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서울대저널〉에 들어와 쓴 기사 두 편이 이번 호에 담겨 세상에 나온다. 한 편은 아주 오래전부터 언젠가는 써야 한다고 생각했던 여성 우울에 대한 기사이고, 다른 한 편은 저널에 들어온 이후에야 서서히 시선을 두기 시작한 대학언론에 대한 기사다. 처음에는 두 기사를 대하는 느낌이 아주 달랐다. 내가 완전히 다른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두 기사를 쓰는 동안 나는 결국 같은 체험을 한 것 같다. 그것은 아주 작고 구체적인 경험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미리 느껴보는 일이었다. 여성 우울도, 대학언론의 문제도 앞으로 가야 할 길을 생각하면 막막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쌓여온 글을 읽고 취재원을 만나는 동안에는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미약하지만 뚜렷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내가 마주하고 싶은 미래가 딱 저런 느낌이라는 것을 불쑥불쑥 깨달을 수 있었다.
대학언론 네 팀을 하루에 걸쳐 만나고 기숙사에 돌아오던 길, 책가방에는 대학언론인들이 건넨 각자의 교지와 신문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대학언론인들이 자랑스러운 얼굴, 명랑한 얼굴, 수줍은 얼굴, 단호한 얼굴, 저마다의 얼굴로 건네온 것들이었다. 그날 나는 체력적으로 상당히 지쳐있었음에도 그것들을 업고 기숙사까지 걸어갔다. 그때는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은 당시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얼추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그날 마주친 미래에 대한 어떤 느낌이, 생생하고도 아름다운 그 느낌이 나에게서 달아날까 부스러져 날아갈까 두려웠던 것 같다. 그래서 책가방의 무게를 오랫동안 몸으로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기자수첩을 쓰기로 마음먹은 건 내가 체험한 미래의 가능성을 기사만으로는 충실히 전하지 못한 것만 같은 부채감 때문이다. 기숙사까지 걸어가면서 두 어깨로 느꼈던 책가방의 무게, 인터뷰를 진행하며 내뱉었던 외마디 탄식, 다급한 마음으로 책에 그었던 진한 밑줄. 그 순간에 언뜻 엿보이던 어떤 조짐들을 충분히 펴내 보여주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나의 게으름과 부족함을 기자수첩으로 메우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지지만, 그럼에도 내가 만나고 본 것이 내가 쓴 것에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훨씬 놀라운 가능성을 품고 있었다고 적어둬야 할 것 같다.
〈서울대저널〉에 들어온 뒤로 쿵쾅거리는 가슴을 달래지 못하고 한참을 걷는 날이 많아졌다. “나 저널 들어오기 정말 잘했어”라고 말하는 날도 많아졌다.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서울대저널〉을 통해 만난 얼굴들 덕택이다. 나쁜 세상에 적극적으로 들어갈수록 이전엔 결코 예상하지 못했던 희망을 자꾸만 목격하게 된다. 지금은 물론 아니지만, 언젠가는 이런 미래에 다다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니까 내가 갖고 있는 건 딱 책가방 무게만큼의 미래다. 그래서 이 미래는 작고 위태롭지만 선명하고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사람들이 선뜻 보여준 미래를 제대로 이해하고 적어내는 것이 앞으로의 나에게 주어진 과제가 될 것이다. 내 글이 그것을 잘 담아낼 수 있도록 정말로 최선을 다하고 싶다. 그래서 언젠가는 내 글도 누군가의 책가방에 담겨 딱 그 무게만큼의 미래처럼 느껴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