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화장실은 단순히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시설이 아니다. 성별·장애·계층 등 집단의 차이에 기반한 물리적 경계가 존재하고, 특정한 몸과 정체성은 그 경계를 넘도록 허가받지 못한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목적과 조건을 탐색한 뒤, 서울대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가 발표한 ‘트랜스젠더 혐오차별 실태조사’에 따르면 트랜스젠더 40.9%가 성별정체성과 다른 성별의 시설을 이용하고, 39.2%가 화장실 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음료를 마시지 않거나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밝혔다. 37.2%가 멀더라도 남녀공용 또는 장애인 화장실, 인적이 드문 화장실을 이용했으며, 36.0%는 화장실 이용을 포기한 경험이 있다. 조사 결과는 화장실이 단순히 생리현상을 해소하는 시설이 아니라 공동체로부터의 환영 또는 배제를 암시하는 상징적 공간임을 보여준다. 화장실은 성별·장애·사회계층 등 집단의 차이에 기반해 물리적 경계를 설정하며, 특정한 몸과 정체성은 그 경계를 넘도록 허가받지 못한다.
따라서 화장실의 형태와 이름에 대한 관점은 결국 경계 짓기에 대한 믿음이며, 사회적 질서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강력한 성별이분법하에서 차별받고 배제되는 존재를 위해, 우리에게는 공적 공간을 평등하게 재구성하는 새로운 기획이 필요하다.

이때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한 가지 대안이 될 수 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현재의 화장실이 갖는 한계를 넘어 이용자의 성별을 전제하지 않고 누구나 자신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사용하도록 설계된 화장실이다. 이는 단순히 트랜스젠더뿐 아니라 기존의 성인·비장애인 중심적인 화장실 규범이 포섭하지 못하는 모든 존재를 위한 구상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규격 외부에 놓인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확장한다. 우리는 새로운 화장실을 상상하면서 젠더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엇이어야 하는지도 함께 상상할 수 있다. 젠더는 화장실 시설 개선과 같은 일상적 작업을 통해 지속적으로 협상의 장에 오르고 재정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운 화장실에 관한 상상은 어떤 몸이 체계적으로 배제돼 왔는지를 밝히고, 젠더에 관한 논의를 더욱 활성화할 것이다.

대만, 스웨덴 등 다양성을 중시하는 국가에서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 또는 성중립 화장실*이 보편적이나, 한국은 아직 이에 대해 충분히 논의하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도 모두를 위한 화장실 또는 성중립 화장실*을 만들고 운영해 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이들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목적과 조건을 탐색하고, 서울대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해 봤다.
*성중립 화장실 : 성적 지향, 성별정체성 등과 무관하게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화장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성별뿐만 아니라 장애, 연령, 어린이 동반 여부 등을 폭넓게 고려한다는 점에서 성중립 화장실보다 넓은 개념이다.
계절의 목소리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

이대역 부근에 위치한 카페 ‘계절의 목소리’는 개업 준비 때부터 성중립 화장실을 계획했다. 운영진은 공간을 찾는 모든 이가 안전하고 환대받는다고 느끼길 바라는 마음에서 두 개의 화장실을 각각 성중립 화장실과 여성 전용 화장실로 지정했다. 계절의 목소리 화장실 문에는 성별에 상관없이 누구나 사용할 수 있다는 메모가 붙어 있고, 표지판은 모두 점자로도 안내돼 있다.
성중립 화장실로 인해 곤란한 일이 벌어진 적 없냐는 질문에 ‘계절의 목소리’ 운영진은 전혀 없었다는 답변을 들려줬다.
자주 접하지 못했기 때문에 고객들이 익숙하지 않아 한다는 것은 느껴요. 성중립 화장실을 가리키며, 본인도 써도 되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꽤 많아요. 그럴 때마다 ‘네, 누구나 쓰실 수 있어요!’라고 안내해요.


계절의 목소리 성중립 화장실은 성중립 화장실은 공간과 고객에게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자리 잡고 있다. 운영진은 환한 얼굴로 성중립 화장실 사진을 찍어가는 고객과 긍정적인 블로그 후기들을 생각하며 늘 안전한 공간 기획을 위해 애쓴다고 전했다.
운영진은 건물의 물리적 구조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요구되는 조건을 충족할 수 없던 것을 아쉬워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변기와 세면대를 갖춘 개별적인 공간과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충분한 면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건물 구조상 1인용 화장실을 개조하기 어렵고, 화장실 통로에 턱이 있다. 이미 구축된 제한적인 환경을 차별 없는 공간으로 재설계하는 것은 늘 어려운 과제로 남는다. ‘계절의 목소리’는 장애인 화장실을 1층에 둬 별도 운영하는 것으로 문제에 대처하고 있다.
‘안전하다고 느낄 수 있는 공간’이 모든 동네에 자리하기를 바랐어요. 저희는 신촌·이대의 한 곳을 맡았다고 생각해요.
카이스트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화장실”
카이스트는 2019년부터 성중립 화장실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꾸준히 들려왔고, 교수, 카이스트 인권윤리센터 센터장, 행정 직원, 학부생과 대학원생 10명으로 구성된 카이스트 포용성위원회(포용위)를 중심으로 2022년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했다.

