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고들 한다. 억겁의 세월이 지나 새로이 도래한 세상은 이전과 다를 것이라고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다. 그러나 정말 모든 이가 따스한 봄빛 아래 오늘을 살아가고 있나.
4월 4일 헌법재판소는 윤석열을 파면했다.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기쁨에 가득 차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끝없는 환호로 달뜬 분위기 속에서 참았던 눈물을 훔치는 이들이 있었다. 보라색 점퍼를 입은 이태원 참사 유가족이었다. 2022년 10월 29일, 이태원에 국가는 없었다. 특별법은 대통령의 거부권에 번번이 막혔고 희생자와 유가족은 끊임없는 폄훼와 모욕에 시달려야 했다.
며칠 뒤인 4월 7일은 제주항공 여객기 참사 100일이었다. 유가족 179명은 여전히 무안국제공항을 떠나지 못하고 텐트에서 밥을 먹고 잠을 청한다. 불편한 잠자리엔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이들이 정말 두려워하는 건 참사가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이다.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기도 전에 활주로에 매달린 리본이 바래는 것이다. 여전히 어떤 슬픔은 현재 진행형이다.
사회적 참사를 기억하고 애도하겠다는 말은 슬픔과 함께 오늘을 살아가겠다는 뜻이다. 누군가를 죽게 한 사회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비슷한 아픔을 겪는 이가 없도록 애쓰겠다는 결의다. 그 투쟁의 선봉에 선 이들이 있다. 재난 참사의 국가 책임을 강조해 온 세월호 유가족이다.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 11주기였다. 반복되는 아픔과 그럼에도 변한 것들을 헤아리며, 서울시의회 앞 기억공간부터 팽목항까지 세월호 참사의 궤적을 따라갔다.

여전히 누군가는 싸우고 있다
서울시의회 앞에는 ‘기억과 빛’이란 이름의 작은 집이 있다. 기억과 빛은 2014년 광화문광장에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부르짖던 유가족들의 천막에서 시작됐다. 2019년 4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외치며 곡기를 끊고 촛불을 든 이들의 투쟁터에는 천막 대신 기억공간이 들어섰고, 유가족들은 이곳에서 묵묵히 리본을 만들고 피켓을 들었다.
기억공간의 수난은 2021년 7월 서울시가 광화문광장 재구조화 공사를 이유로 철거를 통보하며 시작됐다. 유가족들은 기억공간이 시민의 것이라며 거듭 항변했으나, 서울시는 “새로운 광화문광장은 어떤 구조물도 설치하지 않는 열린 광장”이기에 기억공간을 설치할 수 없다고 못박았다. 결국 시작된 공사에 서울시의회 앞으로 자리를 옮겨 버티길 2년, 11대 서울시의회가 들어서며 기억공간은 다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서울시의회가 부지 사용기간 연장을 반려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가족과 시민들은 2023년 5월부터 기억공간 존치를 위한 1인 시위를 시작했다.
3월 27일, 피케팅(피켓 시위)을 신청한 후 향한 기억공간은 환히 불을 밝힌 현판 덕에 멀리서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구석에 놓인 테이블엔 누군가 만들다 만 듯한 리본과 열쇠고리가 쌓여 있었고, 그 옆엔 세월호 선체 모형과 각양각색 리본이 놓여 있었다. 아리셀 중대재해 참사의 하늘색 리본, 가습기 살균제 참사와 오송 지하차도 참사의 녹색 리본, 스텔라데이지호 참사의 주황 리본, 이태원 참사의 보라 리본, 그리고 세월호 참사의 노란 리본. 또 한 번의 참사가 발생할 때마다 누군가는 이곳에 새로운 리본을 채워 넣었을 것이다.
