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 밤,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종북 반국가 세력 척결’과 ‘헌정 질서 수호’를 명분으로 내세운 44년 만의 계엄령이었다. 계엄은 비록 6시간 만에 해제됐지만 그 후로도 사회 전반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서울대학교 학생사회에서도 비상계엄에 대한 다양한 반응이 일었다. 학교 곳곳에 성명문과 대자보가 붙고, 2천명이 넘는 학생들이 모여 전체학생총회(총회)를 여는 등 총학생회(총학)가, 권리의제 단위가, 혹은 개별 학부생이 여러 활동을 진행했다. 계엄 이후, 학내에서 나타난 다양한 움직임을 살펴봤다.
총학생회: 12월 3일 밤부터 13일 전국 대학생 총궐기 대회까지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4시간이 지난 4일 새벽, 서울대 총학은 제2차 임시 총운영위원회(총운위)를 소집했다. 주요 안건은 ‘휴교령 요구’와 ‘총학생회 대응 방향성 논의’였다.
비상계엄에 대해 총학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는 데 모두가 만장일치로 동의한 상황에서, 크게 두 가지 대응 방안이 논의 안건으로 상정됐다. 첫 번째는 총학 명의의 성명문 발표다. 본 안건은 만장일치로 통과됐고, 4일 오후 총운영위원들의 명의로 ‘윤석열의 비상계엄 선포를 규탄한다’는 제목의 성명문이 발표됐다.
또 다른 안건은 총회 개회였다. 전체학생총회는 총학의 최고 의결기구로, 총학생회 활동의 중대한 사안을 토의·결정한다. 학부생이라면 입학과 동시에 총학생회 회원의 자격을 갖기에, 총회에서 의결된 사안은 서울대 학생사회 전반의 총의로 간주된다. 총회를 열기 위해서는 ▲학부생 500명의 연서명 모집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의결 ▲총학생회장 비상직권 사용 중 하나 이상의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총회 소집을 총운위원 모두가 만장일치로 찬성한 상황에서 어떤 조건을 충족시킬지에 대한 논의가 오갔다. 학부생 연서명을 받자는 입장과, 비상직권을 사용하자는 입장이 나뉘었다. 전자는 총회가 가지는 상징성을 부각하고 소집 명분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후자는 사안의 시의성과 절차의 간략함을 내걸었다. 결국 사안의 시급성이 우선시돼 비상직권을 사용해 개회하기로 결정됐다. 이후 진행된 표결로 다음날인 12월 5일 오후 5시 30분 총회 개회가 예정됐다.

12월 5일, 학생총회는 정족수 2,707명으로 전체 학부생의 약 17%가 참석해 ‘전체학생 중 1/10 이상’이라는 조건을 만족하며 무사히 개회했다. 총회에선 ‘윤석열 퇴진 요구’ 안건이 상정됐고, 표결 전 총학생회장이 선정한 3인의 찬반발언과. 단과대학별 대표 1인의 자유발언이 진행됐다. 발언자들은 비상계엄령이 반국가·반민주적이었음을 지적하며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거나 “진정한 반국가세력이 누구인가”라고 윤석열을 규탄했다. 직후 진행된 표결에서 ‘윤석열 퇴진 요구’ 안건은 투표에 참여한 2,556명 중 98.4%에 달하는 2,516명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그리하여 윤석열 퇴진 요구는 서울대 학부생들의 총의가 됐다. 총회가 끝난 그 순간부터 총학은 이에 준거해 비상계엄 대응 및 퇴진 요구 활동을 지속할 의무를 가진다.
총회가 끝난 후, 총학은 총의에 따라 윤석열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활동을 진행했다. 12월 7일엔 ‘우리는 결코 상아탑의 안온함에 자족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윤석열의 퇴진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2차 성명문을 발표했고, 같은 날 밤 9시 고려대·서강대·연세대 총학생회장들과 국민의힘 의원들의 탄핵소추안 표결 미참여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이어 13일에는 ‘비상계엄 대응을 위한 전국 대학 총학생회 공동행동(공동포럼)’이 주최한 ‘전국 대학생 총궐기 대회(총궐기)’에 참여했다.

총학생회: 수면 위로 올라온 논란과 지워져 간 총의
그러나 비상계엄 선포 이후 소집된 임시 총운위부터 총회와 총궐기, 그리고 그 이후 행적까지, 총학의 대응과 관련해 많은 잡음이 흘러나왔다.
