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기사는 영화 《미키17》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크레바스* 아래로 추락한 ‘미키17(로버트 패틴슨)’. 생과 사를 가르는 위태로운 순간, 그의 동료 ‘티모(스티븐 연)’가 나타난다. 그를 보고 한숨을 돌린 미키17이 도움을 청하는 순간, 티모는 미키17이 아닌 화염방사기에 관심을 보인다. 이내 화염방사기만을 챙겨 돌아가는 티모. 죽을 위기에 처한 동료를 아무렇지 않게 내버려두고 가는 이 상황. 봉준호 감독이 그려낸 《미키17》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크레바스: 빙하가 갈라져서 생긴 좁고 깊은 틈
복제 가능한 생명: 존엄성의 추락
‘미키’는 보육원 동기인 티모와 함께 마카롱 가게를 열었지만 가게는 망하고 사채업자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다. 둘은 이내 악독한 사채업자를 피해 행성 ‘니플하임’ 개척을 위한 우주선에 탑승하려 한다. 변변한 기술도 없었던 미키는 아무도 신청하지 않는 ‘익스펜더블’에 자원해 우주선 탑승 자격을 얻는다. 익스펜더블 역시 행성 개척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꾼이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신체정보 등록과 기억 업데이트를 통한 복제 허용을 계약 조건으로 한다. 다시 말해 스스로 복제 인간이 되는 길을 택한 셈이다. 죽어도 복제할 수 있는 익스펜더블이 된 미키는 온갖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다. 크레바스에 빠져도 구할 필요가 없는 그런 존재로서.

영화는 익스펜더블이 된 그의 존엄성이 추락하는 과정을 다양한 방식으로 선명하게 보여준다. 행성 개척의 첫 단계는 인간에게 해로울지 모르는 바이러스를 조사하고 백신을 만드는 일이었다. 미키는 기왕이면 많은 바이러스에 감염되길 바라는 과학자들의 기대 속에서, 낯선 외계 행성의 대기에 맨몸으로 내던져진다. 감염돼 피를 토하며 죽어가는 ‘n번째’ 미키를 보는 연구자들의 시선은 실험쥐에게 보내는 과학적 호기심과 다를 바 없다. 한편, 행성을 탐사하던 중 불의의 사고로 미키가 아닌 그의 동료가 죽자, 우주선 사령관 ‘마샬(마크 러팔로)’은 익스펜더블인 미키가 대신 죽었어야 한다며 욕설을 퍼붓는다. ‘쓸모없다’는 비난과 함께. 이 힐난은 미키가 쓸모를 입증하려면 자신을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하찮은 소모품으로 취급해야만 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영화에 등장하는 장치와 설정도 그를 하찮은 존재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 복제에 사용되는 신체 조직은 폐기물을 재활용해 만들어진다. 미키의 기억을 담는 장치는 벽돌 모양이다. 이는 모두 미키라는 존재를 단지 쓰고 버리는 부속품으로 보는 인식을 강화한다.
그러나 영화 바깥에 위치한 관객은 결백할까? 인간은 보편적으로 유한한 자원에 더 높은 가치를 둔다. 인간의 삶이 소중한 것 역시 죽음이라는 필연적 유한성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키는 유한성을 극복당한 존재다. 비록 죽음이라는 불연속성을 완전히 지워내진 못했지만, 미키에게 죽음은 영원한 끝이 아니다.
복제 가능성으로 인해 유한성을 잃은 미키는, 유한성을 가치에 결부하는 시선 속에서 존엄이 부정될 수 있다. 따라서 관객의 시선은 미키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중 인물과 일부분 공모한다. 작중 인물들의 태도를 윤리적이라고 말하진 못하더라도, 그들의 행위가 일부분 합리적이라고 여기는 마음을 완전히 떨쳐내기는 어렵다. 이렇듯 미키를 둘러싼 영화 내외부의 시선과 장치를 통해, 복제 가능성과 존엄성의 추락은 거칠게 연결된다. 관객 마음속에 자리한 불편함과는 별개로.
멀티플: 동일성과 비동일성
이 영화의 핵심적인 변곡점은 모두가 죽은 줄로만 알았던 미키17이 살아 돌아와 미키18을 마주하는 장면, 즉 복제인간이 둘 이상 공존하는 ‘멀티플’ 상황이 벌어진 순간이다. 원칙적으로 금지된 멀티플 상황은 영화를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이는 미키가 존엄성을 회복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이 시점부터 마주하게 되는 인간 복제를 둘러싼 복잡한 문제다.

