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목소리는 새롭게 돌아온다

12.3 내란 이후의 광장을 노래로 톺아보다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멜로디는 손으로 붙들 수 없다. 한국 현대사에 얼룩진 억압의 틈새에서, 언제나 노래는 억누르는 손길을 벗어나 사람들 사이로 퍼졌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노래를 제외하고 광장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12.3 내란 이후 포착된 광장의 장면에서 음악을, 또한 음악으로부터 파생된 문화를 빼놓을 수는 없다. 노래는 어떻게 민중의 희망을 담아왔을까. 그것이 이번에는 어떻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을까. 노래를 통해 우리는 광장을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선 곳은 달라도, 같은 노래 아래로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광장이 하나의 얼굴이라면, 각자가 목격한 모습은 그때마다의 다양한 표정일 것이다. 12.3 내란 이후의 광장은 집회의 성격에 따라 그 장소와 풍경이 달라졌고, 그 장소에 참여하는 이들 역시 매우 다른 정체성을 가진 유동적인 개인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민들이 가진 집회 경험 역시 일률적일 수 없다. 광주광역시 출신인 김인우(종교학과 석사과정) 씨는 지역성이 강하게 연결된 상태로 계엄을 경험했다. 계엄령이 포고된 뒤 “서울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시스템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반면 고향 사람들은 ‘무섭다’ ‘도망쳐라’ 등 생존에 직결된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고 김 씨는 말했다. 1980년 5월 광주 민주항쟁(광주 민주항쟁)은 계엄군에 의해 도시가 봉쇄되고 시민들이 희생된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다. 김 씨는 자기 자신과 고향 사람들의 반응으로부터 “역사적 트라우마가 시대를 넘어서서 지속되는 모습”을 발견했다. 

  김인우 씨는 국회의사당과 남태령 집회에 나갔지만, 고향인 광주의 집회에도 참여한 바 있었다. 광주와 서울은 집회의 풍경이 달랐다. 광주 집회에서는 “지인부터 학교 선생님이나 독립 서점 사장님들 등 아는 얼굴이 많이 보였다”고 김 씨는 말했다. 규모가 크고 단위별로 나눠진 서울의 집회와는 달리, 광주의 집회는 “내가 정말 속해 있는 지역 공동체를 직면하는 경험으로 다가왔다”고 김 씨는 설명했다. 

  한편으로 20대 후반 페미니스트 여성인 부룽 씨는 광화문 집회에 참여했다. 부룽 씨는 집회 현장에서 “수많은 깃발과 수많은 사람의 수를 보고 압도됐다”고 말하며 “최소한의 헌정 파괴 행위가 있을 때 사람들이 이렇게 모인다는 데에 울컥했다”고 소회를 털어놓았다. 부룽 씨는 깃발들이 인상적이었다고 기억했다. “처음 보는 국기부터 투쟁 부대 깃발, 프라이드 플래그*, 재치 있는 농담이 적힌 깃발 등이 수적으로 많아서 기억에 남았다”고 부룽 씨는 떠올렸다.

*프라이드 플래그(pride flag): 성소수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지향성에 대한 긍정과 서로 간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내거는 상징 깃발. 

  그런가 하면 1993년부터 서점 ‘그날이 오면’을 운영해 온 김동운 대표는, 집회에 꾸준히 참여하며 발견한 변화들에 대해 언급했다. 김 대표는 “탄핵소추안 가결을 요구하던 초반 국회의사당 집회에는 촛불 혁명 때처럼 사람들이 아주 많았다”고 기억하며 “다양한 지향성을 지닌 이들이 적극적으로 주류가 돼 발언을 이어가며 열린 광장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시간이 지날수록 동력이 차츰 약화하는 추세”라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고비 하나를 넘겼어도 위기가 끝난 게 아닌 데 비해 진보적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의 참여는 부진해지는 것 같다”는 것이다. 이처럼 각자가 기억하는 광장의 풍경은 달랐다. 넓은 광장에서 각자 선 곳이 달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노래는 모두에게 울려 퍼졌다. 집회에 참여한 이들은 모두 이번 광장에서 흘러나온 노래들을 인상적으로 기억했다. 부룽 씨는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부터 로제의 ‘아파트’, 김현정의 ‘멍’ 등 다양한 세대의 노래가 나왔다”고 기억하며 “집회가 축제가 된 것 같았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12.3 이후로 광장에서는 노래가 최대의 화제로 떠올랐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같은 민중가요부터 최신 케이팝 노래들까지 다양한 노래들이 뒤섞였기 때문이다. 