우선 12.3 내란 이후 소집된 임시 총운위의 휴교령 요구 안건에 대해, 일부 참관인은 ‘비민주적인 계엄령에 앞장서 순응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휴교령 요구 안건은 당시 계엄 해제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생들이 등교할 경우 안전이 우려된다는 명분으로 발의됐다. 그러나 본래 휴교령은 민주화 운동 시기 독재정권에서 학생사회의 결집을 저지하기 위해 내린 강제 조치였다. 즉, 총학이 앞장서 본부에 휴교령을 요구하는 것은 집회의 자유와 저항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란 뜻이다. 결국 해당 안건은 논의 과정에서 ‘대학 본부에 학우들의 안전과 교육권 보장을 요구’하는 것으로 수정됐다.
다음날 이어진 총회는 비상계엄 선포 후 36시간 만에 소집됐다. 중대하고 시급한 사안이라는 점에서 빠르게 소집된 점에는 의의가 있지만, 준비 시간이 짧았던 만큼 많은 문제점을 동반했다. 우선, 전반적인 진행이 원활치 못했다. 신원 확인 절차부터 표결 과정까지 많은 시간이 소요됐고, 그 과정에서 많은 학우들이 야외 공간에 선 채로 대기해야 했다. 당초 개회 시간 18시 30분, 예상 폐회 시간 19시 30분을 공지했으나, 실제로는 20시 40분에 개회해 22시 36분에 폐회했다.
늘어진 총회 진행엔 공지에 없던 자유발언이 현장에서 추가된 점도 한몫했다. 총회 소집이 결정된 이후 식순과 안건을 논한 제3차 임시 총운위에서 김민규 총학생회장(조선해양공학 21)은 “학생총회 유경험자 분들께 조언을 구했다”며 ▲명확한 의안 요구 필요 ▲대표자 한정 발언 ▲발언 관리 및 질서 유지를 포함한 8가지 내용을 공유했다. 발언을 대표자로 한정해야 한다는 조언에 대해 “총회의 의의는 학부생들의 발언을 많이 듣는 데 있는데, 발언을 제한하면 총회의 의의가 줄어들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기됐다. 이에 대해 김 총학생회장은 “효율적인 진행을 위해 (발언자를 대표자로 한정하는 게) 불가피하다”고 답했다. 이후 자유발언에 대한 여러 의견이 나왔으나 최종적으로는 구글 폼을 이용해 학부생들의 의견을 따로 수합하기로 결정됐고, 총회 시작 직전까지도 자유발언은 식순에 없었다.

그러나 학생들의 입장이 모두 끝난 후, 갑작스럽게 현장에서 소집된 총운위를 통해 자유발언이 추가됐다. 이때 발언자 선정은 각 단과대 학생회장이 해당 단과대학에서 자유발언을 지원한 이들 중 한 명을 고르는 식으로 이뤄졌다. 사전 조율 없이 추가된 자유발언으로 발언자 선정이 매끄럽게 진행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학부생들의 다양한 의견을 듣겠다는 당초 목적도 달성되지 못했다. 충분한 준비 시간 없이 나온 학부생들의 자유발언이 상당 부분 유사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발언은 비상계엄에 대한 규탄에서 시작해 윤석열에 대한 퇴진 요구로 끝을 맺었다. 한 학부생은 이에 “비슷한 발언이 반복된다고 느꼈다”며, 단순히 퇴진해야 한다는 주장을 넘어 “어떻게 윤석열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도 성찰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총궐기와 관련해서는 총학이 내건 참여 조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됐다. 총궐기 참여 여부는 지난 12월 7일 진행된 제5차 임시 총운위에 안건으로 올라왔다. 윤석열 탄핵 소추안이 부결됨에 따라, 당시 총운위원들은 “학생총회를 통해 의결된 사항이 관철되지 않았다”는 점에 동의했다. 이에 “학생총회에서 의결된 것은 반드시 따라야 할 사안”이기에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였고, 같은 맥락에서 총궐기 참여에 대한 논의가 이뤄졌다. 약 1시간의 논의를 거쳐 ‘총운위에서 결정한 참여 기준에 따라 총학생회장에게 참여 여부 결정을 위임한다’는 안건이 표결에 부쳐졌고, 16단위 중 15단위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총운위에서 의결된 참여 기준은 ▲학우들의 안전 ▲외부 세력 미개입 ▲학우들 참여 가능 ▲무력 충돌 방지 ▲총의를 넘어서지 않는 수준에서만 발언·행동의 5가지였다.
