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 속에서도 삶은 움튼다

산호,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 1~2, 고블, 2025.
▲책 표지 ©고블
▲책 표지 ©고블

※본 기사는 책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불이 너무 뜨겁다. 예고 없이 덮친 화염에 너무 많은 생명이 순식간에 스러진다. 큰불이 지나간 자리엔 새까맣게 탄 숲의 흔적만이 남았다. 이 잿더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볼 수 있나. 많은 게 파괴된 세상에서도 모든 게 끝나지는 않았다고 말하는 『그리고 마녀는 숲으로 갔다』를 읽어봤다.

산, 수도꼭지를 틀면 끝도 모르고 쏟아지는 물줄기가 영원할 거라고 믿었던 눈먼 낙관의 시절이 있었다.

▲만신나루로 가는 길목 ©산호

  극심한 기후위기로 밥 한 끼조차 제대로 먹기 힘든 세상에서 또 한 번 소외된 이들이 있다. ‘만신나루’에 사는 마녀들이다. 20년 전 산불 이후, 국가는 ‘마녀 특별법’을 만들어 이들의 거주지를 분리했다. 산불로 어머니를 잃은 만신나루 아이들은 서로를 돌봤다. ‘산’과 ‘초원’ 역시 그렇게 서로의 가족이 됐다. 둘은 때가 되면 밭에서 딴 무화과로 잼을 만들고 밀짚모자를 쓴 채 함께 숲을 거닐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원이 말없이 사라졌다. 산의 기약 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초원이 산에게 남긴 편지©산호

  지금과 같은 성장과 발전을 지속했을 때 인류는 책 속 세계처럼 필수적인 물자조차 구하기 어려운 미래에 도달할 것이다. 그 세상에도 배제된 이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만신나루의 마녀들은 세간의 차별과 무관심에 아랑곳하지 않고 저마다의 생활세계를 가꾼다.

우리의 어머니들은 눈짓 한 번으로 파도를 재우고 손짓 한 번으로 숲을 세웠다고 했다.

  마녀들의 힘은 자연과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산은 “싹이 트고, 열매가 익고, 때 되면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걸 믿었어요”라며, “봄마다 새가 알을 낳으면 거기서 어린 새가 깨어날 거라는 믿음”이 마녀와 자연 사이를 가로지른다고 설명한다. 굿을 할 때면 절대자로 여겨지는 ‘신’의 이름을 빌리기도 하지만, 만신나루를 관장하는 신은 순환하는 세계에 대한 믿음 그 자체에 가깝다. “적어도 이 신은 눈에 보이잖아요” 라며 자전거를 타는 산의 뒤로 울창한 나무가 칸을 꽉 채운다. 마녀들에게 신이 자연의 순환 질서, 혹은 자연 그 자체라는 걸 암시하는 장면이다.

▲자전거를 타고 나무 사이를 가로지르는 산 ©산호

  바람과 초목, 물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녀들의 힘은 자연 가까이에서 노동하고 삶을 일궈온 이들이 체득한 지혜일지도 모른다. 작중 산의 엄마가 파종하기 전 흙에 기도하고, 저마다 이름을 가진 마을 나무들에게 수확물에 대한 감사를 전하는 장면이 나온다. 자연이 준 것에 마음을 표하며 비인간 존재와 적극적으로 얽히는 것이다. 긴 시간 땅과 바다를 오가며 마녀들이 알게 된 것은 그들의 삶에 고스란히 녹아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녀들의 힘은 “공기와 숲과 바다도 쇠락해 가는 지금”, 갈수록 약해지고 있다. 자연이 파괴되고 비인간 존재가 몰살되는 현실에, 마녀들은 그 울부짖음을 외면하지 못해 아파한다. 한국에서 마녀는 으레 무당을 뜻한다. 무당은 세상 모든 존재의 영에 감응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존재다. 마녀들이 자연의 아픔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고통을 감지하는 촉수가 유달리 예민한 탓도 있을 것이다.