  노래는 언제나 집회와 뗄 수 없다. 음악 평론가이자, 현재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비상행동)’에서 집회 공연을 기획하는 서정민갑 대중음악의견가는 “노래만큼 집회문화에서 강력한 의미를 가진 언어는 없다”고 말했다. “노래는 모인 사람들의 동질감을 확인하고 일체감을 배가해 준다”고 서정 의견가는 짚었다. 서로 다른 시민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데 음악은 필수적인 것이다. 또한 서정 의견가는 “집회에서 논리적인 연설만 한다고 흥이 나진 않는다”고 말하며 음악이 제공하는 감정적 격발이 집회를 지속하는 데 힘을 준다고 설명했다. 

  그러므로 이번에 광장에서 포착된 민중가요부터 케이팝까지 넘나드는 다양한 곡들 역시, 저항의 현장에서 함께해 온 노래의 역할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민중의 저항이라는 맥락에서 노래는 어떻게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으며, 이번 집회들에서는 어떤 배경을 가지고 독특한 얼굴로 드러났을까.

시대의 어둠을 넘어온 민중가요 

  포크 음악 가수이자, 용산 참사 현장부터 오늘날 숱한 투쟁의 현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 황푸하는 노래가 “투쟁에 의미를 더해주는 것을 넘어서 투쟁의 힘과 정신 그 자체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말처럼 저항의 역사가 빼곡한 현대사에서 노래는 빼놓을 수 없는 요소였으며, 노래를 통해 그 투쟁의 흔적을 읽어낼 수도 있다. 

  투쟁의 역사를 함께하며 만들어졌던 노래들은 민중가요라고 불렸다. 전남대 5·18 연구소 정유하 전임연구원이 저술한 민중가요 기록집 『그래도 우리는 노래한다』(2017)에 따르면, 민중가요가 본격적으로 퍼져나갔던 것은 광주 민주항쟁 이후였다. 광주 민주항쟁의 진실을 규명하고, 군부 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래들은 곧 ‘민중가요라는 용어로 정립되고 성장했으며 활발한 노래 운동이 뒤따랐다’고 정 연구원은 밝혔다. 노래 운동은 노래를 제작하고 배포함으로써 투쟁을 전개하는 사회 운동의 일종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노래 운동이 발생하기 전인 60년대와 70년대에도, 노래에 투쟁의 정신이 담기기는 마찬가지였다. 정유하 연구원은 60년대에는 ‘음악 운동이라고 할 어떤 징후도 없었지만 청년과 학생들은 만나면 노래를 불렀다’고 밝힌다. 당시의 시국이나 정권을 비판하는 예술 운동은 무자비하게 탄압받았기에 민중가요가 따로 제작되긴 어려웠으나, 사람들은 기존의 노래를 다르게 부르는 것으로 탈출구를 찾았다. 사람들은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가곡부터 외국에서 들어온 운동가 등을 불렀으며, 기존의 노랫말을 고쳐 부르는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 등의 움직임 역시 이어졌다. 

  민중가요로 분류될 수 있는 첫 음악은 1971년 발표된 김민기 작곡·양희은 노래의 ‘아침이슬’이다. 정유하 연구원은 ‘아침이슬’이 ‘광야 같은 사회를 바라보며 갖는 체념을 실은 순응, 그리고 작은 결단 등을 노래’했다고 설명했다. 정 연구원은 사랑과 이별이라는 고전적인 주제에서 벗어나 시사성을 담아낸 ‘아침이슬’은 ‘민중가요가 배워가야 할 규범을 제시한 셈이 되었다’고 짚었다. 그리고 이후 광주 민주항쟁의 진상이 알려지면서, 강렬하고 직설적인 노랫말을 담은 민중가요들이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악보의 초고 ©위키피디아

  민중가요는 국가나 상업 자본의 손길로부터 독립해, 음악인들 개개나 대학생들에 의해 암암리에 제작되고 배포됐다. 예컨대 ‘오월의 노래 1’은 서울대 노래모임 ‘메아리’의 단원이었던 문승현 씨가 제작해서 퍼뜨렸다. 가장 대표적인 민중가요로 알려진 ‘임을 위한 행진곡’은 작곡가 김종률이 곡을 짓고 황석영 작가가 가사를 붙였다. 이 노래는 광주에 살고 있던 황 작가의 집에서 몰래 녹음됐고, 황 작가는 해당 테이프를 서울에서 복사해 전국으로 배포했다. 김지하 시인의 대표적인 시를 노래로 담은 ‘타는 목마름으로’ 역시 1983년 1월, 연세대 현대문화연구회 회원들이 함께 모여 낭송하던 자리에서 우연히 가락이 붙어 탄생했다. 

