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호에서는 네 편의 책을 소개합니다.
『탄핵-일지』
김기태 외 14인, 문학과지성사, 2025.
홍인표 기자 han0727@snu.ac.kr

김기태, 김멜라, 김복희, 김이설, 김형중, 문보영, 박솔뫼, 서효인, 소영현, 손보미, 송희지, 이미상, 이장욱, 임유영, 황정은. 시인, 소설가, 비평가 15명은 12.3 내란부터 1월 말까지의 일기를 내놓았다. 소설가 황정은이 “원고로 돌아갈 수 없어 일기로 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처럼, 비상과 일상의 경계가 철저히 무너진 시간 동안 겨우 수립할 수 있는 언어는 일기뿐이었을지 모른다. 이 일지에는 작가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어떤 당혹을, 분노를, 슬픔을, 고민을 느꼈는지 적혀있다.
솔직하고, 휘청이고, 헷갈리는 일기들은 소설가 이미상이 경계한 “작가들이 (…) 조탁한 명언”과 같은 거추장스런 비판과는 거리가 멀다. 다만 이 말들은 평론가 소영현이 기록가 희정의 글을 인용하며 언급한,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흔적”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 일기라는 흔적은, 아무리 그 시기가 일상을 상상하기 버거운 때였더라도, 우리가 분명 굴복하지 않고, 충분히 느꼈고, 충분히 살아냈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우는 나와 우는 우는』
하은빈, 동녘, 2025.
송수림 기자(songsurim@snu.ac.kr)

은빈은 장애를 가진 연인 우와 사랑하고, 이별한다. 평범한 듯 특별하고, 초라한 듯 찬란한 이 사랑을 지켜보면서 독자들은 어쩐지 내내 두려워지는데, 은빈과 우의 삶을 잘못 해석하게 될까 봐 그렇다. 울어선 안 될 대목에서 울어버리거나 결정적으로 슬픈 순간을 무심히 지나치는 무례를 범할까 봐. 이러한 주저함을 일으키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해내는 가장 놀라운 일이다.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오독”되기를 반복하던 연인이 자신의 사랑에 대해 말하기 시작할 때, 독자들은 은빈과 우의 복잡한 사랑을 해석하기 위한 자원이 너무나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사랑을 손쉽게 해석하는 것은 그 사랑이 지닌 고유한 모서리를 간과하는 일이다. 우리의 해석이 헛디디는 지점은, 채 이야기되지 못한 누군가의 삶의 자리다. 그러므로 끝내 이야기가 되지 못한 삶의 면면을 존중하기. 빈 부분을 섣부르게 채우지 않기. 다만 삶의 주인이 자신의 삶을 이야기로 만들 때까지 기다리기. 우리가 이 책을 통해 배우는 것들이다.
『서울 선언』
김시덕, 열린책들, 2018.
박시윤 기자(psypsy228@snu.ac.kr)

서울이란 무엇일까. 단지 행정구역 하나로 보기엔 부족하다. 도시 답사가를 자처하는 김시덕은 ‘변화하는 시공간과 그 안을 드나드는 사람들 그 자체’로 서울을 정의한다. 아니, 선언한다. 격동하는 서울의 시공간을 거닐고, 포착하고, 기록한다. 사라지고 생겨나는 것들에 시선을 드리운다.
그는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아는 서울은 누군가에 의해 선택되고 가려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단 사실을. 빼곡히 들어선 고층 아파트 아래엔 재개발 열풍에 밀려 서울 밖으로 떠나야 했던 사람들의 역사가 감춰져 있다. 조선 상류층 문화를 복원한 궁궐과 도성 아래엔, 근현대 민중의 삶과 투쟁이 묻혀 있다. 찬란하고 강해 보이기 위해 가려야만 했던 삶과 역사가 서울에는 너무 많다. 그러니 이제는 가려진 시공간을 향해 인식의 폭을 확장해야 할 때다. 저마다의 ‘서울 선언’을 통해.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조영훈 옮김, 한마당, 1983.
손원민 기자(dnjsals1203@snu.ac.kr)

지식인이란 말을 따옴표 없이 옮기기가 여전히 힘들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은 1965년 9월과 10월, 사르트르가 도쿄와 교토에서 진행한 강연을 담고 있다. 1부에선 지식인이 누구인지, 2부에선 그런 지식인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3부에선 작가가 과연 지식인인지를 다룬다. 그때로부터 60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지배계급도 노동계급도 아닌, 그 사이의 존재로 규정한다. 지식인은 자신의 말과 사유가 체제 내에서 주어진 특권의 결과임을 끊임없이 자각하는, 자기 의심을 동력으로 움직인다. 사르트르가 변론하는 진정한 지식인은 “모든 폭력은 나쁘다”처럼 공허한 보편을 외치는 “사이비 지식인”이 아니다. 폭력이 권력적으로 발생하는 현실을 드러내며 “구체적 보편성”을 고발하는 자다. 피, 눈물, 갈등 위에서 만들어가야 할 보편을 말하는 자다.
결국 지식인에게 중요한 것은 연결이다. 아무도 시키지 않은 역할과 자신을 연결해야 한다. 자신 안에 내재된 모순과 구조적 모순을 연결하고, 끝내 자신의 해방과 더 넓은 해방을 연결해내야 한다. 물론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순전한 중간자적 위치랄 것이 정말 있는가. 지식인이 지배계급과 쉽게 공모하게 하는 조건이 있진 않은가. 완전히 긍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지식인이란 존재를 알고 싶다면, 이 책이 유효한 출발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