카이스트 학생·소수자인권위원회 소속 박혜수 씨는 카이스트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를 위해 추가 공사를 진행한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포용위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 학생정책처장, 카이스트 대학원 총학생회, 학부 총학생회 대표들과 논의하던 중, 전기및전자공학부와 전산학부가 함께 사용하는 IT융합빌딩의 몇몇 층에 여성 장애인 화장실이 없고 남성 장애인 화장실만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에 시설팀과 함께 남성 장애인 화장실을 모두를 위한 화장실로 바꾸는 작업을 진행했다. 카이스트 캠퍼스 지도에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남녀 픽토그램 대신 변기 모양으로 표시됐다. 카이스트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는 과정상의 어려움이나 특이한 사건 없이 순조로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카이스트는 2023년 중순 쏟아지는 민원과 항의를 맞닥뜨려야 했다. ‘학생학부모교사인권보호연대’가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성중립 화장실이라고 지적하며, 성중립 화장실은 공중화장실법 제7조*에 저촉된다는 요지로 온라인 국민 신문고와 유성구청에 항의를 계속한 것이다. 해당 건물은 공공시설이 아니라 카이스트 구성원의 연구를 위한 시설일뿐더러 모든 층에 기준을 만족하는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이 설치돼 있다고 설명해도 민원은 끊이지 않았다.
*일정 규모 이상의 공중화장실은 남녀화장실을 구분하여야 한다고 규정하는 법률
이에 카이스트는 “카이스트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보다 나은 국민의 편익 증진을 위해 기존의 공중화장실 기준에 더해 유아를 동반한 보호자, 장애인, 사회적 소수자, 임산부도 안심하고 편안하게 공중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1인 전용 화장실을 추가한 것”이라 밝히며 “편익이 크게 증대되고 이로 인해 침해되는 공익은 거의 없다”고 답변했다. 이후 학교에 법적인 시정명령이 도달한 적은 없다.
박혜수 씨는 추후 개선점으로 관리 및 문제에 대한 가이드라인, 불법 촬영 단속, 위험 신고 장치를 언급하며 성중립 화장실의 위험성에 대한 공포가 “한국 사회에서 많은 여성이 느끼는 불법 촬영이나 침입의 공포를 떼놓고 논의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적극적으로 민원을 넣고 항의하는 단체가 대부분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둘러싼 오해와 공포에는 성소수자 혐오가 크게 작용한다는 점 역시 지적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차별 없는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자리 잡아야 하는 것이다.
단독주택이나 아파트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거주지에서 당연하게 성중립 화장실을 사용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의 화장실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회대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


성공회대의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넓은 공간 전체가 일반 화장실 한 칸처럼 구성됐다. 음성지원과 자동문, 점자블록, 각도 거울 등 장애인을 고려한 편의 기능을 갖췄으며, 유아용 변기 커버와 기저귀 교환대, 응급 월경대, 소형 세면대, 접이식 의자, 외부 비상 통화 장치 등도 구비돼 있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성공회대가 관리하는 시설로, 모든 화장실에 공통으로 진행하는 불법 촬영 탐지 이외에도 다양한 잔고장에 신경을 기울인다. 단순히 설비를 관리할 뿐 아니라 교외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소개하는 것 역시 성공회대가 진행하는 모니터링 절차 중 하나다.
국내 대학 최초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한 성공회대는 비교적 지난한 과정을 거쳤다. 성공회대 인권위원회 소속 최보근 씨에게 구체적인 설치 과정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2016년 성소수자 모임 ‘메인’이 성중립 화장실의 필요성을 제기했고, 2017년 3월 총학생회가 이를 공약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설치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진 않았다. 성중립 화장실 TF(태스크 포스)가 꾸려졌지만, 협소한 개념인 성중립 화장실 대신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새롭게 요청됐다. 학내에서 여러 논의를 거쳐 2021년 총학생회 비상대책위원회를 중심으로 ‘모두의 화장실 공동대책 위원회’가 따로 꾸려지며, 비로소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가 재추진됐다. 그 결과 가장 크고, 유동인구가 많고, 상징성이 큰 건물인 새천년관에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설치됐다.