  이후 ‘노래는 집회와 시위에 필수 불가결한 수단’이 됐다고 정유하 연구원은 표현했다. 이는 1987년 6월 민주항쟁의 승리 이후로도 이어져, 80년대 후반 학생 운동과 노동 운동에서도 마찬가지로 계속됐다. 이 당시 민중가요와 노동가요는 대학가와 집회를 추동하는 중요한 하위문화로 자리 잡았으며, ‘파업가’나 ‘철의 노동자’ 등 노래들이 탄생했다. 90년대를 지나 사회 운동의 열기가 사그라듦에 따라, 민중가요의 입지 역시 좁아졌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2000년대 이후 집회 문화가 촛불 시위로 바뀌면서 민중가요가 예전처럼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사실”이라며 “30곡을 틀면 5곡 정도만이 민중가요일 정도”라고 말했다. 민중가요들이 당시에 담고 있었던 사회 운동의 열기가 오늘날에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가요는 그 자신의 시대를 넘어 현재로 연결되기도 한다. 가수 황푸하는 “‘임을 위한 행진곡’은 가본 적도, 태어난 적도 없는 1980년 망월동 봄으로 우리 모두를 이끈다”고 말했다. 서정민갑 의견가 역시 민중가요가 여전히 발휘하는 힘을 이야기하며 “민중가요는 직접적으로 집회의 메시지를 각인시킬 수 있으며 현재의 광장이 과거의 민주화 운동과 이어져 있다는 결속감을 충전시킨다”고 설명했다. 예전에도 그랬듯, 민중가요는 지금도 유효한 투쟁의 언어로 이어지고 있다.

케이팝과 ‘전유’로써의 민중가요 

  이전의 역사 속에서 민중가요가 집회를 추동했다면, 12.3 내란 이후에 광장의 열기를 달군 노래는 케이팝이었다. 탄핵소추안 투표가 불성립된 12월 7일에는 기세를 북돋기 위해 걸그룹 에스파의 ‘위플래시’가,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던 12월 14일에는 다음 단계로 가자는 의미로 같은 그룹의 ‘넥스트 레벨’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이 흘러나오는 아이돌 음악에 맞춰 구호를 외치고, 응원봉을 흔드는 모습은 이번 광장의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 잡았다. 

  이제 걸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는 ‘임을 위한 행진곡’에 버금갈 정도로 집회에서 뺄 수 없는 음악이 됐다. 그러나 ‘다시 만난 세계’가 그런 지위를 가진 게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일은 아니다. ‘다시 만난 세계’는 이미 2016년 이화여대 학생들이 미래라이프대학 신설에 반대하며 시위를 벌일 때 부른 것을 기점으로, 꾸준히 집회에서 호출돼 왔던 노래기 때문이다.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김동운 대표는 케이팝이 집회 음악의 주류를 차지한 이번 광장이 “기존 집회에 비해 매우 이질적인 모습”이라면서도, “최근 집회들에 참여할 때 케이팝이 배경에 깔리는 것은 이미 나타났던 변화”라고 말했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이런 변화의 주요한 원인으로 “집회를 주도하는 세력이 변했다”는 점을 짚었다. “80년대에는 운동권이 집회를 이끌면 시민들이 박수를 쳐 준 반면에 이젠 시민들이 직접 무대 위에서 발언한다”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운동권이 주도적으로 생산했던 하위문화인 민중가요보다도, 더 대중적으로 참여자들을 포섭할 수 있는 노래가 필요해졌다. 

  집회에 참여하는 시민 구성의 변화 역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참여한 시민 중 2030 여성들이 늘어난 현상”을 짚었다. 윤석열 퇴진을 요구하는 청년들의 외침을 한데 모으는 ‘윤석열 퇴진을 위해 행동하는 청년들’이 1월 1일부터 13일까지 10~30대 청년들에게 ‘왜 광장에 나왔는지’ 물어본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중 여성의 비율은 76.7%로 과반수를 넘겼다. 서정 의견가는 “이들은 케이팝 팬이기도 하고, 케이팝이 친근한 학생이나 노동자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즉 그들이 자연스레 향유할 수 있는 음악이 집회에서도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케이팝은 새로운 민중가요가 될 수 있을까. 80년대 증폭된 민중가요의 면면과 케이팝이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는다. 당시의 민중가요는 민중 해방을 위해 목적 의식적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가사부터 직접적인 개혁을 요구했고, 또한 상업 자본이 침투하지 않고 민중이 제작의 주체가 됐기 때문이다. 대다수 케이팝은 이러한 민중가요의 전통적인 규범에서는 이탈한다. 

