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과학부 교수 성추행 사건
인간을 위해 죽어간 지상의 생명체에게 바치는 영화
시흥캠퍼스 논의, 어디까지 왔나

인간을 위해 죽어간 지상의 생명체에게 바치는 영화

‘고기’란 단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며 불판 위에 놓인 고기가 생각날 수도 있고 화려한 조명 아래 선홍빛을 띠며 깨끗하게 포장된 형태가 떠오를지도 모른다.하지만 고기를 ‘동물의 시체’로 의식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일상에서 고기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생각하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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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기’란 단어를 보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를 풍기며 불판 위에 놓인 고기가 생각날 수도 있고 화려한 조명 아래 선홍빛을 띠며 깨끗하게 포장된 형태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기를 ‘동물의 시체’로 의식해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일상에서 고기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것이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생각하기는 어렵다. 현 사회는 우리에게 포장된 고기만을 보일 뿐이며, 우리는 어릴 적부터 고기를 자연스럽게 먹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감독 숀 몬슨은 이 상황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에 반기를 든다. 그는 영화를 통해 육류, 해산물, 가죽, 모피 등 다른 생명들의 신체 일부가 어떤 과정을 거쳐 우리의 주변에 오게 됐는지를 보인다. 영화는 실제 촬영한 장면들을 여과 없이 제시하며, 각 장면은 보는 이에게 충격을 안긴다. 하지만 감독은 이 땅의 모든 생명들, ‘Earthlings’를 위해 불편한 시간을 잠시만 내줄 것을 부탁한다.

억압받는 동물들, 이들은 우리와 멀리 있지 않다

 영화는 시작과 함께 당부의 말을 전한다. 

“지금부터 보실 장면은 특정 지역만의 사례는 아닙니다. 

동물들이 애완용으로, 또는 식용이나 의류 제작을 위해 길러질 때, 

실험용이나 오락용으로 이용될 때 업계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다소 충격적인 장면들이 포함되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영화는 애완동물, 식용동물, 가죽과 모피를 제공하는 동물들이 경험하는 고통을 그대로 보인다. 애완동물은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태어나고, 더 이상 즐거움을 제공하지 못하는 경우 버려진다. 애완동물을 생산하기 위해 수많은 동물들이 불결한 철장에서 끊임없이 출산한 뒤 폐사된다. 주인에게 버려진 동물들은 길거리를 떠돌다 죽거나, 보호소에서 안락사나 가스사로 죽음을 맞이한다. 

 식용동물은 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 고기가 되기 위해 죽는다. 생후 이틀이 채 되지 않은 송아지들의 목엔 줄이 걸린다. 이는 근육의 발달을 막아 송아지가 좋은 고기가 되도록 돕는다. 송아지는 햇빛을 보지 못하며 물을 마시지도 못한다. 수소들은 태어나자마자 거세된다. 부드럽고 연한 고기만이 시장에 팔리기 때문이다. 암퇘지와 암소들은 새로운 고기의 생산을 위해 지속적으로 임신을 당한다. 암퇘지는 ‘출산 기계로서, 한 마리당 0.43평의 공간에서 움직이지 못한 채 임신기간과 수유기간을 보낸다. 암소 또한 임신 가능한 연령이 되면 세 번의 출산을 겪는다. 암퇘지와 암소도 일정 기간이 지나면 도축돼 우리의 식탁에 오른다.

 인간에게 저가의 고기를 공급하기 위해서는 사육에 적은 비용을 들여야만 한다. 돼지와 닭, 오리 등은 대규모의 사육장에서 사육된다. 분뇨는 제대로 청소되지 않으며 동물들에겐 좁은 공간만이 허용된다. 동물들은 습성과 배치되는 환경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동족을 공격하고 먹으면서 해소한다. 사육사는 이를 막기 위해 돼지의 이를 뽑고, 꼬리를 자르고 닭의 부리를 제거해버리지만 동물들이 받는 스트레스를 해결하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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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돼지들에게 물어뜯긴 머리다. 밀폐된 공간에서 많은 수의 돼지들을 사육한 결과다.