시간이 되자 동그란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나타났다. 피케팅을 하러 왔다고 말하자 그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책임자 처벌 생명존중 안전사회를 원합니다’라고 쓰인 피켓을 건네고 대로변 쪽으로 기자를 이끌었다. 그리곤 “막말하는 분들이 가끔 있는데 반응하지 말아요”라며, “나도 뒤에 있을 거고 옆에 친구도 있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자리를 떴다. 강풍주의보가 내린 날이었다. 멈추지 않고 부는 바람에 피켓을 잡은 손끝이 얼었고 한곳에 가만히 서있자니 몸이 덜덜 떨렸다. 발을 동동거리며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했다.
그렇게 한 시간을 서 있었다. 퇴근하는 직장인부터 캐리어를 끄는 관광객, 반바지를 입고 내달리는 무리와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가르는 이들이 지나갔다. 세찬 바람에 앞으로 넘어지려는 피켓을 겨우 붙잡으며,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기억공간에 들르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다. 대개는 피켓을 흘끔 보곤 다시 갈 길을 갔으나 가끔 주먹을 불끈 쥐며 힘내라는 사인을 보내거나 고갯짓으로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있었다. 시침이 한 바퀴를 돌고 나서야 피켓을 챙겨 기억공간에 들어갔다. 난로 앞에 앉자 몸이 금세 노곤해졌다.
해가 났다가도 금세 눈이 내리는 예측할 수 없는 날씨 속에서, 그만할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찬바람에 몸을 떨다가 작은 난로에 손을 녹이지 않을 수 있다면 좋을 것이다. 날이 너무 춥고, 사람들은 대개 피켓을 볼 시간 따윈 없다는 듯 걸음을 재촉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계속 피켓을 든다. 벽을 가득 채운 수많은 얼굴을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억공간 안쪽엔 희생자들의 사진이 담긴 액자가 나란히 걸려있다. 사진 속 사람들의 생을 헤아리다 보면 자주 아득해진다. 교복을 입고 은은한 미소를 띤 이들의 얼굴이 너무 앳돼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에겐 마음 깊이 두려움이 솟아오르는 날 도망칠 곳이 있었을까. 급식이 맛없는 날이면 하교 후 먹을 떡볶이를 기대했을까. 2014년 4월, 햇볕이 내리쬐던 교실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을까. 질문을 품고 안산으로 향했다.

과제: 꼭 돌아오기
4월 1일, 수업을 마치고 카메라를 챙겨 지하철역으로 달렸다. 고잔역은 4호선 맨 끝이다. 꾸벅꾸벅 졸며 금정역과 산본역을 지나자 차창 밖으로 논밭과 비닐하우스가 보였다. 역사에서 조금만 걸으면 단원고 4.16기억교실(기억교실)이 보인다. 기억교실은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 250명과 교사 11명이 생활했던 교실과 교무실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 공간으로, 현재 경기도교육청 4.16생명안전교육원 안에 있다.
입구에서 방명록을 작성하고 유의사항을 들은 후 3층으로 올라가면 노란 조끼를 입은 해설요원을 만날 수 있다. 참사 유가족이기도 한 해설요원의 안내에 따라 복도와 교실을 차례로 둘러봤다. 교실 문을 열자마자 펼쳐진 장면에 잠시 숨을 멈췄다. 너무 많은 빈 책상. 희생자들의 사진과 꽃이 올라간 책상들. 공간을 채운 상실의 크기는 희생자 수 이상의 것이었다. 4월 14일 이후 빗금이 그어지지 않은 식단표, 필기구가 가지런히 든 캐릭터 필통, 빛바랜 시간표와 유인물들. 교실 앞 게시판엔 방과후학교, 알림 자료, 오늘의 식단을 알리는 게시글이 붙어있었다. 그 공간에 기억이 있었다. 희생자라는 말에 전부 담길 수 없는 뜨겁고 생생한 삶들이 그곳에 있었다. 종이학과 종이배, 칠판을 가득 메운 글과 영원히 시들지 않을 뜨개꽃. 그날 이후 작은 화이트보드에 꾹꾹 눌러 썼을 말, 과제: 꼭 돌아오기. 보고 싶다는 말을 아무리 적어도 부족한 칠판이 있듯이, 기억하겠다는 말을 아무리 반복해도 모자랄 세월이 있다.

