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출 순 있어도 멈출 순 없으니까

저속노화 트렌드를 다각도로 바라보다
▲저속노화 식단(B씨 제공)

  블루베리를 곁들인 그릭요거트, 케일과 병아리콩이 섞인 샐러드, 잡곡밥에 양배추와 참치를 올린 덮밥. ‘저속노화’ 식단을 실천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접해봤을 음식들이다. SNS를 통해 확산돼 청년층에게 크게 주목받은 저속노화는 이제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았다. 사람들은 왜 느리게 나이 드는 것에 이토록 열광할까. 저속노화 열풍 속 우리가 고민해야 할 지점들을 살펴봤다. 

저속노화란 무엇인가

  저속노화란 말 그대로 ‘천천히 늙는 것’으로, 한국에선 아산병원 노년내과 정희원 교수에 의해 널리 알려진 개념이다. 정 교수는 노화를 ‘유전자와 환경이 시간의 흐름과 상호작용하며 세포, 조직, 기관, 개체에 일으키는 구조와 기능의 변화’라고 설명한다. 저속노화는 이러한 노화 과정에서 누적되는 신체적·인지적·정서적 기능 저하를 최대한 늦추기 위한 생활습관의 총체를 의미한다. 

▲저속노화 식단(B씨 제공)

  저속노화 식단은 식품 섭취 후 혈당의 상승 정도를 나타내는 혈당지수 관리에 초점을 맞춘다. 흰쌀밥과 설탕 같은 정제 곡물·단순당 대신 식이섬유가 풍부한 잡곡밥과 채소 위주의 식사를 하면, 포만감이 오래갈 뿐만 아니라 당뇨·고혈압 등 만성질환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희원 교수는 저속노화 식단이 “특별한 보조제 없이 매일 먹는 식사의 구성을 조금씩 바꾸는 것”이라며, ▲통곡물 기반의 잡곡밥 ▲채소 위주의 반찬 ▲양질의 단백질 ▲건강한 지방 ▲견과류와 베리류 간식 ▲가공식품 및 당류 섭취 제한을 핵심 원칙으로 제시한다.

  정희원 교수는 식단 외에도 저속노화를 위한 다양한 생활습관을 제안한다. ▲금주·금연 ▲걷기 운동 ▲자세 교정 ▲근력·유산소 운동 ▲마음챙김 명상 ▲질 좋은 사회적 관계망 형성 ▲충분한 회복 수면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 교수는 저속노화를 꾸준히 실천하면서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이전보다 개선됐고, 체지방이 줄어들었다”며 신체 지표에 나타난 긍정적 변화를 언급했다. 2년 전 큰 수술을 받고 건강 관리의 필요성을 느껴 저속노화 식단을 시작한 20대 남성 A씨는 “식습관을 관리하면서 꾸준한 운동, 규칙적인 수면 역시 신경 쓰게 됐다”며, 식단으로 시작한 저속노화 실천이 일상 전반으로 확대됐다고 밝혔다. 

  저속노화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식곤증 해소와 체중 감량뿐 아니라, 정서적 만족 또한 경험한다. 30대 여성 B씨는 “다이어트보다 저속노화의 어감이 더 좋다”며 “사회의 미적 기준에 나를 맞추기 위한 다이어트와 달리, 저속노화는 스스로에게 신경을 쓰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건강한 식습관을 유지하고 있다는 뿌듯함이 자기 긍정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저속노화 실천은 중용의 자세도 강조한다. 매 끼니 식단을 지키려는 강박이 스트레스로 작용하면 오히려 건강에 악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20대 여성 C씨는 “뭐든 엄격하게 하려고 하면 금방 지친다”며, 가공식품 섭취를 줄이고 자투리 시간에 스쿼트를 하는 등 일상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고 전했다. 30대 여성 D씨는 잡곡밥에 일반식 반찬을 곁들인 ‘중속노화식’을 먹는다며 꾸준한 실천을 위해 ‘가속노화’와 저속노화 사이의 타협점을 찾고 있다고 말했다.

