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들이 말하는 국민 중엔 너와 나는 간 데 없고, 저들의 계획 속엔 너와 나의 미랜 없지”(꽃다지 4집 ‘주문’ 중). 그 언제는 안 그랬겠냐마는, 나의 머리와 가슴에 이 노랫말이 너무나 아리도록 직접 가닿는 나날이다. 제대로 밝혀진 건 거의 아무 것도 없는 채 무심히 흘러버린 지난 세월이다.
《진보평론》 2014년 가을호에서 오창룡은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현재 한국의 국가권력은 진상규명을 제대로 할 경우 초래하게 될 ‘정당성의 위기’를 두려워하기에 ‘책임회피의 정치’를 구사하는 것이며, 이는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국가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국가권력의 무능 전략’이라고 말이다. 적실한 지적이라고 판단한다.
하지만 여기에 덧붙일 것이 있는데, 국가권력의 무능 전략 구사의 배경에는 국가권력이 ‘우군’으로 의지할 수 있는 자원 및 수단과,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우군과 시간이 우리 편이라는 믿음 하에서 국가권력은 진상규명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음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정당성의 위기’보다는 진상규명을 제대로 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정당성의 위기’가 훨씬 치명적이고 강력하리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권력은 진상규명을 제대로, 조속히, 적극적으로 추진할 유인을 가질 리 만무하고, 진실을 정확히 ‘드러내기’보다는 공개되기 꺼려지는 부분들은 ‘들어내면서’ 적당한 선에서 위기를 관리하는 전략을 취하게 되었을 것이다.
욥기에서 욥은 자신 앞에 벌어지는 일련의 고난과 시련에 의문을 품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고 분노하는 마음도 가진다. 하지만 그 스스로가 주체가 되어 진상을 규명하고자 시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을 향하여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한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긴 것이다. 욥기는 우리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 질문하지도 요구하지도 말고 가만히 있어보라는 태도를 취했던 그네가 좋아할 만한 바로 그 이야기 아닌가?
하지만 종국에는 모든 문제제기를 포기하고 일련의 과정에서 하나님의 처분만을 기다리며 가만히 있었던 욥과는 달리, 다행스럽게도 세월호 유가족들은 정당한 요구를 이어오고 있으며, 그러기에 11월 7일 불충분한 형태로나마 세월호 특별법의 통과도 가능했던 것으로 본다. 물론 이것은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욥기에서 욥의 친구들은 절망한 욥에게 네가 과거에 잘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는 인과응보적인 설명으로 일관한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욥의 친구’들은 어떠한 모습을 보였는가? 세속화된 시대인 데다 천재가 아니라 인재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며, 잘못과 책임을 지고 진상 규명에 적극 임해야 할 눈앞의 주체가 뚜렷이 보이는 상황에서, 세월호 유가족들에게 인과응보식의 사전적(ex ante) 책임을 문제 삼는 것은 불가능하고 무리가 따른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자연스럽게 취하게 된 방식은 사후적(ex post) 문제를 제기하고 심지어 의도적으로 만들어내는 방식이었다. 다양한 언론, 학자, 지식인, 정치인 등은 다종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선도적으로 제기하거나 조장, 확대재생산하기 위해 기여·복무하였고, 이는 실제로 일부 국민들에게 먹혀들었다. 피로감 표현하기(“세월호 얘기, 이제 지겹다.”, “피로감을 느낀다.”, “지친다.” 등), ‘민생’ 볼모론 등과 결합하여 도덕적으로 흠집 내고 흑색선전하기(“특권층”, “귀족들”, “협상의 대상이 아닌 처벌의 대상, 세월당” 등), 조롱하며 비아냥거리기(일베의 ‘폭식 투쟁’ 등), 본질을 흐리고 문제해결의 시급성을 떨어뜨리며 부차화하기,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고’ 중 하나였다고 일반화하기 등등이 바로 그것이다. 특히 마지막 것은 ‘교통사고와의 비교’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듯, 사람들을 인격과 개성을 가진 소중한 개개인으로 보지 않고 단순한 인구수로만 바라본다는 점에서 그들 관점의 민낯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이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군이 더 많아지고 그 세력․위력은 더해갈 것이라는 국가권력의 기대와 판단은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강화시키게 되며, 이러한 과정에서 사람들의 망각과 무관심에 기대며 시간이 흘러감을 느긋하게 기다리는 ‘버티기’ 전략 구사는 더욱 용이해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든든한 우군과 시간의 위력에 기댄 국가권력의 책임회피의 정치와 무능 전략을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 언론이, 사람들의 전도된 의식과 불만이, 여기저기서 무비판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다양한 담론들이 ‘진실과 위기를 관리하는’ 전략을 취하는 국가권력에 유리한 방향으로 가지 않게끔 하려면 과연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뻔하고 뻔뻔하면서도, 반복해도 여전히 효과가 잘 듣는, 단순하지만 강력한 기만적인 수법들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적극적으로 비판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우리의 요구와 권리의 정당성을 계속적으로 적극적으로 알리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이번에도 이러한 흐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흘러간 세월이 다시 부메랑이 되어 사태의 전모를 있는 그대로 여실히 알고 싶다는 시민으로서의 당연하고도 정당한 지위와 권리를 다가올 미래의 어느 시간에 또 다시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하지 않을까?
불교, 인디언 사회, 알렉산더 폰 훔볼트 등의 사상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바와 같이,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장기적 관점에서 봤을 때 여러 시점의 시간들 간에도 그러하고, 동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들 간에도 그러하며, 다른 시대 다른 사회의 사람들 간에도 그러하다.
지난 11월 1일 세월호 참사 200일을 맞이하여 광화문 청계광장에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였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그 힘이 커질 때, 비로소 국가권력은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접게 될 것이고, 진상규명에 제대로, 시급히,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았을 때 찾아올 수 있는 정당성의 위기가 매우 크다는 것을 위협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결국 진상규명에 제대로 임하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 진상규명 과정에서 세월호 유가족 및 시민사회에서의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참여, 감시․감독이 이루어지고 그것이 보장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국가권력이 지금처럼 국민을 전혀 두려워하거나 무서워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사는 이곳이 더 아름다울 수 있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강하게”(꽃다지 4집 ‘주문’ 중) 기억하고 요구하며, 연대하고 저항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