누군가의 자녀이자 형제, 친구였을 그 모든 몸의 기억이 이 자리에 머물기까지 고된 투쟁이 있었다. 참사 발생 7개월 후인 2014년 11월, 단원고 재학생 학부모들은 긴급총회를 열어 희생자 교실 정리를 요구했다. 이에 유가족들은 기억교실 존치 투쟁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신입생들에게 교실을 돌려달라는 요구는 갈수록 커졌고, 결국 기억교실은 2016년 8월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이전했다. 그러나 옮겨간 곳에서 희생자들의 물품이 방치되며 유가족들은 교실 보존에 쓸 예산을 받기 위해 싸워야 했다. 2021년 4월 정식 개관까지 온전한 복원을 위해 땀과 눈물을 흘려온 이들이 있다. 이후 ‘단원고 4.16기억교실’은 국민적 기억공간으로서 가치를 인정받아 2021년 12월 국가지정기록물 제14호로 지정됐다.
복도를 걷다가 희생자들에 관해 알려주는 키오스크를 마주쳤다. 화면 속 밤하늘엔 ‘아빠의 보물’, ‘빵집 운영’, ‘자동차 공학박사’ 등 수많은 별이 빛난다. ‘연구원’을 누르면 연구원이 꿈이었던 희생자의 이야기가 뜨는 식이다. 수많은 꿈을 보는데 까슬거리는 노란 목도리가 자꾸 턱 밑을 간질였다. 목도리를 만지작거리다 턱 끝까지 차올랐지만 끝내 내뱉지 못한 것들을 떠올렸다. 제대로 울기도 전에 아이들의 흔적을 지우려는 시도에 맞서야 했던 이들의 뜨거운 목울대를, 충분히 아파할 시간도 없이 교실을 지키는 싸움에 나서야 했던 먹먹한 마음을. 그리하여 흐르는 세월 속 투사가 된 이들을, 생각했다.

흐르는 시간을 살아내기
기억교실을 나와 길가를 걷는데 자꾸 노란 것들이 눈에 밟혔다. 줄지어 핀 개나리,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한 산수유, 노란 카디건을 입은 어린아이.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벼워지고 옹송그렸던 생명이 하나둘 기지개를 켜는 4월이다. 기억교실 이전 후 단원고에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 ‘노란고래의 꿈’이 세워졌다.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한 그 고래를 본 건 목련나무 덕이었다. 활짝 핀 목련을 가까이서 보려고 샛길로 빠졌는데 그곳에 단원고로 향하는 계단이 있었다. 문이 잠겨 울타리 사이로 힐끔 본 고래는 빛을 받아 늠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단원고 담벼락을 따라 이어지는 ‘소중한 생명길’은 2015년 마을 공동체가 참사를 기억하고자 만든 장소다. 벽에는 웃고 떠드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 아이들은 나무 그늘을 거닐거나 벤치에 앉아 친구들과 떨어지는 낙엽을 본다. 졸업식 날 꽃다발을 들고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이들의 왼쪽 가슴엔 하나같이 노란 리본이 달려 있다. 살아내지 못한 미래와 계속될 현재가 모두 이 길에 있다.
11년 전과 오늘은 결코 같을 수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란 수많은 아이가 한순간에 떠난 세월호 참사는 마을 전체에 크나큰 슬픔을 안겼을 것이다. 상실에 빠진 마을 공동체의 모습이 어땠는지, 기자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아이들이 뛰놀던 체육관에 임시분향소가 설치됐을 때, 소리 내 부르던 이름을 위패로 마주할 때, 더는 재재거리며 하교하는 뒷모습을 볼 수 없을 때, 세상은 전과 같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시간은 흐른다. 당시 열여덟이었던 생존 학생이 20대 후반이 되기까지, 변했거나 변하지 않은 것들을 본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이 신발주머니를 돌리며 분식점으로 향하고, 다가올 모의고사가 걱정인 고등학생은 한숨 섞인 발걸음으로 학원에 간다. 참사 이후 트라우마에 시달리던 아이는 ‘운디드 힐러(wounded healer)’라는 이름으로 자신과 비슷한 아픔을 가진 이를 보듬는다. 자그마치 11년이다. ‘세월호’란 단어가 한국 사회에 남긴 무게를 되새겨 본다. 매년 4월이면 사람들의 SNS 프로필이 노란 리본으로 바뀌고, 오늘도 누군가는 기억교실을 향해 걷는다. 영영 이어질 기억의 여정이다.