  저속노화를 꾸준히 실천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온오프라인 커뮤니티나 주변인들과 함께하는 식사 모임에서 정보를 공유하고,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정희원 교수가 엑스(구 트위터)에서 이끄는 ‘저속노화 식단 커뮤니티’에선 5만 명이 넘는 회원이 매일 각자의 저속노화 식사 사진을 올리고 직접 만든 레시피를 공유한다. D씨는 “사람들이 뭘 먹는지 구경하다 보면 ‘나도 다음에 해 먹어봐야지’라는 마음이 든다”며 커뮤니티가 저속노화 실천을 이어나가는 데 큰 원동력이 된다고 말했다.

우리는 왜 가속 노화 페달을 밟게 될까

▲주요 채소 가격 증가율 ©빈채현

  맵고, 짜고, 기름진 음식을 피하라는 권고는 낯선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건강한 몸을 유지하기 위한 지침이 저속노화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일 뿐이다. 그러나 저속노화 식단이 가지는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이를 꾸준히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다. 왜 누군가에게는 저속노화 식단을 실천하는 것이 여전히 어려운 것일까.

  한 가지 이유로 과일·채소의 가격이 가파르게 증가한 것을 들 수 있다. 2024년 소비자물가상승률이 2.3%였던 것에 비해, 신선식품지수*는 9.8%까지 올랐다. 시금치·상추·브로콜리 등 저속노화 식단의 핵심인 푸른잎채소의 가격 역시 크게 뛰었다. 여기에 기후위기로 인한 생산량 변동과 가격 예측의 어려움이 겹치며 과일·채소 구매 부담이 더욱 커졌다.  

*신선식품지수: 신선어류나 조개류·채소·과실 등 기상조건이나 계절에 따라 가격변동이 큰 품목으로 작성한 지수

  치솟는 장바구니 물가에 누군가는 건강한 식습관 유지와 식비 절감을 동시에 고민한다. 자취 중인 20대 여성 E씨는 저속노화 실천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식재료 구입과 관리를 꼽았다. E씨는 “1인 가구라 채소를 조금이라도 많이 사 두면 금방 상한다”며, 계절의 영향을 덜 받고 비교적 보관이 쉬운 냉동 채소를 활용한다고 말했다. 가족과 함께 거주하는 C씨는 마트의 할인 코너에서 채소를 소량 구매하는 방식으로 식비를 절약한다고 대답했다. 

  비용뿐 아니라 접근성 문제도 존재한다. 학교나 일터에서 저속노화 식단을 실천하는 데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르는 것이다. 대학생인 A씨는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끼니가 아침 식사”라며 가능한 때라도 저속노화식을 챙겨 먹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A씨는 외식을 할 때도 가급적 쌈밥이나 샐러드 등 채소가 많은 메뉴를 고르려 하지만, 실제로 건강한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다고 덧붙였다. 대부분의 식당에서 채소 위주의 메뉴를 찾기 힘들 뿐더러, 여럿이서 함께 식사할 때는 채식 메뉴를 고르는 것이 독단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우려로 목소리 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저속노화 간편식 ©세븐일레븐

  바쁜 일상 속 간편하게 챙길 수 있는 저당·저염 식사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식품 업계는 발 빠르게 저속노화 트렌드에 대응하고 있다. 온라인 식료품 판매업체 ‘컬리’는 ‘잡곡 상품군의 연간 판매량이 30% 이상 증가했다’며 건강한 먹거리를 지속적으로 발굴하겠다고 선언했다. 2025년 1월 세븐일레븐은 정희원 교수와 협업해 렌틸콩밥과 닭가슴살을 주재료로 한 ‘저속노화 간편식’을 출시했고, CJ는 렌틸콩·귀리·현미·백미 비율을 4:2:2:2의 비율로 혼합한 ‘잡곡 햇반’을 선보였다.