이 중 두 번째 조건에 대해 외부 세력이 무엇인지 의문이 제기됐다. 김민규 총학생회장을 비롯한 몇몇 총운위원은 외부 세력 미개입을 주장하며 “외부 세력이 학우들의 안전에 문제가 되지 않을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정확히 어떤 식으로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지, 외부 세력의 범위를 어떻게 규정할지는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또 총궐기 준비 과정에서 김민규 총학생회장이 사적인 감정을 이유로 총궐기에 불참하려 한 사실이 드러났다. 총궐기 이후 소집된 제7차 총운위에서 총궐기 스태프로 참여한 농업생명과학대학 김누리 학생회장(식품생명공학 20)은 “총궐기에 서울대가 불참 의사를 밝혔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며 사실확인 요청 안건을 올렸다. 김 학생회장은 “총운위에서 이야기 나왔던 내용 이외의 불참사유를 서울대가 밝혔다고 총궐기 주최 측에서 전달받았다”며 면담록을 공유했다. 김 총학생회장은 “총운위에서 결정된 기준 외의 불참사유를 밝힌 적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지만, 이는 추후 공개된 면담록의 내용과 관계자의 증언을 통해 거짓임이 밝혀졌다. 김 총학생회장은 결국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발언들을 한 점 사과드린다’는 내용의 사과문을 게재하며 총궐기 참여 과정에서 사적인 감정을 내세웠다고 인정했다.
총궐기 이후로는 총학에서 퇴진 요구를 적극적으로 피력하기 위해 다른 활동을 수행한 부분은 찾아보기 어렵다. 12.3 내란 이후 잠시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던 총학은 불과 2주 만에 총의를 지우고 탈정치화를 표방하던 기존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다.
공동행동: 모여든 목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이처럼 총의 실현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는 총학을 대신해 행동을 나서려던 학부생들도 있었지만, 이마저도 총학 측의 무심한 반응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지난 1월 5일 진행된 제10차 총운위에서는 총학생회 산하 ‘윤석열 퇴진 투쟁 특별위원회 (투쟁특위)’ 설치 안건이 학부생 61명의 공동발의로 상정됐다. 공동발의자 측은 총의 실현을 위해 연속성과 책임성 있는 활동을 전개하고, 학생회원에게 토론과 실천의 기회를 담보하고자 투쟁특위를 기획했다고 밝혔다. ‘총의 실현을 위해 힘쓰고, 학생회원 모두가 함께 행동할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 총학의 마땅한 책임이라는 것이다. 투쟁특위는 제10차 총운위에서 구체적인 활동안을 다듬는 것을 조건으로 설치가 가결됐다. 그러나 구체적인 설치안이 발의된 제11차 총운위에서 ▲위원 모집 절차 ▲공동위원장의 권한 ▲특위 활동의 범주에 대한 우려를 근거로 부결됐다.

투쟁특위 공동발의자 측은 안건이 가결될 수 있도록 여러 노력을 했다고 밝혔다. 대표 발의자 조성윤(사회복지 21) 씨는 “총운위원 18명에게 직접 연락해 우려되는 점을 물었고, 두 군데서 답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해당 우려점을 해소할 수 있는 조항을 추가해 제13차 총운위에서 재발의했으나, 총운위원들이 이전과 유사한 우려를 제기하며 재부결됐다.
투쟁특위 설치는 무산됐지만, 이를 위해 모인 목소리는 서울대 학생사회에서 새로운 형태로 피어났다. 지난 1월 31일 출범한 ‘윤석열 퇴진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서울대 공동행동(서민공)’은 투쟁특위를 전신으로 하는 조직이다. 현 서민공 대표인 조성윤 씨는 “투쟁특위를 위해 모인 위원들이 총학에게 총의 실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공통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며, “함께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한 결과 서민공을 결성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서민공의 주된 목표는 “퇴진 이후의 세상 상상하기”와 “그것을 계속할 수 있는 자리 마련하기”다. 조성윤 씨는 “윤석열이 탄핵됐다고 모든 게 끝나는 게 아니라, 그 이후의 세상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구성원들의 합의였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서민공은 지난 2월 21일 ‘윤석열 탄핵과 그 이후를 이야기하는 서울대학교 집담회’를 관악청년청에서 열었다. 본 집담회는 서울대 구성원들이 윤석열 탄핵을 둘러싼 일련의 과정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윤석열 이후의 세상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이야기하고자 마련됐다. 16명의 참가자는 계엄 당시와 그 이후의 일상과 감정을 비롯해 노동·성평등·사회적 참사 등 여러 의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총회와 관련해 “많은 학부생이 모인 것이 뿌듯하면서도 총회에서마저 비정치성을 표방하려는 목소리가 많아 아쉬웠다”는 평가나, 총학에 대해 “탈정치적인 학생회이기에 별다른 이견이 없는 사안에 대해서 총회를 열 수 있었던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는 등 학내 대응에 관해서도 활발한 대화가 오갔다.