훼손된 약속
이어 화랑유원지로 향했다. 화랑유원지는 안산 주민이라면 한 번쯤 나들이 갔을 법한 화랑 호수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공원이다. 산책하는 사람들을 지나쳐 호수 끝으로 가니 생명안전공원 공사장이 나왔다. 이곳에 참사 희생자들의 봉안시설을 비롯한 추모공간과 문화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벽을 따라 걸으며 공원의 규모를 가늠해 봤다.

완공된 공원의 모습을 그려보던 중, ‘세월호 유가족 살자고 안산 시민 다 죽이는가’라고 쓰인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건너편 빌라에는 ‘세월호 납골당 결사반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생명안전공원을 둘러싼 갈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2015년 정부는 세월호특별법에 따라 추모공원 조성을 추진했고, 안산시는 부지 결정을 위한 시민 토론회를 열었다. 유가족과 시민단체는 희생 학생들이 자라고 뛰놀던 화랑유원지에 추모공원을 지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각에선 봉안시설이 들어오면 땅값이 떨어진다는 말이 나왔다. 의견 대립이 이어지던 중 2018년 안산시가 화랑유원지를 부지로 선정하며 갈등이 격화됐고, 반대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2024년 완공 예정이던 생명안전공원은 정부와 지자체의 소극적인 움직임으로 착공이 미뤄져 2월 13일에야 겨우 첫 삽을 떴다. 추모 시설을 만들자는 것뿐인데 어느 하나 순탄한 게 없다. 이는 유가족이 겪은 어려움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큰 배
4월 5일 오전 9시,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기자는 용산역 롯데리아 한쪽에 자리를 잡고 감자튀김을 입에 쑤셔 넣으며 과제를 하고 있었다. 출발 5분 전까지 길을 못 찾아 역사를 빙빙 돌다가 떠나기 직전에 간신히 기차에 탑승했다. 늦게 예매한 탓에 표가 없어 통로에 대충 앉았는데, 설상가상으로 충전을 까먹어 휴대폰이 방전 직전이었다. 결국 걱정을 한가득 안은 채 또 한 번의 기억 순례를 떠났다.
오후 2시, 목포역에 도착했다. 하루에 일곱 번만 운행하는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급하게 목포신항으로 향하는 택시를 잡았다. 그곳에 세월호가 있었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렇게 크고 녹슨 배는 처음 봤기 때문이다. 출입증을 받고 펜스를 따라가면 곳곳에 묶인 노란 리본이 보인다. 리본 사이로 걸린 인형이 바람에 흔들렸다.

세월호를 봤다, 아주 가까이에서. 너무 크다. 정말 너무 크다. 창문은 거의 보이지 않고 배 전체가 심하게 녹슬어 있었다. 하단부는 부서졌고 ‘SEWOL’이란 글자 사이로 녹물이 흘러내렸다. 이 배에 476명이 타고 있었다. 그중 304명이 별이 됐고, 5명은 아직도 돌아오지 못했다. 바람이 불자 묶인 리본들이 서로 부딪혀 소리를 냈다. 펜스에 매달려 그 너머로는 나아가지 못하는 리본. 매섭게 흔들리는 리본이 마치 날지 못하는 새 같기도, 날개를 마구 파닥이는 나비 같기도 했다.
