 부분도 있었다. 계엄 직후 줌(Zoom)으로 진행하는 총운위 회의에 참관했는데, 학생의 안전을 위해 본부에 휴교령을 요구하자는 안건이 있었다. 휴교령은 과거 독재 정권이 학생 시위를 막으려고 내린 것이 아닌가. 안전을 위해서라지만 그걸 우리가 요구하자는 게 무슨 발상인가 싶었다. 대학이 사회 전체를 보기보다는 자신의 집단만 보는 식으로 태도가 변했다고 느꼈다.

 총회 전 정치외교학부에서 진행한 토론회에 갔다. 거기도 자리가 없어서 서 있다가 너무 힘들어서 집에 갔다. 사람이 아주 많았다고 들었다. 그날 정말 추웠는데 다들 대단하다.

  집담회 참여자들은 서울대엔 다양한 사람이 존재하며, 외부에서 서울대생을 바라볼 때 흔히 떠올리는 모습과 실제 자신의 모습엔 간극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럼에도 참여자들은 실제로 서울대생으로서 국가나 사회로부터 더 많은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언급하기도 했다. 각자의 12.3 내란 이후 경험도 달랐다. 서로 다른 동기를 갖고 모인 서울대생의 활동은 언론 기사와 댓글에서도 여러 방식으로 의미를 부여받았다. 집담회 참여자들과 함께 서울대를 둘러싼 반응을 하나씩 보며 생각을 나눴다.

서울대생은 지성인인가?

  우선 서울대생을 지성인으로, 서울대를 국내 최고 대학으로 호명하는 반응부터 살펴봤다. 이는 바깥의 시선이면서 동시에 대자보나 자유발언 등에서 학생들이 스스로 자주 내건 개념이기도 했다. 총회를 생중계한 유튜브 영상에는 ‘역시 지성인’, ‘역시 국내 최고 대학’과 같은 댓글이 상당수 달렸으며, 지난 2월 학내에서 진행된 탄핵 반대 집회를 다룬 기사에도 ‘최고의 지성 대학’과 같은 댓글이 달렸다.

▲집담회 현장

SJ 평소 본인이 지성인이라 생각하는가. 이런 댓글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

 내 안에서도 두 입장이 양립하고 있다. 우선 내가 지성인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 학교가 총회를 열지 않았다면 부끄러웠을 것 같다. 만약 지방 사립대에서 총회를 열었다면 국내 최고 대학이란 댓글이 달렸을까? 아닐 것이다. 내 입장이 뭘지 스스로 묻게 되는데, 책임감을 어느 정도는 느끼는 것 같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지성인을 ‘자신의 편을 들어주면서 사회에서도 목소리를 크게 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일단 난 내가 지성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댓글도 집회에서 잘하고 있다는 의도로 쓴 것 같다. 근데 윤석열 대통령도 서울대 출신이 아니냐. 이런 시국에도 서울대를 국내 최고 대학이라 말하면서 비판을 위해 사회적 권위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한 태도가 의문스럽다. 그게 중요한 것처럼 되면, 우리는 또 다른 사회적 권위에 의존하는 것일 수 있다.

 자기 말을 따라주는 사람을 지성인으로 생각하는 게 아닐까. 국내 최고 대학이라는 표현도 안팎의 시선 차이가 큰 것 같다. 지금 서울대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불안해하고 있다. 아마 저 댓글은 서울대를 나오는 것만으로 정·재계 네트워크를 모두 관장할 수 있었던 시대를 생각하는 게 아닐까. 윤석열도 그 시대에 속한 사람일 테고. 우리는 사실 서울대에 대단한 자부심은 없는 것 같고, 오히려 부끄러움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집담회 참여자들은 지성인이란 호명에 부담을 표했다. 해당 용어가 지성인의 의미와 역할을 충분히 고민하지 않은 채 쓰이고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이 호명은 지성인의 정체와 그 역할에 대한 고민을 축소하며, 칭찬과 격려의 의도로 단순하게 쓰인다는 점에서 정확하지 않다. 나아가, 학력이나 학벌과 같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 권위가 있어야만 현 사안에 목소리 낼 자격이 있다고 전제하는 것은 적절하지도 않다. 참여자들은 그럼에도 이런 시선이 분명 존재하며, 그에 부합해야 할 것 같다는 의무감과 부끄러움을 함께 느낀다고 밝혔다.

