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은 뜻밖의 만남을 만든다. 트랙터 탄 농민과 응원봉 든 퀴어가 만나고, 교복 입은 청소년과 머리띠 맨 노조원이 함께 노래를 부른다. 이것은 지난겨울, 민주주의 광장이 만들어낸 수많은 만남 중 하나에 관한 이야기다.
윤석열 퇴진 집회가 열린 12월 28일, 하길은 광화문 앞에 홀로 서 있었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라고 적힌 큼지막한 깃발을 들고.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인 『일리아스』의 첫 구절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시여’를 재치 있게 비튼 문장이었다.
그때 웬 중년 남성이 하길에게 다가와 물었다. “일리아스를 아세요?” 같은 작품을, 그것도 잘 알려지지 않은 서양 고전을 좋아하는 ‘덕후’를 만나 신이 난 그는 서둘러 하길에게 명함을 건넸다. 서울대 서양고전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는 안재원 교수 (서양고전문헌학과)였다.
20대 여성 덕후와 50대 남성 교수가 같은 작품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벗이 될 확률은 몇이나 될까. 이 기막힌 인연은 ‘일리아스 덕후가 서울대 서양고전학연구소장에게 명함 받은 썰’로 SNS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두 사람은 『일리아스』에서, 또 지금의 광장에서 무엇을 보고 느꼈을까. 아직 끝나지 않은 겨울의 어느 오후, 책으로 가득 찬 연구실에서 깃발 주인과 명함 주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두 분의 첫 만남 이야기를 들려달라.
안재원 지인과 술 한잔하러 광화문에 갔다가, 하길이 든 깃발을 봤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 아래에 ‘아카이아* 노동조합 미르미돈** 지회’라고 작게 적혀 있었는데, 처음엔 ‘아카이아’가 아니라 ‘이케아(가구업체)’인 줄 알았다. 깃발을 든 사람에게 『일리아스』를 아시느냐고, 대학원생이냐고 물었더니, 하길이 말하길 대학원생은 아니고 그냥 ‘덕후’라더라. 연구자가 아니면 손대지 않을 그리스 고전을 재밌다고 읽는 사람이 있다니, 신기하고 재밌었다. 나중에 학계 사람들에게 “아킬레우스가 대한민국을 구하러 왔다”며 자랑하기도 했다.
*아카이아: 아킬레우스가 속한 도시국가 연합
**미르미돈: 아킬레우스를 따르는 전사 부족
하길 사실 그날 깃발을 올리지 않으려 했다. 집회에서 만나기로 한 지인에게 내 ‘덕질’을 들키는 게 어쩐지 부끄러웠다. 지인이 다른 쪽으로 간 덕에 겨우 깃발을 올릴 수 있었다.
‘분노를 노래하소서, 민중이여’란 문구에 담긴 의미는 무엇인가.
하길 원문대로 ‘분노를 노래하소서, 여신이시여’를 쓸 생각이었는데, 깃발을 디자인한 지인이 여신 대신 민중을 넣으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내가 좋아하는 또 다른 작품인 『레미제라블』에서도 민중이 핵심어다. 뮤지컬 넘버 ‘민중의 노래’도 있고. 『일리아스』와 『레미제라블』, 두 작품을 하나로 녹여낸 문구다. 또 민중으로서 광장에 나서는 것이니 나름의 의미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큰 뜻 없이 만든 문구에 의미가 쌓이고 쌓였다.
안재원 원래 그렇게 다 장난으로 시작하는 법이다. 장난이, 재미가 중요하다. 재미는 사람을 끌어모으고 견디게 한다. 지금의 광장도 그렇지 않나. 집회에서 말하고, 노래하고, 다른 사람들 보는 게 즐거워서 매주 사람들이 광장으로 나오고 밤새 자리를 지키는 것 아닌가.

지금 퇴진 집회의 분위기는 2016-2017 촛불 정국과 사뭇 다른 것 같다. 온갖 덕후들이 총출동한 가운데, 퇴진 너머의 세상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가 들려온다. 두 사람이 주목하는 변화는 무엇인가.