성소수자 모임 ‘음란’은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음란은 학생들 간 합의를 위해 ‘모두의 화장실 대토론회’를 열어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 취지에 대한 공감대를 확인하는 동시에 설치 과정에 대한 걱정을 해소했다. 또한 음란은 총장실 점거 시위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성소수자가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한 교육권이자 생존권임을 주장하고 모두를 위한 화장실 설치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 외에도 유동인구가 많은 길목에 ‘화꾸(당신이 모두의 화장실을 꾸며 보세요)’ 패널을 설치하거나 전단을 배포하는 등 많은 노력을 들였다.
최보근 씨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해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최 씨는 분리된 공간이 안전을 담보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여성의 불안감은 성차별적 구조에서 발생하는 성폭력 문제에 사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결과라고 말했다. 여성의 불안감이 개인적 문제가 아니듯, 성별 분리 화장실 앞에서 소수자가 느끼는 불안감과 차별 역시 개인이 극복해야 할 문제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최 씨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둘러싼 자극적인 보도와 오해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필요한 사람들의 안전도 위협받게 되고, 우리가 진짜로 봐야 할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문제들이 발생”하는 상황을 염려했다.
최보근 씨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설치하기 전에 고려해야 할 점으로 모두를 위한 ‘더 적합한’ 화장실을 언급했다.
기본적으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형태가 정해져 있는 화장실보단 계속 변화하는 일종의 개념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시대가 바뀜에 따라서 모든 화장실의 형태도 발전돼야 하고, 설치된 공간의 특성에 따라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의 모양이 많이 바뀌기도 해요. 그래서 설치 전에 해야 할 것은 이 공간에 어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적합한지를 고민해 보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최보근 씨는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기본적으로 성중립 화장실이라는 이유로 항의 전화를 많이 받지만, 1인용 화장실이라는 점이 더 많이 조명받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위험한’ 화장실이라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모두가 존중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최 씨는 “설치하는 분들이 ‘당신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학교 구성원들을 위한 화장실을 설치하는 거다’라고 훨씬 더 단호하게 대처하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그리고, 서울대

2023년 서울대가 증개축을 앞둔 문화관 설계도에 성중립 화장실을 포함한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시설관리과에 확인한 결과 오보로 밝혀졌다. 아직 성중립 화장실 설치 계획은 없다. 그러나 서울대 역시 모두를 위한 화장실에 대한 계획을 수립할 필요가 있다. 서울대는 많은 건물, 그것보다 더 많은 화장실을 가진 국립대학교이며, 다양한 몸과 정체성을 포용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참아야’ 하기 때문에 유발되는 생리적 질병에서부터 성별 분리 화장실의 안전을 판단하느라 겪는 정신적 고통에 이르기까지, 기존의 화장실에 포섭되지 않는 존재가 겪는 다양한 문제를 고려할 때 이러한 접근 방식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아직 서울대에는 참고할 만한 모델이 부족하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을 보유한 대학이 너무 적고, 그들이 서울대와 같은 상황에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정책과 절차에 변화를 일으킨 사례로부터 많은 것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학생이 포함된 건의 주체, 합의에 이르기까지의 지난한 회의, 인식 개선 프로그램과 시범 도입 등.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어떤 구조의 공간인지 확인하고 이용해 보는 시범 사업을 통해, 시설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 사회적인 인식을 개선할 수 있다. 또한 모두를 위한 화장실이 역설적으로 차별의 공간으로 작동하지 않도록 고민을 이어나가야 한다. 아웃팅* 방지를 위해 적어도 한 층에 있는 화장실은 동일한 구조로 설치하는 등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웃팅(outing): 성소수자의 성 정체성 혹은 성적 지향을 본인 동의 없이 밝히는 행위
이러한 변화는 한 번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며, 앞선 사례처럼 건물 구조의 방해와 반대 세력의 민원, 지난한 설득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의 경계를 바꾸는 작업은 복잡하지만 불가피한 일이다. 우리는 누구도 배제하지 않는 화장실을 상상해야 하며, 서울대 역시 변화함으로써 이 상상이 퍼져나가는 데 참여해야 한다.
가장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하자. 서울대 83동 1층은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로 향하는 길을 각각 파란색과 분홍색 블록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 길목에 자리한 장애인 화장실에는 성별 구분이 없다. 이는 성별 규범을 강화하고, 장애인을 무성적 존재로 취급하는 셈이다. 우리는 이곳의 장애인 화장실을 모두를 위한 화장실로 변경하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를 위한 화장실은 도달해야 하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누구도 배제되지 않는 안전한 캠퍼스를 위해 화장실을 어떻게 의미화하고 재구성할지 계속해서 상상해 나가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