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대저널〉 22기 원종진 (39대 편집장)
2015년부터 〈SBS〉 보도국 기자로 일하고 있다.
한심한 일들로 점철됐던 20대 시절. ‘그나마 그때 네가 잘한 일이 뭐야?’라고 스스로 물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언제나 〈서울대저널〉입니다. 학생회관 6층 편집실에서 밤을 새워가며 기사를 쓰고, 자취방이 있던 녹두거리를 걸어가며 다음 호 기삿거리를 고민하던 그 시절에 비하면 ‘기자’라는 명함을 파먹고 살고 있는 저는 종종 꽤나 보잘것없어 보이곤 합니다.
그 때문에 30살 생일을 맞는 〈서울대저널〉에 기고를 해달란 제안을 받았을 때 솔직히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널이 망하지 않는 게 과연 가능할까?’를 고민하던 부족한 편집장으로서 마침내 만들어진 〈서울대저널〉 30주년 기념호는 특별한 감동으로 다가오는데, 거기에 제 얼굴을 들이밀 깜냥이 되는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용기를 내 이 글을 쓰기로 합니다. 20대의 한때,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서울대저널〉의 지면에 언제 또다시 글을 쓸 기회가 오겠는가 하는 생각이 한 이유고, 지금도 저널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분들에 대한 작은 존경의 마음을 이렇게라도 표현하고 싶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입니다.
저널이 가르쳐 준 것들
저는 〈서울대저널〉에 늦깎이로 들어갔습니다. 3학년이 돼서야 뭐라도 의미 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에 저널의 문을 두드렸습니다. 돌이켜보면 그때 저에겐 전공수업 등에서 귓등으로 들은 ‘진보’라는 단어가 그저 막연하게 멋있다고 느껴졌던 것 같고, ‘진보를 일구는 참 목소리’라는 저널의 모토에 마찬가지로 막연하게 끌렸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저널에서의 시간은 그 막연한 동경이 깨져 나가는 과정이었습니다.
〈서울대저널〉 정기자가 돼서 첫 기사를 발제하면서부터 저의 막연한 정신세계는 산산조각 나고 말았습니다. 매달 첫 주 화요일 발제 회의를 위해 작성한 기획서에서는 어딘가 이미 나온 이야기 말고, ‘저만의’ 시각이나 생각이 담긴 요소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수업을 들으며 써냈던 글들은 주제와 범위가 어느 정도 주어져 있었지만, 학생자치언론의 기사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스스로 자유롭게 주제를 선정해 ‘읽을 만한’ 기사를 써내기에 제 사고력과 문장력은 한없이 허약했습니다. 기사 탈고는 마감 기한을 넘기기 일쑤였고, 써 갈긴 기사는 정기자가 된 지 몇 달이 지나도록 철근 없는 ‘순살 아파트’처럼 흐물거렸습니다. 제 글을 기다리고, 고치고 또 고치느라 수명이 몇 년은 줄어들었을 당시의 편집장들께 다시금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죄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음에 뭘 어떻게 쓰지’ 하는 중압감은 과외 아르바이트 가던 더운 여름날의 버스 안에서도, 녹두거리 막걸리 집을 나서던 어느 겨울날 골목길에서도 사채업자처럼 저를 따라다녔습니다. 마감이 가까워지면 ‘돈 받는 것도 아니고, 딱히 유행하는 스펙이라고 할 것도 아닌데 내가 굳이 이걸 왜 하고 있지?’하는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나왔고, ‘잠수 타버릴까…’하는 유혹도 시시각각 피어올랐습니다.
하지만 그때 저널을 뛰쳐나가지 않았던 것이 제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르침을 줬습니다. 납기일에 맞춰 꾸역꾸역 글을 납품해 가며 스스로 생각하고 글 쓰는 방법을 조금씩 배워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의 해상도가 점점 더 선명해지는 경험도 할 수 있었습니다. 학교 언덕을 오르내리던 시내버스에 탑승 보조시설이 설치돼 있지 않아 매번 택시를 불러야 했던 장애 학우, 부당한 계약 조건에 고충을 참으며 강의실 층계참을 닦아야 했던 미화 노동자들. ‘마감’이라는 저널의 무게가 없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주변의 현실이었습니다.
똑똑하고 열정 있는 저널의 구성원들과 때로는 편집실에서, 때로는 녹두와 서울대입구역의 어느 술집에서 밤늦게까지 토론한 시간도 무척이나 소중했습니다. 물론 수업이나 조 모임에서도 토론할 기회는 많았지만, 저널에서의 토론은 특별했던 것 같습니다. 〈서울대저널〉의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했던 토론은 책 한 권을 ‘만들어내기 위한’ 토론이었기에, 뜬구름을 잡거나 사변적인 수준에만 머무를 수 없었습니다. 크게는 그 호의 구성을 짜는 것에서부터, 작게는 기사의 세부 사항을 잡아내고 인쇄 업체와의 계약 조건을 변경하는 일까지. 〈서울대저널〉이 가르쳐준 것들은 현업 기자가 된 지금도 직업인으로서의 저를 지탱해 주는 힘이 돼주고 있습니다.
지금도 남아있는 저널의 흔적들
한참 동안 지루한 추억팔이를 하고 나니 현업 기자로 살고 있는 30대 중반의 저는 그때보다도 훨씬 작아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론 산업’이라는 거대한 가두리 안에서, ‘기자’라는 직함을 단 나는 얼마나 자유롭게 사고하고 또 치열하게 토론하고 있는가?