  하지만 민중가요가 꼭 특정 시대의 정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민중’ 자체가 변화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UCLA 이남희 한국학연구소장은 저서 『민중 만들기』(2015)에서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민중 담론을 분석하며, 70, 80년대에는 공장노동자와 농민들이 ‘진정한 민중’으로 분류됐지만 80년대 후반에는 심지어 자영업자나 군부의 ‘민족주의적 요소’까지도 민중에 포함됐다고 말한다. 즉 ‘민중이라는 용어는 다분히 추상적이고 가변적’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민중은 과거와 달라진 현재의 광장을 담아내는 새 개념이 될 것이며, 민중의 노래인 민중가요 역시 그 변화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형형색색의 응원봉으로 빛나는 집회 ©송태현 사진기자

  케이팝은 처음부터 민중가요로 만들어지진 않지만, 사후적으로 민중가요로 전유*된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한 노래가 집회 현장에서 기존과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초에 ‘다시 만난 세계’가 어떤 의미였든, 그 노래가 광장에서 불리면 개혁 이후의 지평을 고대하는 곡이 되는 것처럼.

*전유(專有): 원래의 문화 요소나 자본을 기존 맥락으로부터 이탈시켜 새로운 맥락에서 차용하는 행위 

  민중이 노래를 재해석해 민중가요로 활용하는 현상은, 민중가요의 역사에서 오히려 더 본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다. 본격적인 민중가요가 탄생하기 전이었던 60, 70년대에는 주로 기존의 노래를 선택해 의미를 다르게 부여해 부르곤 했고 이런 노래들에는 ‘단가, 민요, 연극의 주제가, 복음성가 등’이 포함됐다. 최초의 민중가요로 여겨지는 ‘아침이슬’ 역시 작곡가 김민기가 민중가요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심지어 ‘아침이슬’은 1971년 박정희 정부에 의해 건전가요상을 받기까지 했다. 그러나 대학가에서 차츰 이 노래를 투쟁의 맥락으로 끌어오자, ‘아침이슬’은 1975년 금지곡으로 그 운명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즉 민중가요에서 중요한 것은 누가, 어디에서, 어떻게 노래를 전유하느냐다. 그러므로 오늘날 케이팝이 민중가요처럼 기능하는 현상은 새로운 게 아니라, 도리어 늘 존재했던 민중가요의 근본적 가능성이 다른 얼굴로 드러난 것에 가깝다. 이러한 현상은 변화한 민중의 출현을 암시하며, 그 민중이 투쟁의 주제곡을 자유로이 선택한다는 주체성을 확인시킨다.

열린 광장을 향해, 기꺼이 뒤섞이는 노래 

  케이팝과 응원봉이 새로운 집회 문화를 형성하면서, 광장은 하나의 축제의 장처럼 변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축제성을 비판하기도 한다. 자유기고가 복길의 〈경향신문〉 기고문 ‘언제까지 어깨춤을 추게 할 거야’엔 남태령 시위 풍경을 바라보며 누군가 ‘빠순이만 신나는 탄핵 파티’라고 조롱성 댓글을 달았던 사례가 소개된다. 집회에 특정 문화가 부각되거나, 집회가 신나는 ‘파티’가 되면 그 진정성을 의심받는 것이다.

  하지만 집회 참가의 자격을 따지거나 진정성을 검증하는 순간 광장은 경직된다. 김인우 씨는 “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다른 정념과 생각을 갖는다”고 말했다. 김 씨는 “과거처럼 1명이 죽고 나머지 99명이 숙연함으로 집회를 이어가는 전통에 더 이상 머무를 수는 없다”고 짚으며, “장례식이 아니라 축제여야만 우리가 기꺼운 마음으로 앞으로의 민주주의를 고민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케이팝이 지닌 축제성은 모두가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게끔 광장을 개방했고, 이는 다양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의 참여 역시 촉진했다. 가수 황푸하는 이번 집회가 “윤석열 파면을 넘어 사회 대개혁을 기치로 내걸고 있다”고 평했으며, 부룽 씨 역시 이번 광장을 바라보며 “좁은 의제를 넘어서 다양한 사람들이 각자의 정체성과 이야기를 소개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느꼈다.