서울대생은 왜 이제야 나서나? 

  계엄·탄핵 정국과 관련된 서울대생의 활동을 알리는 기사에는 ‘왜 이제야 나서냐’는 비판이 따르기도 했다. 서울대는 전국 대학 중 가장 먼저 총회를 열었지만, 관련 기사의 댓글에는 ‘지금이라도 동참해서 다행이지만 너흰 제일 먼저 나서야 했다’거나 ‘반성하고 책임을 통감하라’는 반응이 따랐다. 이는 앞선 지성인 논의와도 이어진다. 서울대생이 지닌 책임이 있다면 무엇일지 함께 이야기 나눴다.

SJ 이런 반응이 서울대생에게 기대하는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그게 가깝게 느껴지는가.

 더 이상 대학사회가 단일한 의견을 지닌 단체로 여겨지지 않는데, 대중이 요구하는 건 그게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생각하는 대학 사회는 더 이상 하나의 목소리를 내는 단체가 아니다. 서로 느끼는 것이 굉장히 다르고, 그런 부분에서 마찰이 계속 있을 것 같다.

 서울대니까 책임이 있다는 말은 지위가 갖는 함의가 있다는 뜻인 것 같다. 서울대 학생이 많은 재정적 지원을 받는 만큼 사회 공헌 의무가 있다고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개인 차원의 얘기다. 반면 이건 사회적인 목소리를 내는 일이다. 지금 서울대생이 경험하는 서울대는 예전과 너무 다르다. 대학생으로서 우리가 사회적으로 목소리 낸 것은 아주 잘한 일이다. 그렇지만 바깥의 시각은 실제 내부 행위자의 시각과는 동기나 책임감 차원에서 크게 다를 수 있다. 외부에서는 ‘서울대는 어때야 한다’고 얘기하지만, 서울대엔 책임감이 성립할 만큼 정치적인 입장을 같이 하는 학생사회가 구축돼 있지 않았다.

 책임이란 말은 계엄 전에도 꾸준히 들려왔다. 뉴스에서 서울대 관련 얘기가 나오면 댓글엔 항상 ‘요즘 서울대’에 관한 비판이 따랐다. 예전의 서울대를 생각하시는 분들에게 서울대는 학생운동을 이끌고, 조직이 굉장히 활발하고, 마르크스를 숨어서 읽는 등 시대의 책무를 지는 이들인 것 같다.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여전히 서울대에서도 학생들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것 같다. 입학했을 때 표어가 ‘지적 선구자’였다. 선구자나 지도자가 돼야 한다는 인식이 분명히 있다.

 나도 책임을 통감하지는 못하겠다.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민주시민으로서 책임을 통감하는 것이지, 서울대학교 학생으로서 책임을 통감하지는 않는다.

 이번 일에 대해 서울대생으로서 특별한 책임이 있다는 얘기는 민주적이지 않은 것 아닌가. 구체적으로 뭘 반성하라는 건가.

 계엄 전에도 서울대가 윤석열 대통령을 배출한 대학이라며 많은 논란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엔, 그때 목소리를 내지 않은 것에 대한 질책이 아닐까.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잘못이 터지니까 이제서야 말한다는 의미로.

SJ 만일 계엄 이전의 징조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질책으로 받아들인다면, 그때는 서울대생의 책임이라는 게 있다고 보는가.

 집단의 책임을 논하려면 우선 집단으로서의 의견이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집단이 형성돼 있지 않았다. 서울대에서도 처음부터 윤석열이 나빴다고 생각한 사람도 있었겠지만, 이번 일 이후로 이젠 진짜 아니라고 여기게 된 이들도 많다.

 ‘반성하고 책임을 통감하라’는 말은 홀로코스트에 대한 독일의 책임급으로 서울대생의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마치 윤석열이라는 히틀러는 너희의 선조가 아니냐는 얘기처럼 들린다. 그런데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과 우리는 너무 다른 시간대를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서울대생은 윤석열의 후배인가? 