논쟁은 동일성과 비동일성 사이의 긴장에서 시작된다. 미키는 복제인간이다. 따라서 미키17과 미키18은 동일성을 가장 큰 전제로 공유한다. 하지만 봉준호 감독은 둘의 성격을 극명하게 갈라놨다. 온순한 미키17과 과격한 미키18. 둘 중 누구를 진짜 미키로 부를 수 있는지, 하나가 죽어야 한다면 누구여야 할지 비동일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실제로 미키17과 미키18은 처음 서로를 마주하고 죽이려 든다. 자신이 살아야만 하는 이유를 대면서.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영화가 두 미키의 자아정체성 혼란에 천착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단지 몇몇 상황을 제시해 고민을 던질 뿐이다. 오히려 더 주목할 만한 지점은 복제된 두 미키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이다.
우선 미키의 애인 ‘나샤(나오미 애키)’의 태도다. 나샤는 삶과 죽음을 반복하는 미키의 궤적에 늘 함께했다. 모두가 미키의 죽음에 무관심할 때도 옆에 남아 함께 고통을 느낀 유일한 사람이다. 이런 나샤는 두 미키를 마주했을 때도, 멀티플 상황의 해소를 고민하기보다는 미키가 둘이 됐다며 기뻐한다. 미키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든 상관없었던 것일까. 나샤가 진정 사랑한 것이 무엇인지 질문할 때 비로소 타당한 답에 다가설 수 있다. 나샤는 특정 시점의 미키가 가진 특정한 인격이 아니라, 삶과 죽음을 반복하며 새롭게 복제되는 미키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한 것이다. 그렇기에 멀티플 상황에서 나샤가 양자택일의 논리를 앞세우는 일은 가당치 않다.
우주선을 지배하는 마샬의 반응도 인상깊다. 그는 나샤와는 다른 의미로 양자택일의 논리를 용납하지 않는다. 단지, 규정에 따라 둘 모두를 제거하려고 할 뿐이다. 결국 흥미로운 점은 그 의미와 목적은 다르지만 나샤와 마샬 모두 멀티플 상황에서 어떤 미키를 살려야 하는지에는 무관심하다는 점이다. 둘 다 살리거나, 둘 다 죽이는 선택지만을 고려하고 있다.
미키17과 미키18 사이에는 같은 신체를 지녔다는 동일성과, 각자의 성격과 상황이 다르다는 비동일성이 함께 놓여 긴장이 형성된다. 하지만 두 미키를 바라보는 타인은 동일성과 비동일성을 근거로 어떤 판단을 하는 대신, 둘 모두를 수용하거나 제거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미키가 가진 존재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사랑하고, 누군가는 무자비하게 삭제하려 한다. 영화는 이렇게 타인과 두 미키 사이에 새로운 긴장을 유발하며 수많은 논쟁거리와 의미를 파생시킨다.
크리퍼: 대안적 세계를 그리다
멀티플 상황이 이어지며 미키 일행과 마샬의 갈등이 심화되는 가운데, 행성에 원래 살고 있던 ‘크리퍼’라는 존재가 중요한 축으로 부상한다. 의미로도, 그 숫자로도. 크리퍼의 등장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영화가 인간 사회를 묘사하는 방식에 주목하면 실마리가 보인다. 마샬은 미키를 쓰고 버리는 존재로 취급한다. 죽어야 할 때 죽지 않은 미키를 비난한다. 관객은 그의 악랄함에 거부감을 느낀다. 하지만 과장된 느낌은 있어도 아주 낯설지는 않다. 이 불쾌한 기시감은 영화의 상황이 약간의 상상력과 과장으로 재현한 우리 사회의 모습이라는 데서 기인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새롭게 부활한 사회 계급은 미키의 세계에서 더 적나라하게 묘사될 뿐, 완전히 새롭지는 않다.
크리퍼의 등장은 인간 사회의 불평등을 더 선명하게 만든다. ‘마마’ 크리퍼와 ‘베이비’ 크리퍼, 그리고 다른 크리퍼에게는 체구에 따른 위계질서가 있는 듯 보이지만, 그들 모두는 사실 서로 돕고 의존하는 관계다. 이런 평등한 관계만이 크리퍼 사회가 보여주는 대안성은 아니다. 크리퍼는 첫 등장에서 미키17을 구해준다. 또, 베이비 크리퍼를 납치하고 죽인 인간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대신, 최소한의 정의 구현만을 요구한다. 이런 대비 속에서 마샬의 폭력성은 크리퍼의 모습과 분명히 대조된다. 봉준호 감독은 무척 뚜렷하게 크리퍼의 세계가 마샬이 이끄는 인간 사회보다 낫지 않느냐고 질문한다.
