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정원(미술대학 서양화과 서양화전공 석사과정)
작가이자 활동가. 서울을 중심으로 사회 투쟁 현장에서 연대 활동을 하며, 구조적인 폭력과 그에 대한 저항의 장면을 기록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혜복 선생님은 지난 2023년, A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일어난 성폭력 사안을 알게 돼 학생들과 함께 싸웠다. A학교는 성폭력 사건을 은폐하려 했고, 서울시교육청은 지혜복 선생님을 다른 학교로 부당하게 전보했다. 도저히 이 상황을 묵과할 수 없어 출근을 거부하고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시위를 하자 해임과 함께 직무 유기로 고소를 당했다. ‘A학교 성폭력사안·교과운영부조리 공익제보교사 부당전보철회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는 지혜복 선생님에 대한 고소 취하와 복직, A학교 성폭력 사안 해결을 위해 1년이 넘게 투쟁을 이어오고 있다.
2월 28일 아침,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텐트를 치고 피켓팅을 하던 지혜복 선생님을 포함한 총 23명의 연대인들이 경찰의 폭력 진압과 함께 연행돼 여러 경찰서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 길로 종로경찰서 앞에서 열린 석방 촉구 기자회견에 갔다가, 저녁에 서울시교육청 앞 농성장을 방문했다. 농성장에서 열린 오픈마이크 행사에서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이 사회가 미처 돌보지 못한 여러 시공간에서 성폭력과 부당 조치를 겪었던 학생, 교사, 노동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발언하고 위로와 연대를 나누는 시간이 이어졌다. 시민 사회의 뜨거운 관심과 연대 속에서 23명의 연대인들은 무사히 석방되었지만,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 글은 28일 저녁 서울시교육청 앞 농성장에서 연대인들에게 공유했던 오픈마이크에서의 발언을 다듬은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가장 많이 소개하지만, 그 밖에도 많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어떤 건 선명하고 어떤 건 투명한 여러 단어 중 나에게는 낙인처럼 벗어날 수 없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건 바로 성폭력 피해 생존자라는 정체성이다.
나는 청소년 시기에 학교 안팎에서 여러 성희롱과 성폭력을 경험했다. 외모 평가와 가슴 크기 순서 매기기, 단체 카톡방 성희롱과 같은 일을 겪었다. 그리고 대학생 때는 20대 초반에 만났던 애인에게 불법 촬영을 비롯한 성폭력을 장기간 겪었다. 청소년 시절 내가 다녔던 학교에는 지혜복 선생님과 같은 분이 계시지 않았다. 그때의 성인지 감수성은 지금보다도 훨씬 뒤떨어지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청소년 때는 아주 무기력하게, 폭력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 성폭력을 겪었을 때는 대학 내 인권센터라는 기구를 찾았다. 부모가 굉장히 보수적인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경찰에 신고할 용기도 없었다. 가해자가 같은 학교의 구성원이었기 때문에, 그때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학내 인권센터뿐이었다.
보통 많은 학교들의 인권센터는 외부 변호사 등으로 조사위원을 꾸려서 사안에 대해 조사를 하고, 그에 대해서 징계, 퇴학, 제적과 같은 조처를 내릴 수 있는 권한이 있다. 몇 달에 걸친 조사 기간 동안 내가 겪었던 사건에 대해 최선을 다해 진술했다. 그런데 결국 내가 받았던 심의 의결서에는 내가 겪은 일이 성폭력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의결서에는 성폭력이 아니라, ‘연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다소간 불편한 일’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가해자는 분리 조치 이외에 어떠한 징계도 받지 않았다. 코로나가 한창 유행이었기에 학교 출입구는 한 곳을 제외하고는 다 봉쇄돼 있었고, 분리 조치를 취해도 같은 공간으로 가해자와 학교를 드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남은 대학 생활을 휴학과 복학을 번갈아 가면서 다니다, 학부 시절을 보낸 대학을 도망치듯이 떠나 다른 학교 대학원으로 진학하게 됐다.