  언론과 서울대생의 대자보, 자유발언 등에서 ‘윤석열의 모교’라는 수식어로 서울대의 위치를 말하거나, 윤석열을 선배라 부르며 서울대생의 지위를 말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울대가 윤석열의 모교라는 것이 어떤 의미일지, 윤석열을 선배로 여기는지, 모교나 선배라는 표현의 의미가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논의했다.

▲윤석열 ‘선배님’? ⓒ빈채현

SJ 평소 서울대 선배, 후배, 동문과 얼마나 가깝다고 느끼고 있었나.

 하나도 가깝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체감상 공과대학(공대)은 개인주의가 훨씬 세서, 당장 네이버나 넥슨을 창업한 분들이 모두 전부 서울대 공대 출신이어도 아무 연결감을 못 느낀다. 아주 예전에 학교를 다닌 분들이고, 친하다고 입사시켜 줄 것도 아니다. 심지어 윤석열 대통령은 없어진 법대 출신이다. 같은 대학교를 나왔다는 것 이상으론 아무 느낌이 없었다.

 로스쿨 학생은 윤석열을 선배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지만 서울대 자체는 단과대학이 너무 많지 않은가. 종합대학이기 때문에 분야가 너무 다르고 졸업생도 너무 많다.

 공대뿐만 아니라 지금 서울대 학풍 자체가 개인주의적이다. 서로 동료라고 생각하진 않는 것 같다. ‘서울대 잘 살자’보단 ‘나부터 잘 살자’는 태도가 더 많지 않은가?

SJ 총회나 대자보에선 서울대생이 적극적으로 윤석열을 ‘선배’라 부르기도 한다. 그 의도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이 서울대생이 윤석열을 선배님이라 부르는 건 정말 선배라는 감정을 느껴서라기보단 자신이 하는 말이 그와 관련 있음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라 생각한다. 해외에서 진상 한국인을 보고 ‘같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수치스럽다’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개인 차원의 정서적 연결이 없어도 아직 사회적으로 서울대가 가지고 있는 권위나 긍정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렇기에 당신이 그걸 사용해선 안 된다고 말하는 표현이 아닐까. 결국 당신이 한 행동이 잘못이라고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그 사람이 서울대 졸업장을 반납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진 않다. 서울대가 중요한 기관으로서 기능한다는 인식이 사회적으로 존재한다는 건 사실인 것 같다. 다만 지금 세대가 이걸 얼마나 공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SJ 윤석열에게 서울대 졸업장을 반납하라며 선배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보는가, 아니면 적극적으로 선배라고 부르며 연결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보는가.

 둘 다 부적절하다. 졸업장 반납 요구는 윤석열이 서울대생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이제껏 경력을 쌓아왔다는 강한 전제를 두고 있다. 그런데 이 사람들한테 졸업장을 반납하라는 건 사실 서울대생의 특권은 인정하겠다는 것 아니냐. 그걸 인정하면서 다만 너희에게 그 특권이 가는 것은 안된다고 말하는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윤석열이 반납해야 할 것은 대통령직이지 서울대 졸업장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정말 어이가 없다. 서울대 출신인 윤석열이 대통령이고, 한덕수가 국무총리고, 최상목이 기획재정부 장관인 게.

김 학벌이 실력이 아니라는 게 여기서 극명하게 나오는 것 아니겠는가.

서울대생은 박종철의 후배인가? 

  민주화 운동에 앞장선 이들 역시 서울대생의 선배다. 총회를 생중계한 유튜브 영상에는 ‘당신의 선배들이 민주주의를 만들고 선배들이 독재자를 만드네요’라는 댓글이 달렸다. 총회 당시 자유발언에 나선 한 학생은 박종철 열사의 사진을 가지고 나오기도 했다. 이런 선배를 생각할 땐 어떤 마음이었는지 얘기하며, 서울대생의 자리에 관한 생각을 나눴다.

SJ 박종철 열사를 포함해 서울대에서 민주화 운동을 했던 분들과는 평소 가깝다고 느꼈는가.