스스로 제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긴 어렵지만, 저널에서의 경험은 직업인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을 지키기 위한 매일의 싸움 속 귀중한 지팡이가 돼주곤 합니다. 저널에서 4쪽 심층 기사를 작성하던 경험은 여전히 제 바탕에 남게 됐고, 그 덕에 짧은 방송 기사를 쓰는 데서 그치지 않을 수 있게 됐습니다. 방송기자 일을 하지만 저는 제가 소속된 회사의 롱폼 텍스트 컨텐츠인 《취재파일》을 작성하는 데 더 많은 애정을 쏟게 되는데, 긴 글을 써내기 위한 다양한 취재, 시각을 가지고 사안을 바라보려는 노력 등은 저널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배우기 어려웠을 것들입니다. 기성언론사의 도제식 교육 체계가 있긴 하지만, 매일의 뉴스를 그야말로 ‘막아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온전히 이를 배우기엔 현실적 한계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뉴스가 ‘스낵’처럼 소비되고, 심층 기사에 대한 별다른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 언론 환경 속, 기자의 자존감이 흔들릴 때마다 저는 종종 〈서울대저널〉 기자 시절 느꼈던 보람을 떠올리곤 합니다.
저널에서 찾는 희망
올해로 언론계에 10년째 종사하고 있지만, 솔직히 보람찬 날보다는 자괴감이 느껴지는 날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대학 시절 배웠던 아름다운 ‘공론장’ 모델, 한때는 가슴 벅차오르던 저널리즘 정신 같은 것들이 과연 실재할 수 있을까? 귀갓길 술에 취해 올라탄 엘리베이터 거울 속, 냉소적인 생각을 주워섬기는 스스로를 바라보며, 문득 무능함과 나약함에 발목 잡힌 ‘기레기’ 한 명을 발견하고는 합니다. 제가 쓴 기사의 댓글 창에서 악을 쓰고 싸우던 사람들이 ‘《폭싹 속았수다》를 보며 울었다’고 대동단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세상을 나아지게 하는 건 기사 따위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따금 옛 추억을 떠올리며 방문하는 〈서울대저널〉 홈페이지의 기사들을 보면서, ‘기사로 세상을 나아지게 한다’는 희망이 아주 헛된 것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꿈을 품어봅니다. 비상계엄 사태를 취재한 현업 기자로서, 12.3 비상계엄을 맞은 학생사회의 이야기를 담은 189호 특집 기사들을 읽었을 때 특히 그랬습니다. 현업 기자인 저는 밀려드는 속보 처리와 수사 상황 취재에 휩쓸려 있었지만, 〈서울대저널〉 특집호 속 기사는 제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을 향해 있었습니다. 기성세대와 권력자들이 허물어트릴 뻔했던 민주주의 저변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청년들의 고민과 시각, 그리고 이를 깊이 있고 담담하게 전달해 내는 저널의 기사를 보면서, ‘아직 기자와 기사가 할 수 있는 일들이 많이 남아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뒤늦게 보내는 감사의 편지
학생자치언론의 편집장을 한 학기 해보니 전임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주는 것도 없이 뱉어내라는 요구만큼 미안한 일이 또 있을까. 학업과 알바를 병행하며 취재를 다니고 기사를 쓰는 기자들을 다그칠 때마다 좀 많이 미안했다. 악덕 사장은 쥐꼬리 만한 월급이라도 주지만 자치언론 기자들에겐 보수도 없다.
미안함의 최고봉은 이번 호를 내며 찾아왔다. 기획 설문지를 받으러 학교 여기저기를 후비고 다니는 기자들을 보며 나는 이것을 열정이라 불러야 할지 열정 착취라 불러야 할지 아니면 삽질이라 해야 할지 가늠키 어려웠다. 언제까지 설문을 해야 하고 언제까지 기사를 내야 한다고 말하듯 짖어대는 편집장의 존재는 그들에게 적잖이 고역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열정인지 삽질인지에 대한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에게 맡긴다. 그리고 지난 2년 간 열정과 삽질 사이에서 요동쳤던 저널의 기자생활을 맺는다. 저널을 집어가는 학우 독자들에게서 〈서울대저널〉의 구성원들은 또다시 삽질을 시작할 열정을 얻을 것이다.
―127호 ‘편집실에서’, ‘열정과 삽질 사이’
편집장 임기를 마치며 ‘열정과 삽질 사이’라는 마지막 칼럼을 실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스스로의 발전은 더뎌, ‘학생 기자’가 아닌 직업인으로서의 ‘기자’가 된 저는 아직도 지나치게 많은 삽질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저는 이따금씩 눌러보는 〈서울대저널〉 홈페이지의 기사들을 접하며 내일의 기자질, 내일의 삽질을 할 용기를 얻습니다. 어찌 보면 〈서울대저널〉에 발을 들이면서 시작했다고 볼 수 있는 ‘기자일’이 그래도 가치 있는 일일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오래전 떠난 〈서울대저널〉에게 여전히 빚을 지고 살아가고 있는 셈인데, 그 고마움을 담은 편지를 이제야 부쳐봅니다. 활동비 한 푼 받지 않고 활동하는 기자들이 꿋꿋이 일궈낸 〈서울대저널〉의 30번째 생일상. 그 앞에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담아 부족한 이 글을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