하길 2016년에 비해 다양성이 훨씬 더 존중받는 광장이 만들어졌다. 그때는 퇴진이라는 하나의 의제만 말해야 하는 분위기였다. 반면 지금의 광장에선 다양한 주체가 등장해 저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정체성을 가졌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를 말한다. 자유롭게 자신을 드러내고, 서로를 포용하는 분위기가 반갑다. 촛불 혁명 이후 우리 삶이 크게 변하지 못했다는 성찰이 있었고, 그 사이 페미니즘과 소수자, 노동 의제를 비롯한 다양한 담론이 형성됐다. 여러 가치 가운데 어느 하나를 버릴 수 없고, 모두를 끌어안고 다 함께 살아가는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마련된 것 같다. 우리는 광장에서 서로를 더 잘 알아가고 있다.
안재원 수사학 연구의 일환으로 종종 퇴진 집회에 갔다. 책에 박제된 말이 아니라 지금 현장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싶었다. 사람들의 자유발언을 듣다 보면 우리 세대가 학생 시절 데모를 할 때와는 완전히 다르다. ‘절대악’을 때려잡고 쫓아내는 것이 80년대 민주화운동의 전형적인 서사였다. 전두환이란 ‘나쁜 놈’을 향한 적대감이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다. 그러나 지금의 광장은 다르다. 사람들은 물리쳐야 할 적이 아니라,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덕후들은 좋아하는 것을 매개로 모인 이들과 함께 광장에 나간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좋아하는 것이 자유고, 그 자유를 지키기 위해 광장에 나왔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덕후들은 각기 다른 것을 좋아하기에, 때로는 그 과정에서 무지 싸우기도 한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들은 공동체의 위기 앞에서 연대한다. 서로의 다름을 존중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집회 도중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서 게임을 하는 사람들을 봤다. 집회에서 자리를 지키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모습이다. 이들에게 민주주의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함께 더 즐겁고 뜻있게 살고 싶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단발적인 운동이 아닌, 그냥 일상이다. 광장의 사람들은 의무와 권리를 일상의 언어로 표현한다.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먼저 가서 미안하다, 전에 나서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왔다, 옆에 있어줘서 고맙다, 같이 있으니 더 즐겁다면서. 이들은 잔디 뿌리처럼 끈질긴 연대를 이어가고 있다.

두 덕후께서는 왜 『일리아스』를 좋아하나.
하길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 때문에 『일리아스』에 관심을 가졌다. 두 사람이 주인공인 매들린 밀러의 로맨스 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2011)를 재밌게 읽은 뒤, 이 둘의 서사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일리아스』 원전을 읽게 됐다. 그런데 원전을 읽어보니 로맨스가 전부가 아니었다. 『일리아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 분노에서 시작해 연민과 슬픔으로 나아가는 이야기였다. 사람 사는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꼈다.
두 주인공이 연인으로 묘사된 『아킬레우스의 노래』와 달리 원전에서는 아킬레우스와 파트로클로스의 관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있다. 나는 두 사람이 사랑하는 연인 혹은 끈끈한 동료이기 이전에 둘이 하나인 존재, 서로 떼어낼 수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가 지듯 말이다.
안재원 일단 나는 덕후는 아니고, 『일리아스』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가르쳐야 하니까 공부한 입장이다. 서사 구조보다는 당대의 사람들에 대한 호기심이 앞선다. 문자가 없던 시절엔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했는지 살펴보는 재미가 있다.

『일리아스』를 읽는 덕후와 연구자의 시선이 분명 달랐을 것 같다.
하길 나는 취미로 『일리아스』를 읽은 비전공자니까 작품을 단편적으로 독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교수님은 전공자의 시각에서 다른 문헌과 비교하거나 서양 문화의 배경, 철학적인 분석을 담아 고전을 독해한다. 배경지식의 깊이가 다르다고 느꼈다.