임 가깝다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박종철 열사는 너무 존경하는 위인이지만 서울대를 통해 그걸 느끼는 건 아니다. 서울대를 일부러 높게 평가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이런 표현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영웅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그 영웅이 대학에 다녔는데, 그 대학은 대체로 서울대든 연세대든 명문대였다는 식으로. 너무 과거를 상정하는 게 아닌가 싶다.

이 역사 시간에 배웠다. 경복궁을 생각할 때 느낌과 비슷하다. 경복궁은 자랑스럽고, 박종철 열사도 자랑스럽다.

김 민주화 운동을 해주신 분들께 물론 감사하지만, 서울대라서 특별히 더 감사하다거나 친밀하다는 느낌은 없다. 다만 개인의 차원에선 독재에 저항해 민주화 운동을 한 분들과 연결점이 생겼기 때문에 좀 더 공감할 순 있다. 그런데 그 공감은 사회적 책임이나 규율로 환산될 수 있는 공감이라기보단 개인적으로 더 깊이 다가오는 정도의 공감이다.

SJ 외부에서 서울대를 바라보는 시각이 현재의 서울대와는 거리가 멀게 느껴진다는 말이 계속 나왔다. 궁극적으로는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임 줄이는 게 의미가 있을까. 주변 환경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 흐름에 맞춰서 내부의 사람은 변화한다. 인식을 좁힌다고 하면 가령 좀 전의 ‘책임을 통감하라’는 요구에 대해 ‘책임 통감 쇼’를 여는 것일 테다. 그걸 해내는 게 의미 있을까. 저 당시 민주주의를 일궜던 서울대 역시 그 당시 외부에서 바라본 서울대와 달랐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김 예전에 비해 정서적 거리가 멀어지는 게 당연하다. 그렇지만 이번 비상계엄을 통해 과거의 사건을 현재 관점에서 재해석하고 적용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 면에서 우리가 박종철 선배의 유산을 올바른 민주적 시선을 가지고 잘 지켜내려고 노력한다면, 지혜로운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보존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공동체적 감각을 강화하는 건 학벌주의와 멀어지는 것과 상충한다. 좀 더 한국 시민으로서 느낄 순 없을까. 민주주의를 꼭 서울대생으로서만 느껴야 할까.

김 서울대에서 시국선언을 하는 등 중요한 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시국선언은 과거와의 동질감 없이도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꼭 공동체적 연결을 상정해야만 과거 선배들과 연관성에 대한 개인이나 집단의 평가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SJ 마지막 질문이다. 집단의 이름으로 말할 땐 지금 그곳에서 자신들이 그 말을 하는 이유가 언급된다. 이번에도 각계각층에서 자신의 고유한 자리를 언급하며 나서지 않았는가. 앞으로 서울대생이 뭔가를 비판하며 나설 때 그 학생이 서 있어야 할 위치는 어떤 것이어야 할까.

김 하나의 대학으로서 얘기하는 게 가장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비슷하다. 대학이라는 정체성. 

이 저도 그렇게 생각한다. 억지로 과거와의 연결점을 찾는 게 더 부자연스러워진 때가 됐다. 학벌주의에 기반해 연결 지점과 위치를 찾는 것은 좋지 않다. 

▲서울대생의 자리에서 현 정국을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의미를 지닐까.

  내란을 주도한 윤석열을 비롯해, 내란 동조자로 불리는 많은 이가 서울대 출신이다. 언론은 이들을 비판하는 서울대생의 행보에 주목한다. 이런 점에서 많은 학생이 서울대의 특수성과 그에 따른 고유한 책무가 있다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지성인, 최고 대학, 윤석열과 박종철의 후배라는 외부의 평가를 내면에 이식하는 방식과 연결될 수 없으며, 더군다나 그런 방식은 효과적이지도 않다. 과거와 크게 달라진 현재의 대학 풍경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학생으로서, 어떤 대학으로서 발언해야 할까. 서울대와 서울대생의 특수성과 책무를 고민하는 일은 과거의 유산을 단순히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왜 이렇게 달라졌는가. 왜 그럼에도 모여야 하는가.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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