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면

  이 글을 읽고 계실 당신께 묻습니다. 사랑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참고삼아 말씀드리자면, 저는 없습니다. 아니, 정확히는 없었습니다. 막 연애를 시작한 친구 하나가 말했던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마음”도, 자칭 연애 고수라는 누군가가 떠들던 “상대에게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지 못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설렘이란 감정은 세상에서 저와 가장 멀어 보이는 감정이었고, 타인에 의해, 혹은 타인을 위해 감정의 폭이 오르내린 경험도 그다지 없었습니다. 불과 1년 6개월 전까지만 해도, 그랬습니다.

  이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많은 것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잘 알지 못했던 작가의 신작 소식에 한껏 설레고, 삶을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과 함께 분노하고 슬퍼할 수 있게 됐습니다. 저의 삶을 지키는 것을 넘어, 다른 사람의 삶을 지키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이 많은 것을 사랑하게 한, 〈서울대저널〉이란 공동체를 사랑합니다.  ‘소재’라는 이름으로 올라오는 세상의 조각들이, 그것들을 멋진 언어로 풀어내는 기자와 PD들이, 그걸 통해 제 세상이 넓어지는 순간이 좋아 어쩔 줄 모르겠습니다. 그들 앞에서 당당하고 잘나 보이고 싶은 마음에 괜한 허세를 부려 무리하다 본전조차 못 건진 적도 많습니다. 인생에서 대부분의 재앙은 이렇게까지 사랑할 생각이 없던 것을 이렇게까지 사랑해 버림으로써 벌어진다는데, 그렇다면 저는 이미 망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다행인 건, 망한 사람이 저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서울대저널〉의 구성원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대학언론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망했습니다. 적어도 190호 커버스토리를 준비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그렇다고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자신이 몸담은 대학언론을 몹시도 사랑해서, 기꺼이 몸과 마음을 다해 닥쳐오는 위기를 제 것인 양 맞서나가던 사람들. 때로는 자신의 삶조차 잠시 뒤로하고 대학언론을 위해 살아가는 그들을 보면서, 존경하는 한편 안심했습니다. 나만큼, 아니 나보다도 무거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존재가 확신을 줬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랑을 받는 한 대학언론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대학언론 위기론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쓰면서 솔직히 많이 괴로웠습니다. 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읽은, 이제는 사라진 대학언론의 마지막 글들이 눈에 밟혔습니다. 무한히 순환하는 위기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인터뷰를 다니면서, 커버팀 그리고 저널러들과 이야기하면서, 끝내 희망으로 글을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위기를 자각하고, 늘 새로워지기 위해 노력하며, 끝내는 세상에 소리치는 이들이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약자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언론인은 영원히 약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기꺼이 약자가 되겠습니다. 약자이길 자처한 사람들과 같이 목소리 내겠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한 우리의 목소리는 독자들에게로 향합니다. 그 결과로, 지금 이 지면을 읽는 당신이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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