  마녀들은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여겨 기후운동에 나선 활동가처럼 보이기도 한다. 활동가 희음은 『우리 힘세고 사나운 용기』(2023)에서 기후위기를 비롯해 “온갖 구조적인 착취와 추출로 지금 당장 삶을 박탈당하는 이들”의 자리를 가까이 느끼게 된 후로, “그 절박한 외침과 눈물이 내 삶의 정중앙으로 파고들었다”고 회고한다. 이전까지 거리를 두고 지켜보던 고통이 삶 깊숙이 침투해 “나 아닌 이들의 땀과 눈물과 오물과 냄새를 묻히고 넘겨받으며 얽히고 기대어서 우는 일”이 익숙해졌다는 것이다.

  흐릿해진 세계의 경계에서 타자의 고통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이들은 이제껏 보지 못한 걸 볼 수 있게 된다. 가령, 봄이면 새롭게 나는 연둣빛 잎과 비 온 뒤 촉촉해진 흙 같은 것. 엉킨 덤불 사이로 빼꼼 나온 뱀딸기와 나무 사이를 뛰어다니는 청설모처럼,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알 수 없던 것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온다. 동시에 날카로운 절단기로 나무와 수풀을 밀고 지어진 회색빛 건물을, 벌목으로 오갈 데 없는 청설모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미처 지키지 못한 아름다움은 아픔으로 돌아올 테다.

그러니 우리는 한 번도 이 행성에서 표준이었던 적이 없는 거예요.

  산이 의대에 진학한 이유는 마녀들 사이에 퍼지는 반점의 원인을 찾아 초원이 앓는 병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마녀들의 병은 연구 대상조차 아니었다. 산이 존경하던 교수님조차 “모든 마녀는 여자니까 필드에서 배제되는 집단에서도 더 축소되는 소수”라며, 기준으로 삼는 ‘인간’을 바꾸지 않는 한 연구 자체가 어렵다고 조심스레 말한다.

▲교수님의 말을 듣는 산 ©산호

  이처럼 하나의 몸을 표준으로 삼는 사회에서 ‘정상’에 들어맞지 않는 몸들은 멸종의 길로 들어선다. 책은 남성과 여성의 항체 반응 매커니즘 자체가 다른데도 여성 질환 신약을 개발할 때조차 남성 동물을 이용하는 의료계의 관행을 비판한다. 이는 백신 부작용자의 70%가 여성인 현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성차를 고려하지 않고 남성의 몸을 기준으로 얻은 실험 결과를 그대로 여성의 몸에 적용해 많은 여성이 부작용을 경험한 것이다. 즉, 어떤 절멸은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이 초원을 걷겠다 마음먹으면 풀을 밟지 않고 어떻게 나아가겠어요?

  한편, 만신나루가 있는 월산 일대의 개발 제한이 풀려 ‘월산 플랜’이란 이름으로 관광지화가 추진된다. 지금껏 이곳이 개발되지 않은 까닭은 식량안보연구소 소장 ‘범선’이 월산 일대를 연구소 부지로 쓰겠다며 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범선은 20년 전, 다 타버린 땅에 자신의 기를 쏟아 싹을 틔우던 초원을 만난 뒤 만신나루를 지키려 분투했다. 그러나 연구 성과에 집착하는 생명공학자 ‘건미’가 정계를 등에 업고 범선의 자리를 빼앗는다. 건미는 마녀들이 식량 재앙의 유일한 해결책이라며 대중을 선동하고, 산에게 자신의 연구에 참여하라고 압박한다. 무한히 생장하는 신품종을 개발하려면 자연을 움직이는 마녀의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미의 말대로 마녀들의 희생이 인류를 행복으로 이끄는 지름길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마녀가 가진 힘은 소모될 뿐 다시 채워지지 않기 때문이다. 잠깐은 그 덕을 볼 수 있겠지만, 힘은 금세 바닥을 보이고 마녀들은 죽게 된다.

