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일찍 피고 진 민주화의 꽃, 故 김상진 열사

옛 농과대학 자리에서 의거 50주기 추모제 열려
▲농업생명과학대학 6동 건물에 걸린 추모 현수막

  4월 11일 오후 2시, 김상진 열사 의거 50주기 추모제 ‘오랫동안, 김상진’이 열렸다. 옛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수원캠퍼스 내 김상진 민주광장에서 열린 추모제는 김상진 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와 서울대 민주동문회가 공동 주관했다.

▲농업생명과학대학 6동 건물에 걸린 추모 현수막

  故 김상진 열사(축산학 68)는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나 1968년 농과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했다. 그는 1975년 4월 11일 농과대학 잔디밭에서 열린 성토대회에 세 번째 발언자로 나섰다. 연단에 오른 故 김상진 열사는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내용의 ‘양심선언문’을 낭독한 뒤 할복했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튿날 숨을 거뒀다. 이 사건은 그의 추도식을 거행한 다수의 학생이 구속되는 ‘오둘둘 사건’으로 이어졌고, 이후 유신헌법 철폐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민주화 운동의 계기가 됐다.

  추모제는 추모문집 『오랫동안, 김상진』 헌정으로 시작됐다. 기념사업회가 50주기를 맞아 발간한 추모문집은 그의 생애와 관련 자료, 의거를 기리는 다양한 목소리를 담았다. 김상진열사의거 50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안병권 위원장(농생물 79)은 “故 김상진 열사의 뜻과 지향이 후세들에게 이어지길 바란다”는 헌정사를 전했다.

  故 김상진 열사의 의거를 기리는 추모의 목소리도 오갔다. 더불어민주당 염태영 국회의원(농화학 80)은 “자결한 청춘 하나가 수많은 국민의 양심을 일깨웠고, 수많은 사람을 거리로, 광장을 이끌었다”고 회고하며, “그 고결한 희생을 기억하며 부끄럽지 않은 내일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밝혔다. 몽양여운형기념관 유영표 관장(고고인류학 68) 또한 “열사께서 우리를 지켜보면서 뜨거운 갈채를 보내주셨기에 지난 4월 4일 윤석열 파면의 역사가 나올 수 있었다”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양심선언문을 낭독하는 후배들

  이어 여러 명의 후배가 故 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문을 나눠 낭독했다. 이들은 “아는가! 민주주의는 지식의 산물이 아니라 투쟁의 결과라는 것”이라며 “치밀한 이성과 굳은 신념으로 이 처참한 일당독재의 아성을 향해 불퇴진의 결의로 진격하자”는 故 김상진 열사의 외침을 재현했다.

▲특별 강연에 나선 함세웅 신부

  특별 강연에선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인 함세웅 신부가 연단에 섰다. 故 김상진 열사 의거 당시 명동성당에서 추모 미사를 집전했던 함 신부는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는 그 자체가 아름답고 장엄한 기도”라며 추모제의 의미를 강조했다. 덧붙여 “故 김상진 열사의 양심선언문을 우리 시대의 길잡이로 삼아 아름다운 민주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뜻을 전했다.

  이날 추모제는 ▲가수 강은영 ▲가수 윤선애 ▲이소선합창단 ▲합창단 그날 ▲농업생명과학대학 풍물패 ‘두레’ 등이 준비한 공연을 끝으로 마무리됐다.

  추모제를 준비한 기념사업회 정근우 회장(농화학 84)은 “최근 계엄 사태를 경험하며 민주주의가 언제든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며, “모든 시민이 26세의 나이로 역사의 제단에 목숨을 바친 故 김상진 열사의 뜻을 가슴에 품고, 민주주의를 지켜나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상진 민주광장 뒤편에 마련된 사진전

  한편, 이날 김상진 민주광장 뒤편에는 故 김상진 열사를 기억할 수 있는 사진전이 열려 많은 이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진전에는 故 김상진 열사의 생전 모습부터 장례식 장면, 그를 기리기 위한 기념사업회의 활동 등을 담은 수 점의 사진이 전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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