안재원 오히려 덕후의 시선이 중요하다고 느꼈다. 연구자들과 달리 전통에 대한 편향 없이 읽은 것 아닌가. 학계 밖 사람들의 관심은 이 안에서 우리가 떠드는 것과 아주 달랐다. 고전학을 살리고자 한다면, 사람들이 무엇을 중요하게 보는지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 연구자들은 과거에 서양 고전학자들이 만든 주석 전통으로 고전학을 가르쳐 왔는데,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관심에 따라 고전을 읽는다. 우리가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바람에, 정작 사람들이 무엇에 관심을 기울이는지를 놓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고전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힘을 얻으려 하는 것 아닐까. 남태령과 한남동에서 밤을 새운 이들을 떠올려 보자. 누군가에겐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추운 겨울 길바닥에서 얼어 죽고 싶냐면서. 그런데 실은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트로이 편에서 헥토르를 수호한) 아폴론 신에게 맞선 것도 그와 비슷한 미친 짓이다. 그 미친 짓들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삶에 대한 사랑이다. 좋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던지는 모습이다.
『일리아스』는 영웅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작품 속 영웅들은 강력한 동시에 취약하고, 다분히 인간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매혹적이다. 12월 3일 밤과 그 이후에 민주주의를 지키고 있는 사람들과 닮았다는 생각도 든다.
하길 영웅이라고 하면 초인적인 인물이 세상을 구하는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에서 영웅의 의미는 달랐던 것 같다. 『일리아스』 도입부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수많은 영웅들의 혼을 하데스의 집으로 떠나보냈다’는 대목에서 보듯, 영웅은 전장에서 큰 공을 세우지 못한 평범한 병사까지 통칭하는 말이었다. 영웅이 특출난 몇 사람을 가리키지 않는 것은 광장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힘 있는 한 사람이 흐름을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수십만 명의 사람이 힘을 합쳐 말하고 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영웅으로서의 속성이 있지 않나 생각한다.
안재원 국회 앞에서 군용차를 막은 사람들도 영웅이지만, 당시 상관의 명령에 따르지 않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으면서 태업한 군인들 역시 영웅이다. 이들 안의 옳고 그름을 가르는 저울이 작동한 거다. 정의가 뭐냐고 물었을 때 정확하게 답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 ‘이건 아니다’라며 부당한 행위에 제동을 걸게 하는 것, 그리스어로는 ‘에피에이케이아(ἐπιείκεια, 근원적 공정성)’라고 한다. 양심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거창한 이념보다 이 마음이 중요하다. 그 마음이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용기 내 움직이게 한다. 영웅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분노에서 시작해 슬픔과 공감으로 마무리된다. 분노와 슬픔은 지금의 광장을 이끄는 동력이기도 하다. 분노와 슬픔에 담긴 힘은 무엇일까.
하길 분노는 수명이 짧다. 부조리한 사건을 겪으면 화나는 것이 당연하지만, 분노를 동력으로 활동하면 그 자신도 파괴될 수밖에 없다. 분노에서 시작하더라도, 오래 함께하려면 슬픔과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슬픔은 연대와 가장 가까운 감정일 것이다. 지금 광장에 있는 사람들도 슬프다, 속상하다는 말을 서로 나누곤 한다.
안재원 분노와 슬픔에는 차이가 있다. 분노는 정의와 연결된다. 우리는 내가 옳다고 생각할 때 화를 낸다. 반면 슬픔은 연대를 부르는 감정이다. 힘이 없으니까 우는 것이고, 눈물은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이해받고 돌봄 받고 싶다는 표시다. 아기가 우는 이유는 결국 자신을 봐달라는 것 아닌가. 그런 점에서 분노는 고립으로 이어지지만, 슬픔은 연대로 향한다. 호메로스가 『일리아스』의 마지막에서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를 마주 보게 하는 이유다. 분노가 정의라면, 슬픔은 사랑이다. 결국 사랑이 이긴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이미 윤석열 퇴진 너머의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다. 여러분이 바라는 윤석열 이후의 세계는 무엇인가.
하길 모든 소수자의 이야기가 존중받는 사회를 바란다. 사람들이 광장에 나와서 환호하고 즐거워하는 이유는 이곳이 ‘내가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솔직히 표현해도 비난이 아닌 존중을 받는 분위기를 모두 소중히 여기고 있다. 그런 광장과 닮은 세상이 됐으면 좋겠다. 모두가 안심하고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때 이들이 가진 소수자성이 온전히 인정받았으면 좋겠다.
안재원 다양성과 포용성. 각자 재밌는 얘기 많이 하면서 즐겁게 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