▲이번 집회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던 응원봉

  응원봉 문화는 이러한 다양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집회에 블랙핑크 응원봉을 들고 갔다는 부룽 씨는 “케이팝이라는 문화 자체가 퀴어 문화를 비롯한 다양한 하위문화를 참고해 왔다”며, “다양성을 차용해 온 문화의 상징물이 집회의 최전선에서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뜻깊다”고 말했다. 또한 본래 응원봉은 각자 응원하는 그룹이나 멤버를 비추는 빛이지만, 이번 광장에서만큼은 그 다양한 응원봉이 한곳에 모여 같은 방향으로 빛을 쐈다. 이 다채로운 색깔의 빛들은 광장을 문자 그대로 무지개색으로 물들였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번 광장이 케이팝과 응원봉만으로 대표될 순 없다. 도리어 광장에 나타난 케이팝 문화를 지나치게 강조하다 보면 광장의 다양성을 위축시킬 수도 있다. 민중가요가 주가 됐던 기존 집회에 익숙한 사람들은, 이 새로운 문화를 낯선 언어로 받아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동운 대표는 “잘 적응한 사람도 있겠지만 생소함 때문에 다음 집회부터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케이팝이 새로운 민중가요로서의 가능성을 가진다 해도, 이전까지 이어져 온 민중가요의 고유한 몫을 대체할 수는 없다. 김동운 대표는 “케이팝이 젊은 세대를 대중적으로 유인하는 의미가 있겠지만 ‘임을 위한 행진곡’처럼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는 것은 아니다”라고 짚었다. 그 제작에 있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깊은 숙고가 있거나, 가사를 통해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의미를 표출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케이팝은 기존의 민중가요와 상호보완적 관계에 놓인다. 서로 다른 음악이 집회에서 만날 때, “서로가 서로에게 침투되는 경우도 보인다”고 김동운 대표는 말했다. 응원봉을 흔들던 이가 민중가요의 가사를 찾아보거나, 케이팝을 모르던 이도 최신곡이 나올 때 박자를 타는 것이다. 즉 다양성은 케이팝이나 기존의 민중가요 한 축에서만 보장되는 게 아니라, 이들이 서로 접촉하고 교섭할 때 비로소 생겨난다. 

▲12월 14일 탄핵소추안 가결 뒤의 국회의사당 풍경. 집회가 끝난 뒤에도 다양한 노래가 축제처럼 뒤엉켰다.

  김동운 대표는 “케이팝을 틀 때 구호를 가사에 넣거나 곡 사이사이에 직접적인 표현을 삽입하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한편으로 “민중가요 역시 과거의 곡 그대로를 답습하기보다 음률이나 가사를 요즘에 맞게 바꿔야 한다”고 짚었다. 서정민갑 의견가 역시 “모든 시대에는 그 시대의 사운드가 있다”며 “동시대의 음악성과 대중성을 모두 고려해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낼 만한 새로운 민중가요를 구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리가 민중가요를 경유해 광장의 다양성을 상상하기 위해서는 노래 역시 변화의 가능성에 주목해야 한다. 서정민갑 의견가는 비상행동에서 공연을 기획하며 “집회에 많이 서지 않았던 다양한 음악인들을 세우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시민들이 변화하고 집회 언어 역시 변하고 있다면 음악을 통해서도 광장의 다양성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의 고정된 음악적 표상만이 민중과 광장을 담아내지 않는다. 끝없이 변하고 만나며 뒤섞이는 노래의 축제에서, 비로소 광장은 열려있을 것이다.

  노래는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바꾸고자 했던 모든 시공간에 언제나 함께했다. 때로 결의가 노래를 만들기 전에, 노래가 결의를 부추기기도 했다. 절박한 자유를 부르짖었던 과거부터, 다양한 시민들의 공존을 촉구하는 현재까지. 그 과정에서 민중의 노래는 언제나 계속 다시 태어나 돌아온다. 광장이 짓는 표정이 달라졌듯, 그 위에서 맴돈 노래 역시 달라질 것이다. 앞으로도 노래는 계속 새롭게 변해가겠지만, 우리가 노래할 것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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