  이처럼 가공식품 업계의 다변화가 이뤄지고 있지만, 사회생활을 하면서 저속노화식을 지속하기는 쉽지 않다. 장시간 일하는 한국 노동자는 직접 장을 보고 음식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치 않기 때문이다. 2023년 한국 임금노동자의 월평균 근로시간은 157.6시간으로, OECD에 근로시간을 보고한 회원국 중 가장 길었다. 또 2024년 통근 근로자의 평균 출퇴근 시간은 74분, 하루 평균 근무지 체류 시간은 9.1시간에 달했다. 아침 일찍 출근해 장시간의 근로를 마치고 밤늦게 귀가하는 평균적인 한국인에게 출근 전 도시락을 준비하고, 퇴근 후에 근력 운동을 하면서 충분한 수면 시간까지 확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현실이다.

저속노화 위에 놓인 자본의 덫

  기업은 개인이 건강한 식단을 준비할 시간이 충분치 않은 현실 속 저속노화 트렌드의 빈틈을 파고든다. 자극적이고 중독적인 맛을 강조하던 식품업계는 ‘건강 식단’이라는 브랜딩을 내세운 상품을 잇따라 출시했다. 실제로 노화를 늦출 수 있다는 임상적 근거를 갖추지 못한 상품에 ‘저속노화’ 라벨이 붙기도 한다. 자본의 논리는 각종 영양제, 사과식초, 발효유 등 건강기능식품을 통해 쉽고 빠르게 ‘젊은 몸’을 확보할 수 있다며 소비자를 유혹한다.

▲‘슬로우에이징’ 캠페인 ©CJ올리브영

  뷰티 업계 역시 저속노화 트렌드에 주목하며 노화를 늦추려는 소비자들의 욕구를 적극적으로 공략하고 있다. 2024년 10월 올리브영은 모공·기미·잡티·주름 개선을 목적으로 하는 ‘슬로우에이징(slow aging)’ 화장품 매출이 전년 대비 약 70% 늘어났다고 밝혔다. 올리브영은 노화를 거부하는 ‘안티에이징(anti-aging)’과 달리, 슬로우에이징은 노화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건강한 아름다움을 유지하며 천천히 나이 드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지방흡입, 콜라겐 주사, 줄기세포 항노화 치료 등 보다 직접적인 노화 방지 시술도 저속노화라는 이름 아래 홍보된다.

  그러나 슬로우에이징과 안티에이징의 경계는 모호하다. 슬로우에이징을 앞세운 저속노화 마케팅 역시 ‘천천히 아름답게 늙기’, ‘동안 외모 유지’ 등의 수사를 활용해 나이 들고 주름진 몸을 감추라는 무언의 압박을 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압박은 틱톡이나 유튜브와 같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 청소년층에게까지 여과 없이 확산되고 있다. 

▲저속노화 상품을 홍보하는 뉴스 헤드라인 ©빈채현

  저속노화 열풍 속 나이 든 몸을 개인의 관리 부족으로 환원하는 논리를 경계해야 한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건강 관리 산업은 자기절제를 일종의 도덕적 의무로 규정한다. 이러한 담론은 노화를 단순히 나이듦의 과정이 아니라, 몸에 충분히 투자하지 못한 결과로 만들며 각종 건강 관리 식품 및 서비스에 대한 소비를 유도한다. 미국의 사회비평가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저서 『건강의 배신』(2019)에서 ‘건강하기 위한 원칙들을 지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건강하게 장수할 수 있다’는 주장이 노화에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요인을 지운다고 비판했다. 또한 극단적인 자기절제가 오히려 노년기 질병과 장애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노화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저속노화 트렌드는 ‘건강하고 활동적이며 사회적인 노년’을 이상적인 모습으로 설정하는 성공적 노화 담론과 맞닿아 있다. 성공적 노화 담론은 활력 있는 노년의 삶을 제시하며 노화에 대한 인식을 긍정적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노화를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이분법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김경민 교수(아동가족학과)는 “현실의 노인은 적어도 한두 군데는 아픈 곳이 있다”며 “이러한 아픔을 수용하며 살아가는 것이 오히려 ‘성공적’ 노화의 의미에 근접하다”고 주장했다.