2014년 침몰한 세월호는 정부가 기약 없이 약속을 미룬 탓에 2017년에야 심하게 훼손된 채 뭍으로 올라왔다. 그사이 유가족은 광화문광장에서 삭발식을 열고 인양을 요구했다. 빗물이 고인 땅 위를 걸을 때마다 발밑에서 찰박이는 소리가 났다. 펜스 근처엔 쓰레기가 방치돼 있었다. 정부는 2029년까지 추모 시설을 완공해 선체를 영구 보존하겠다고 했지만, 그때까지 배가 비바람을 견딜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숨은 리본 찾기
허무한 마음을 뒤로하고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는데 문 쪽에 뭔가 어른거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크게 떴다. 노란 리본이었다. 대문짝만한 리본이 면허증 옆, 버스 맨 앞에 떡하니 붙어있었다. 버스에 탄 승객 모두가 고개를 들면 바로 볼 수 있는 곳에 별다른 메시지 없이 리본만이 붙어있었다. 그것이 시작에 불과했다는 걸 목포 시내를 거닐며 알았다. 수석전시관 옆 계단에서, 헤어살롱 유리문 위에서 리본은 예고 없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다, 미용실에 가다, 길을 걷다 우연히 노란 리본을 마주쳤을 것이다. 그로부터 세월호 참사를 떠올렸으나 그 순간은 엄숙함과 비통함으로 다 설명되지 않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녹아들었다. 기자는 마치 유물을 발굴하는 고고학자가 된 기분으로 주위를 유심히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목포에서의 첫날 밤이 저물었다.

우리는 함께 바다를 바라봤다
악몽을 꿔 이른 새벽 눈을 떴다. 하루에 한 번 운행하는 버스를 놓칠까 불안했던 탓이다. 팽목항에 가려면 목포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진도로 이동해야 한다. 졸다 깨기를 반복하다 팽목항에 도착했다. 커다란 리본 조형물 아래엔 ‘그날의 기억! 책임! 약속!’이란 문구가 쓰여 있었다. 11년 전 이곳에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바다에서 세월호가 침몰했다. 팽목항은 희생자들의 유해가 수습되고, 참사 이후 미수습자 가족들이 오랜 기간 머무른 곳이다. 저 멀리 ‘기다림의 등대’와 ‘하늘나라 우체통’이 보였다. 가까이 가 보니 자물쇠는 녹슬었고, 리본은 올이 다 풀린지 오래였다.

한참 동안 바다를 바라보던 기자에게 한 중년 남성이 다가와 향을 건넸다. 집에서 챙겨온 것이라 한다. 가느다란 향이 끝에서부터 조용히 타들어갔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바다 쪽으로 향을 태웠다. 오씨 성의 60대 남성인 그를 오 선생님이라고 부르겠다. 팽목항에 처음 온 오 선생님은 자연히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2014년 4월 16일, 전원구조라던 뉴스가 오보임을 알았을 때의 심정을. 다 구조된 줄 알았는데 오보라고 떠서 마음이 너무 아팠어요. 그리고 이어진 긴 정적. 딱 그만한 딸이 있던 오 선생님에게 세월호 참사는 남의 일이 아니었다. 우리는 ‘기다림의 의자’에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던 4월 16일을,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목도리를 칭칭 두르고 나간 광장을, 주머니 속 손난로를 만지작거리며 촛불을 쥐었던 그 모든 기억을. 나의 이야기만은 아닐, 그날 이후의 시간에 관해.