  소수의 사람을 희생양으로 삼아 재앙에서 벗어나겠다는 사고방식은 낯설지 않다. 중세 시대 남편이 없는 여성을 마녀로 몰아 재산을 몰수하고 가뭄이 든 땅에 무당의 손가락을 잘라 묻던 풍습처럼, 이 발상은 대상만을 달리할 뿐 역사 내내 반복됐기 때문이다. 우리는 마녀를 기후위기 속에서 조용히 죽어간 여러 존재에 비춰 볼 수 있다. 식량을 구하지 못해 민가에 내려갔다가 사살된 멧돼지와, 불법 포획에 목숨을 잃은 고래가 있다. 무리하게 지은 댐에 연어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데 실패하고, 수많은 물살이가 녹조 낀 강에서 죽어간다. 인류의 성장과 발전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일들이 꽃 한 송이, 풀 한 포기까지 남김없이 짓밟은 것이다. 책은 위기에 처한 마녀 공동체를 통해 묻는다. 존재조차 불확실한 초원을 걷겠다며 인간이 자행하는 학살과 파괴가 정당한지. 수많은 죽음 앞에 우리가 떳떳할 수 있는지.

그 애가 나보다 크게 자라는 걸 보고 싶어요.

▲개발로 나무가 뽑히는 모습 ©산호

  어디서도 초원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만신나루마저 사라질 수 있다는 생각에 산은 살아갈 의지를 잃는다. 한편, 만신나루 주민들에게 행정처분 통지문이 하나둘 도착한다. 산을 포섭하려는 건미의 계획이 마을 전체의 숨통을 조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모든 사태가 자기 탓에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된 산은 자신이 희생하면 끝날 문제라며, 텅 빈 눈으로 산에서 내려간다. 그때 산 앞에 초원을 닮은 아이, ‘동백’이 나타난다. 동백은 초원이 생을 다하기 전 낳은 아이로, 이제껏 범선의 손에서 자랐다. 초원의 영민한 얼굴과 긴 속눈썹을 빼닮고 색종이로 시들지 않는 동백을 만들 줄 아는 아이, 동백을 통해 초원은 말한다. 너랑 함께라면 다른 생을 살더라도 행복할 거야.

  동백을 알게 된 이상 산은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초원의 아이, 어쩌면 초원이 곁에서 살아 숨 쉬고 있기에, 산의 세상도 변해야만 한다. 모든 게 제 탓이라며 절망하던 산은 그제야 깨닫는다. 자신을 희생하고 모든 걸 포기하는 방식으로는 이 굴레를 끊어낼 수 없다는 것을. 결국 산은 생을 이어가기로 한다. 기꺼이 세상에 부딪히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파괴되는 세상의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은 쉽게 무력해지고 우울해진다. ‘기후우울’과 ‘생태불안’은 더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한 번 폭발한 두려움은 불면증부터 섭식장애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삶을 갉아먹는다. 행동해도 바뀌지 않을 거라는 짙은 체념과 무력감, 끝없는 분노와 슬픔 속에서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그러나 그 고통의 시간 끝에, 이대로 모든 걸 끝낼 수 없다며 자신이 느낀 것들을 들여다보고 그 너머로 향하는 이들이 있다. 극작가 모니카 라타지는 로르 누알라의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2023)에서 “세계와 개인의 상태가 연결되는 것이 중요한 열쇠”라며, “세계가 아프면 우리도 아프다는 것을 모든 사람이 이해할 때 조금은 더 나은 세상이 올 거”라고 말한다. 위기 속에서 느낀 것들을 변화의 단초로 삼자는 것이다. 깊게 절망해 본 이들은 차츰 산과 같이 사랑하는 것들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투사가 된다. 동물성 식품을 식탁에서 치우거나, 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는 피켓을 들고 농성장을 지키며. 때론 자신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이들의 곁에서 노래를 읊조리며. 그렇게, 아픔 위에 새로 터를 짓는다.