 고기와 옷가지가 되는 과정도 신속하고 저렴하게 진행돼야만 한다. 동물들은 산 채로 목이 따이며, 거꾸로 매달린 채 목에서 솟구치는 피를 느끼게 된다. 의식을 가진 채 끓는 물에 담기는 것이나 식도가 뜯기는 고통도 감내해야만 한다. 자신의 피부를 인간에게 제공해야 하는 동물들은 산 채로 자신의 피부가 벗겨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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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의 세인트 로렌스만에서 자행된 바다표범 사냥이다. 새끼들이 태어난 시기에 맞춰 사냥이 시작된다. 몽둥이로 바다표범을 기절시킨 뒤 피부를 벗기고, 남은 시체는 바다에 던지거나 버리고 간다.

공모자가 되느냐, 바꾸는 사람이 되느냐 

 영화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사실을 보인다. 이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잔인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며 동물에게 직접적으로 고통을 가하는 자들을 ‘비인도적’이라 비난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감독은 잔인함에 대한 분노가 동물을 학대하고 도살하는 이들에게만 향하는 것을 경계한다. 영화는 유기견, 마트에 놓인 가공육, 매장에서 판매하는 소가죽 벨트, 부츠, 지갑 등을 지속적으로 등장시킨다. 이것들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동물들이 고통을 겪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즉 감독은 인간이 동물을 착취하는 시스템 전반을 지적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근본적으로 충격을 받아야 하는 지점은 동물의 고통이 우리가 생활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며, 우리가 먹고 입고 쓰는 모든 것들이 동물을 착취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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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앞에서 언급한 사육 시스템과 도축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고기다.

 여기까지 생각이 이어지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당황하게 된다. 감독은 우리가 보일 반응을 짐작한다. 첫 번째 반응은 조소, 두 번째는 강력한 반감이다. 동물에게서 얻는 모든 것들에 익숙하고 편리함을 느끼는 상황에서 동물이 인간을 위해 착취당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동물 착취에 대한 지적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을 비판한다’며 조소할 수 있다. 혹은 ‘위의 영화는 과장된 것이며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감을 표출할 수도 있다. 하지만 조소와 반감은 죄책감에서 비롯된 감정일 가능성이 크다. 내레이션은 위와 같은 태도를 ‘동물들이 최악의 상황에 있지 않다는 모호한 믿음에 매달려, 양심에 부담을 주는 사실을 일부러 외면하려는 것’이라 밝힌다. 

 하지만 감독은 진실에 대한 세 번째 반응으로서 사실을 인정하는 태도를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들이 진실을 외면하지 않을 것이라는 감독의 믿음을 대변한다. 인간은 다른 존재의 고통에 공감하고 부당한 것을 바꾸려는 능력을 지녔으며, 이는 인류의 역사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공감과 분노는 노예제, 인종차별, 남성 중심의 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는 데 큰 지지기반을 마련했다. 감독은 진실을 안 이들이 동물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는 종차별주의를 반대하는 하나의 힘이 될 것이라 믿는다. 

 영화의 끝자락에서 감독은 자연 속의 동물들을 보인다. 하늘, 육지, 바다에서 각각의 생명체들은 자신의 고유한 영역을 지키며 그들만의 삶을 살아간다. 뒤이어 우주에서 바라보는 푸른 지구가 화면에 담긴다. 지상에서 인간은 모든 종에 군림한 존재이고자 하지만, 우주에서는 지구 내의 위계질서가 보이지 않는다. 모든 생명체들의 터전이자 삶의 공간인 지구만이 보일 뿐이다. 영화는 지구 위의 모든 생명체, ‘Earthlings’가 조화롭게 살기를 바라는 염원을 보이며 막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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