20대 후반인 지금에 이르기까지 나의 피해 경험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반복적으로 발화를 하는 이유는 내가 겪은 일이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가해를 당하면서도 가해인지 인지하지 못하며 수년을 보냈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너무나 흔할 거라고 확신했다. 실제로 이러한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데, 대학 사회에서, 그리고 청소년들이 있는 학내 사회에서, 학생들을 그리고 성폭력 피해자들을 지켜줄 수 있는 제도는 얼마나 마련돼 있을까. 내가 경험했던 세계에서는, 내가 다녔던 학교에서는, 조사와 조치를 부탁했던 인권센터에서는, 그런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거나 마련돼 있어도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나는 성폭력을 겪고 나서 앞으로 어떻게, 어떤 힘으로 나의 등을 스스로 밀면서 살아가야 하나에 대해서 고민을 많이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소년심판》이라는 드라마의 마지막 화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가해자들의 재판을 지켜보는 장면이 나온다. 판결을 앞두고 판사가 피해자에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고 물어봤을 때, 피해자는 ‘제 인생을 예전처럼 되돌려주세요’라고 말한다. 그 말을 여러 번 곱씹었다. 성폭력 피해자에게 있어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방법은 무엇일까. 하지만 원래의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일어난 폭력이 없어질 수는 없다. 이미 발생한 폭력을 우리가 없던 일로 할 순 없다. 시간은 그저 앞으로 흐르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앞으로의 미래를 성폭력이 일어나기 전처럼, 온전한 과거와 가장 비슷하게 설정하고, 미래를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이 약속이라고 생각한다. 그 약속은 성폭력 피해자가 목소리를 냈을 때, 성폭력 피해자를 지켜줄 수 있는 제도와, 선생님과, 학내 기구들과, 연대인들이 안전하게, 2차 가해 걱정 없이, 부당한 억압에 대한 두려움 없이 투쟁할 수 있는 그런 사회, 그런 시공간을 만들겠다는 약속일 것이다. 그 약속이 있어야 이 땅에 있는 모든 성폭력 피해 생존자가 살아갈 수 있다. 낙인 같은 과거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에 의지해서 앞으로 희망을 가지고, 그 약속을 한 손에 꼭 쥔 채로 그렇게 미래를 살아갈 수 있다. 나에게 있어서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은 그런 의미였다. 다시는 폭력이 일어나지 않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하물며 폭력이 일어나더라도 정면으로 대항하고 피해자와 함께 적극적으로 싸우겠다는 약속을 할 수 있는, 그런 책임 있는 학교를 만들겠다는 투쟁으로 나는 읽었다. 그렇기에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은 나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미래가 되었다.
나에게 성폭력을 저질렀던 가해자는 내가 투쟁 현장에서 활동하는 걸 아주 싫어했다. 그래서 내가 연대하던 현장을 혐오하는 말을 나에게 늘어놓곤 했다. 하지만 나는 여러 현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부당한 일에 맞서 싸우는 것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으며 살아있었다. 나 혼자만의 것이 돼버린 상처와 폭력으로 얼룩진 과거는 현장에서의 연대를 만나 모두의 이야기가 되었고, 그건 거창한 말로 하면 구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역시나 이번에 종로경찰서 앞에서도, 서울시교육청 앞에서도, 성폭력이 없는 세상, 부당해고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나는 그런 감각을 또다시 경험했다. 우리에게 망쳐버린 과거가 있고, 가해로 얼룩진 과거가 있더라도, 앞으로를 바꾸고자 하는 힘을 가지고 나아간다면 결국 이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니구나, 살 만하구나, 다 같이 살아가는구나. 그리고 나는 이 감각을 많은 사람들이 경험했을 거라 믿는다.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은 앞으로도 그렇게 이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폭력의 기억으로부터 구원하며. 지혜복 선생님의 투쟁이 승리하기를, 그래서 머지않아 비슷한 폭력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위로받을 수 있는 결말과 매듭이 지어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지혜복을 학교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