  노화를 늦추는 방법에 대한 관심은 늘어났지만, 노화에 대한 인식은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C씨는 자신의 친구가 “나이가 들면 더 느려지고, 정돈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 두렵다”며, “늙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을 회상했다. 이처럼 한국 사회에서 노화는 상실 및 쇠퇴의 이미지와 강하게 결합돼 있다.

  김경민 교수는 “노화에 대한 개인의 생각은 가족으로부터 비롯된 경우가 많아 편향되기 쉽다”며 노화에 대한 인식이 신화나 편견에 근거한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특히 청년층의 경우 노인과 교류하는 경험이 적어, 일시적인 만남에서 노인의 단편적인 면만 접하고 노화에 대한 부정적 편견을 갖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마주본 청년과 노인 ©빈채현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노인은 단순히 나이 든 사람이 아니라, 생산성을 잃고 ‘쓸모 없어진’ 존재로 여겨진다. 사회학자 장상철은 논문 「신자유주의 시대 한국사회에서의 감정의 문화정치와 노인 혐오」(2024)에서 노화가 ‘젊고 건강한 신체라는 정상성에서 벗어나 혐오스러운 대상이 돼 가는 타자화의 과정’으로 인식된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타자화는 ‘생산 능력을 잃은’ 노인을 사회적 정상성의 범주 밖으로 밀어내며, 노화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서 비롯된 편견을 덧씌운다. 이 과정에서 실제 노인 집단의 특성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려는 충분히 이뤄지지 않는다. 결국 노인은 본래 ‘혐오할 만한’ 특성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하는 취약성과 유한성에 대한 사회적 두려움이 투영된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 언론은 고령화를 위기나 재앙으로 표현하며 노인 집단을 타자화하는 데 일조한다. 정년 연장·노인연령 상향·기초연금 등 노인 의제는 노년의 삶의 질에 대한 종합적 고려보다 경제적 효율성을 중심으로 논의되며, 노인을 사회적 부담이자 비용으로 여기는 담론을 공고히 만든다. 대중매체 속 노인의 모습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23년 영화진흥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60세 이상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일반영화는 전체 영화의 2.4%에 불과했다. 드라마 《눈이 부시게》(2019)나 영화 《소풍》(2024)처럼 다층적인 노년의 삶을 그리는 작품도 나오고 있지만, 노인은 여전히 신체적·경제적으로 취약한 존재 혹은 젊은 세대의 현자로 납작하게 묘사된다.

  이처럼 노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노인의 우울과 불안을 심화한다. 청년층이 노년의 삶을 바로 응시해야 하는 이유다. 김경민 교수는 이를 위해 세대 간 ‘뒤섞임(mingling)’, 즉 다른 연령대와의 질적인 만남을 강조한다. 연령주의 해소를 위해서는 노화의 과정을 이해하고 노화에 대한 신화를 깨뜨릴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개인적 수준의 교류를 늘림과 동시에, 연령 동질적인 한국사회의 구조가 바뀌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저속노화 트렌드가 청년층에게 주목받으며 건강한 노화를 위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있게 도와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많은 이들에게 ‘노화를 늦추는’ 생활습관의 실천은 나이 든 몸에 대한 우려와 불안보다는 현재의 나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건강하고 싶은 소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노년의 질병과 장애를 비켜 가기 위한 개인의 노력에만 방점이 찍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건강한 노년을 위해 필요한 건 개인의 실천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제도적 지원과 사회적 논의다. 돌봄이 필요한 존재를 ‘자신의 몸을 통제하지 못한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노화를 자연스러운 생애과정으로 온전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나이 든다는 것을 기억하고, 노인과 비노인의 이분법을 극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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