안 죽어. 이미 한 번 살아남아 봤잖아.

▲초원에게 안긴 어린 산 ©산호

  성난 시위대가 마을을 둘러싼 와중 동백이 아프기 시작한다. 산은 동백을 안고 사람들을 피해 도망친다. 겨우 나갈 길을 찾은 그들 앞에 기다렸다는 듯 건미가 나타난다. 산이 그를 지나쳐 입구로 향하던 중, 갑작스러운 화재로 모두가 고립된다. 마른나무를 타고 불이 끝없이 번지고 탈출구는 막힌 지 오래다. 그때 산의 눈앞에 불에 갇힌 이들이 보인다. 공사장 인부부터 시위대까지 나무에 깔려 가쁜 숨을 내쉬는 그들을 보며, 산은 20년 전 산불을 떠올린다. 나무에 깔려 죽는 줄로만 알았던 때, 재투성이가 된 초원이 어린 자신을 힘껏 껴안은 그날의 기억을.

▲20년 전 산불에서 산을 구해낸 초원 ©산호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산은 그러지 않는다. 20년 전 엄마를 앗아간 그 뜨거운 화염을 기억하기에. 사랑하는 이가 떠난 후 내내 잿더미 위에서 이어온 삶을 기억하기에.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와 관계없이, 누구라도 더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산은 불 속으로 뛰어든다. 산이 모든 기를 써서 만든 거대한 나무는 불씨를 잠재우고 모두를 살린다. 고작 타인을 구하려고 목숨을 내놓다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의 건미에게 산은 말한다. 이런 불구덩이 안에서는 그 누구도,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어. 산의 말이 활자를 넘어 귓가에 맴돈다.

▲불구덩이 속에서 건미를 향해 말하는 산 ©산호

  오늘날 지구를 불타게 한 세계자본주의에서 예외지대는 없다. 김현미 작가는 『우리는 지구를 떠나지 않는다』(2023)에서 다른 행성으로 떠나면 된다는 기술환상주의를 꼬집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내가 경험한 맥락 위에서, 내 삶의 장소에서 할 수 있는 걸 하면서, 내 집과 지구를 다시 살 만한 공간으로 만들어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혼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걸 아는 이들은 이미 대안적 세계를 일구고 있다. 자연에게 받은 것에 감사를 표하고, 물과 흙과 바람에 어우러져 살아가는 마녀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우리는 지구를 떠날 수 없다. 마음 편히 우주로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부와 명예를 가진 극소수에 불과하다. 로르 누알라는 『지구 걱정에 잠 못 드는 이들에게』에서 기후위기는 “한 사람의 일생을 놓고 봤을 때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느리게 진행되기 때문에 계속 우리 의식에서 멀어지고 어떤 반응이나 저항도 잘 끌어내지 못한다”고 썼다. 의식하지 않으면 자신도 모르는 새 거대한 파괴에 편승하기 쉽다는 것이다.

  결국, 지금 여기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인간과 자연은 외따로 생존할 수 없다. “세상에는 산 것보다 살아남은 것들이 더 많아”,  “그러니 우리는 서로를 돌봐야 해”라던 초원의 말을 떠올려 본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비와, 흙을 밀어내며 움트는 새싹까지, 세상에 당연히 존재하는 건 없다. 모든 생명은 수많은 관계망 속에서 뭔가를 주고받으며 살아남는다. 그러니 발전과 성장이 아닌 수선과 돌봄의 가치가 중요시될 때, 우리는 종간 경계를 뛰어넘어 서로를 살리고 돌보는 공생의 공동체를 꿈꿀 수 있을 것이다. 그 세상에서 산은 동백이 커가는 모습을 오래도록 지켜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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