이어 우리는 ‘세월호 팽목기억관(기억관)’으로 향했다. 진도여객터미널 인근에 위치한 기억관 벽은 희생자들의 사진으로 가득 차 있다. 한쪽엔 분향을 위한 향이 준비돼 있었고, 누군가 방금 다녀간 듯 사진 아래 황도와 음료수가 놓여 있었다. 문 앞 테이블엔 노란 리본과 방명록이 있었다. 기억관 밖엔 ‘거짓은 참을 이길 수 없다’, ‘진실은 침몰하지 않는다’ 등의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그 당연한 말을 다시금 읊조렸다. 여전히 세상엔 당연해야 하는 것들이 당연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참사의 원인을 밝혀내고 애도를 이어갈 곳을 마련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기억관 역시 2022년까지 불법건축물로 분류돼 강제 철거 위기에 처했었다. 진도군이 연안여객선터미널 신축을 추진하며 기억관 부지를 비우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다. 이에 유가족과 시민단체는 팽목항이 지닌 상징성을 지켜야 한다며 강하게 반발했고, 결국 2024년 진도군이 기억관 부지를 제공하겠다며 시민단체의 요구를 일부 수용했다. 이조차 유가족과 시민단체의 싸움 없인 불가능했겠다는 생각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기억관에서 나와 밥을 사주겠다는 오 선생님의 차에 올랐다. 해남까지는 차로 약 한 시간이 걸린다. 오 선생님과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진도와 목포를 지나 해남으로 향했다. 그는 이야기보따리를 천 개쯤 가진 것 같았다. 딸과 새만금 삼보일배에 나선 이야기, 전업주부를 자처해 매일 밥상을 차린 이야기, 제주도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이야기 등 시시각각 변하는 차창 밖 풍경처럼 다채로운 그의 인생사가 펼쳐졌다. 우리는 차를 타고 가다 식당이 보이면 내려서 밥을 먹었고, 해남에서 제일 큰 절인 대흥사에 가 흔들리는 풍등을 구경했다. 오 선생님은 세상의 좋은 것을 알아보는 방법을 아주 많이 가진 사람처럼, 아름답고 신기한 게 있으면 저길 보라며 가리키기 바빴다. 그러면서도 그는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았다.
마지막 행선지는 남도 끝자락의 내동마을이었다. 너무 예뻐서 꼭 보여주고 싶었다던 내동바다는 물이 빠져 반쯤 뻘이 드러나 있었다. 그의 말마따나 아름다운 바닷마을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아래 윤슬이 내려앉았고, 다닥다닥 붙은 집을 따라 걷다 보면 수다를 떠는 할머니들을 볼 수 있었다. 딸이냐는 동네 할머니들의 말에 넉살 좋게 웃어 보이며 해안선을 따라 걸었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곳에서 오 선생님은 말했다. 팽목항에 가기까지 11년이 걸렸노라고. 가겠다고 마음먹는 일부터 참 힘들었는데 오늘에서야 가능했다고. 참 긴 시간이었다고.
기억관에서 수많은 희생자의 사진을 맞닥뜨리곤 땅으로 꺼질 듯 깊은 한숨을 내쉬던 그를 떠올렸다. 아침 일찍 일어나 커피를 내리고 향을 챙겼을 그의 시간을 생각했다. 그러자 눈앞의 아름다운 바다가 세월호가 침몰한 진도 앞바다와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 뇌리에 들어찼다. 동시에 이번 기억 순례에서 만난 이들을 떠올렸다. 찬바람을 맞으며 함께 피켓을 들었던 동지, 기억교실 입구에서 따뜻하게 맞아주던 해설요원, 그리고 오 선생님까지, 바다의 무서움과 광활함을 모두 아는 이들일 테다. 세월호 참사를 끝끝내 알려 망각의 두려움에 맞서겠다고 다짐한 이들일 테다. 어떤 참사는, 이렇게 기억된다.

방학엔 오 선생님을 만나러 친구들과 해남에 내려갈 것이다. 우리는 팽목항에 방문하거나 목포에 들러 세월호 선체를 함께 볼 수 있을 것이다. 가방에 묶어둔 노란 리본은 나풀거리고, 그에 맞춰 ‘remember 0416’이 쓰인 팔찌가 손목에서 달랑거릴 것이다. 노란 꽃과 나비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떠나간 이들을 떠올릴 것이다. 어느새 그들의 나이를 훌쩍 넘어 어른이 된 우리는 이제야 안다. 열여덟이 얼마나 어리고 무궁무진한 나이인지. 과거의 아픔을 기억하지 못하는 공동체에 더 나은 미래는 없다. 11년이 흘렀다. 우리의 약속은 여기서 새롭게 시작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