하지만 감독은 단지 크리퍼 사회가 지향할 만하다고 말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미키를 통해 인간과 크리퍼를 연결 짓고 변화의 단초를 제공한다. 그 연결은 섬세한 방식으로 그려진다. 크리퍼에게 구조되고 통역기로 소통하는 존재는 미키17이다. 반면 우주선 계급 사회의 정점에 있는 마샬과 직접 대치하는 존재는 미키18이다. 각 미키들의 성격도 미키17은 온순한 크리퍼의 성격을, 미키18은 폭력적이고 과격한 마샬의 모습과 닮아있다. 마샬과 크리퍼의 대치 상황에서 미키17은 크리퍼에게 향했고, 미키18은 마샬과 함께 죽음을 맞는다. 크리퍼와 연결되는 시작점에는 미키17이 있었고, 잔악무도한 인간 문명의 종지부를 찍는 마샬의 죽음에는 미키18이 있었다. 마샬의 시대를 끝내고 크리퍼가 보여준 대안적 세계로 나아가는 전환의 중심에 두 미키가 있다.
낭만적 결말: 단순함이 만드는 역설
마샬이 죽은 후 사실상 그가 장악했던 위원회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닥쳤고, 나샤를 중심으로 한 위원회는 결국 인간 복제용 프린터를 폭파한다. 그리고 영화는 행복한 결말로 끝맺는다. 지나치게 편안한 결말. 이 결말 앞에 미심쩍은 감정이 남는다. 결말에 이르기까지 후반부의 문제 해결은 어렵지 않았고, 선악의 대비는 뚜렷했으며, 사랑과 연대는 승리한다는 동화적인 결말에 이르렀다. 이 매끄러움은 무언가 놓친 것만 같은 불편함을 남기고, 이 앞에서 많은 해석의 길이 열린다.
어떤 해석이든 가능하겠지만, 해석을 말하기에 앞서 현상 혹은 반응 자체를 논하는 것이 유의미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비판하는 이들은 줄곧 엉성하고 단순한 줄거리를 지적한다. 하지만 단순하다는 특성은 무척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영화를 복잡한 작품으로 만든다. 영화가 단순할수록 그 안에 담긴 깊은 의도를 찾아야 한다는 압박이 커지기 때문이다. 감독이 봉준호라는 점은 그 압박의 전제가 된다. 엉성하고 단순한 줄거리는, 파고들수록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다는 심오함을 기대하게 만든다. 그 심오함이 감독의 의도인지와는 별개로, 단순함의 저변에서 심오한 무언가를 찾으려는 노력은 자연스럽다. 특히 그것이 결말에 관한 것이라면.
이제 단순함에서 기인한 미심쩍음을 해소할 준비가 됐다. 첫 시도는 과하게 순탄한 문제해결 과정을 되짚어보는 데서 시작한다. 크리퍼와의 소통을 위한 통역기 개발 과정에서는 별다른 시행착오가 포착되지 않았고, 마샬의 독재를 끝내는 일에는 대단한 계획과 준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쉽게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랑과 연대의 승리라 긍정해 볼 수도 있지만, 한편에 남은 씁쓸함은 영화가 끝나면 현실로 고개를 돌려야 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대안적 세계를 그리는 영화적 상상은 그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과 결부될 때 정반대의 감정을 남긴다. 이 영화의 문제해결이 단순해 보이는 만큼, 이와 대조되는 사회 현실이 차갑게 다가온다.

한편, 결말에서 느껴지는 미심쩍음은 남아있는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동화 같은 결말은 그것을 위협하는 현실 감각이 개입될 때 불안감을 자아낸다. 프린터를 폭파하고자 열린 행사에서, 백일몽에 빠진 미키는 프린터에서 복제되는 마샬을 본다. 악(惡)은 끊임없이 재생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한 꿈의 내용은, 평화로운 결말 끝에서 현실적인 불안을 어렴풋이 남긴다. 다른 한편으로는 프린터 폭파라는 상징적 행위가 인간 복제 기술을 영원히 억제할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처럼 낭만적인 결말은 현실을 살아가는 관객 입장에서 완전무결한 것으로 수용하기 어렵다.
많은 화두와 쟁점을 던지며 시작했지만, 매끄러운 후반부 전개와 동화적 결말로 끝맺는 《미키17》. 낭만적 마무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일과, 초반부터 영화가 흩뿌려 놓은 화두를 깊이 파고드는 일 사이에 이어지는 긴장. 하지만 한 번쯤은 양자택일의 해석보다 긴장 자체를 받아들이고 끝맺어 보면 어떨까. 이렇게 말이다.
SF적 상상력이래도, 단순하고 낭만적인 결말이래도 좋다. 수많은 화두를 던졌지만 깊이 파고들기보다는 순탄한 전개로 행복한 결말을 만든 봉준호 감독의 선택을 존중하자. 기저의 문제의식은 유지한 채, 나샤가 보여준 총체성을 향한 사랑과 크리퍼가 보여준 위계 없는 연대를 위태롭게, 떨리는 마음으로 긍정해 본다. 현실적이지 않으나 현실이길 바라는 한 예술가의 소망이었을지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