물론 학부생 개개인이 모여 창설한 조직이기에 서민공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존재한다. 조성윤 씨는 “가용할 수 있는 자원과 인력이 많이 부족한 상황”이라 설명했다. “현재 후원으로만 운영이 이뤄지고 있다”고 밝힌 조 씨는 “초기에는 깃발을 제작할 때도 사비를 지출하고 추후 환급하는 식으로 진행했다”고 회상했다. 또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여러 사람이 모였기에, 다양한 의견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조직하거나 원활히 소통하는데 아쉬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 씨는 계엄 이전에 권리의제 단위 등에서 활동해본 적 없는 사람들까지 “지금 나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절박함”을 공유하며 함께하고 있는 만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추후 행동 방향을 고민하고 있다”며 결의를 다졌다.
학부생·권리의제 단위: 이전부터 이어지던 목소리는 계속된다
대외적으로는 총학 차원의 대응이 주목받았지만, 총학 밖에서도 적극적으로 행동에 나선 이들이 있었다. 학내 권리의제 단위와 개별 학부생들이 그 주인공이다. 12.3 내란 이전부터 사회를 향해 다양한 목소리를 내던 이들은, 비상계엄 사태에 관해서도 어김없이 여러 활동을 전개했다.
비상계엄 이후 서울대의 각종 게시판과 중앙도서관 터널에는 비상계엄을 규탄하고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수많은 대자보가 붙었다. 이 대자보들은 개개인의 이름으로, 권리의제 단체의 이름으로, 혹은 여러 학부생이 한데 모인 집단의 이름으로 게시됐다. 여기에 더해 12월 7일부터 21일까지 중도터널에서는 ‘비상계엄 시국 관련 윤석열 퇴진/탄핵 자보전’이 진행되기도 했다.

12월 18일에는 총학생회 산하 기구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의 주최로 오픈마이크 ‘우리에겐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합니다’가 열리기도 했다. 오픈마이크는 총회의 획일화된 자유발언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총회에서 미처 말하지 못한 이야기를 자유롭게 말하고자 마련됐다. 이날 행사에선 탄핵 정국에서 논의에 오르지 못한 소수자들의 이야기, 탄핵 이후의 삶에 대한 고민 등 다양한 발언이 오갔다.
또 학내 곳곳에서 학부생들의 주도로 집담회가 열렸다. 지난 1월 25일 우석경제관에서 열린 사회과학대학 학부생 자율 집담회 ‘끝나지 않은 12월: 한국, ()로 읽다’가 그 예다. 주최 측은 ‘계엄 사태 이후 오늘날 청년 세대가 느끼는 감각과 정동의 체험을 조명’하겠다는 집담회의 목적을 밝혔다. 집담회에서는 학부생의 시선으로 바라본 ‘광장 안팎의 페미니즘 정치’나 ‘계엄 이후 보수의 가치와 한국 보수진영’ 등 다양한 주제들이 나왔다. 집담회 참가자들은 12.3 내란을 하나의 잣대에 기대지 않고 다양한 각도로 바라보고자 노력했다. 페미니즘은, 보수는, 그 밖의 각종 소수자 의제는 거리낌 없이 참여자들의 시야각 안에 포착될 수 있었다. 이처럼 탈정치화를 표방하는 대학사회에서도, ‘정치적’이란 말이 낙인처럼 달라붙는 현실에서도 누군가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사회와 연결되길 택한다.
비상계엄 선포 이후 서울대를 포함한 대학사회는 분노에 휩싸여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섰다. 각 대학에서는 총회가 열렸고, 대학가 집회나 시위 역시 성행했다. 다시금 사회와 연결된 대학사회는 12.3 내란 이전보다 ‘정치적’인 행보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전부터 탈정치화를 향해 달려가는 학생사회를 비판하며 계속해서 사회와 연결돼야 한다고 말했던 학생들의 목소리도 더욱 커질 수 있었다. 지난 12월 13일 〈경인일보〉에서 진행한 ‘긴급 대학생 시국 토론회’에 참여한 한 대학생은 ‘비상계엄 사태를 계기로 스스로 탈정치라는 족쇄를 풀고 나와야 할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총학의 불씨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사그라들며, 학생사회의 목소리가 사회로 나가는 길이 다시금 좁아지고 있는 듯하다. 서민공의 조성윤 대표는 “총학생회가 나서서 자리를 만들거나 주도적으로 행동하면 더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총학생회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학생사회가 다시 사회와 연결될 때 학생들의 목소리에 크게힘을 실어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총학일 것이다. 지금도 학내에서 이어지고 있는 학부생들의 목소리와 대응을 모으고, 이를 사회에 내보이는 데는 총학의 적극적인 행보가 필요하다. 이미 목소리를 내고 있던 학내 권리의제 단위들도 총학과 뜻을 함께하게 될 경우 더 큰 동력을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12.3 내란 사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학생사회가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총학에서 정치적인 움직임을 이어나갈 수밖에 없다. 학생사회가 사회와 적극적으로 연결되는 지금, 더 크게 우리의 목소리를 피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