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맡아 적으며 편집이란 단어를 골똘히 바라보게 됩니다. 이 지면을 읽고 계실 당신이 만약 〈서울대저널〉의 편집실을 모른다면, 그곳은 누추한 곳이라고 설명해 주고 싶습니다. 닳은 의자와 부스러기 묻은 탁자, 쌓인 과월호와 굴러다니는 잡동사니들로 발붙일 데가 마땅찮은 곳입니다. 화요일마다 회의를 하러 모인 기자와 PD들이 부려놓은 몸과 말로 낡아가는 장소입니다. ‘집실’이라고 줄여 부르는 애칭이 정말 집 실(室)을 연상케 하듯, 이곳을 거쳐간 이들의 때를 고스란히 타 온 집입니다.
대학언론 편집실은 저마다 다른 풍경이겠지만, 열띠게 신문 또는 책을 만든다는 점에선 엇비슷할 것 같습니다. 책은 관념이 아니라 물질이라서, 편집은 우리가 말하려는 바를 어떻게 유한한 시간과 유한한 지면 안에 잘 담아낼지 궁리하는 모든 과정입니다. 만일 기사를 떠올리고 쓰는 것도 편집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글을 적을 때부터 그것을 긋고 묶고 자르고 덧붙일 때까지 우리는 한계와 형식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습니다. 지면. 마감. 비용. 편집은 너무나 유한한 행위입니다.
하지만 189호를 지나오고 190호의 총괄을 맡으면서, 저는 스스로가 편집의 주체인지 객체인지 헷갈리곤 했습니다. 편집이라는 행위 속에서 수정되는 건 책뿐 아니라 저 자신 같았으니까요. 〈서울대저널〉에서 글을 쓰고 한 호를 엮어가는 시간 속에서 너무나 많은 걸 느끼고 배우고 바뀝니다. 다른 기자들도 마찬가지일까요. 보고 쓰고 서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우리는 달라지고, 그 글을 종이 안에 담으려고 한 새로운 시도에 따라 〈서울대저널〉 역시 달라집니다. 우리는 매 순간 편집하면서 동시에 편집됩니다.
올해 서른 돌을 맞아 열린 〈서울대저널〉 홈커밍* 행사에서, 선배 기자와 PD들은 〈서울대저널〉 활동으로 변화한 각자의 삶을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스레 저 역시 이후의 자신을 상상했습니다. 지금 이 시간이 틀어놓은 삶의 각도가 아주 미세할지라도, 그 어긋남의 방향대로 직선을 쭉 이어볼 때 그건 얼마나 돌이킬 수 없이 큰 변형이었을지. 또한 그 미래의 순간에 매만진 미래의 〈서울대저널〉은 얼마나 또 달라져 있을지.
*홈커밍(home-coming) : 조직의 존속을 축하하기 위해 이전 구성원들이 방문하는 자리
편집은 유한한 행위지만, 그 순간을 통과한 사람들과 그들로 이뤄진 집단은 동시에 무한한 편집을 경험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잠시 이 지면에 머물다 가지만, 동시에 앞으로 이 지면을 맡을 수없는 사람과 이어질 〈서울대저널〉을 상상합니다. 한순간과 끝없음은 이토록 뒤엉켜 있네요. 우리가 편집한 이번 호가 세상 역시 조금이나마 편집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가 편집하고 편집되는 모든 곳이 편집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