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바다 너머의 지평선을 바라보며

  12월 3일 밤 10시 27분. 대한민국 대통령실에서 불꽃이 일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라는 단 한 문장은 고요하던 밤을 전부 집어삼킬 듯 그악스레 불거졌습니다. 그러나 다른 불길이 이를 가로막았습니다. 대한민국 전역에 휩싸인 당황, 공포, 그리고 분노의 불길이.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불길이 조금이라도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면,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장작 삼아, 혹은 불씨를 옮기며 되살렸습니다. 상황을 끊임없이 일깨우고, 현장에 나서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목 놓아 외치면서. 

  우리 모두는 대한민국 전역에 번진 큰 불길 속에 서게 됐습니다. 원했든, 원치 않았든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이라는 현실은 닥쳐왔고, 우리는 그 위에서 살고 있으니까요. 불은 너무나 강렬하고 뜨겁기에, 불에 둘러싸이면 그것 말고는 생각할 수 없게 된다고 합니다. 12월의 대한민국이 그랬습니다. 어디에 가도 12.3 내란과 윤석열의 거취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도 작금의 사태에 대한 평가나 상대가 선 진영을 묻는 질문이 빠지질 않았습니다. 윤석열이 물러나고 민주주의가 실현될 때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이 불꽃을 보게 될 터입니다. 

  그리고 이 불의 바다 안에서, 누군가가 그 너머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불길이 모두 사그라들고 나면 무엇이 남을지, 남은 재와 불티 위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해 보기 시작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불이 붙은 원인을, 나아가 그날 점화를 가능케 했던 요인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또 누군가는 앞으로의 미래를 그려보자고 제안했습니다. 불을 살려냈던 행동들을 기억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번 189호는 불의 바다에 섰던 이들과 그 너머를 바라보는 시야를 쫓았습니다. 계엄을 가능케 했던 정치적·사회적 요인을 뜯어보고 그 이후를 상상하는 커버스토리. 탄핵 정국 속 서울대 학생사회의 이야기를 담아낸 학원부 초점. 입이 막혔던 과거를 직시하고 그럼에도 흘러나온 노래들을 따라가 본 문화부 초점. 불길 속에서 빛났던 순간순간을 담아낸 세뜨기들. 이 외에도 기자들이 본 불의 바다와 그 너머의 모습을, 지면 위에 그려냈습니다.

  여전히 타오르고 있는 불 위에 서 있을지 모를 여러분께, 이 지면이 또 다른 풍경을 보여줄 수 있길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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