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16 저상버스, 돌아올 수 있을까
본부점거, 뜨거웠던 그 오월을 기억하시나요
학생회동향 132호

본부점거, 뜨거웠던 그 오월을 기억하시나요

2011 법인화 반대 본부점거 4주년을 맞이하며

인터뷰이 소개 _지윤(인류 07 졸업) : 당시(53대) 총학생회장, 오준규(법학 08 졸업) : 당시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공동실천위원회지지서울대모임’(사노위) 소속. 이후 54대 총학생회장 역임, 최갑수 교수(서양사학과) : 당시 ‘서울대법인화반대공동대책위원회’(서울대법인화반대공대위) 상임의장. ‘서울대민주화교수협의회’(민교협) 소속, 박배균 교수(지리교육과) : 당시 서울대법인화반대공대위 운영위원장. 민교협 소속, 정주회(서양사 10) : 당시 인문대 공명반 2학년으로서 본부점거에 적극 참여. 사노위 소속, 김새내(가명 요청) : 당시 사회대 1학년으로서 점거 현장에 있었음, 이석사(가명 요청) : 당시 대학원 석사과정생, 최직원(가명 요청) : 당시 행정관 근무, 신해성(서양사 11) :당시 인문대 새날반 1학년으로서 본부점거에 적극 참여.

  ‘그 일’이 있은 지 4년이 흘렀다. 대학에서 4년은 새내기들이 화석이 되고 졸업을 하는 시간이다. 지금의 학생들은 행정관이 학생들의 함성으로 뒤덮였던 그날을 알고 있을까? 여러 시각에서 바라본 본부점거의 기억을 퍼즐처럼 맞추어 보았다. 

  날치기 통과된 서울대 법인화법  2010년 12월 8일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ㆍ운영에 관한 법률’(이하 서울대법인화법)이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의 주도로 예산안과 함께 날치기 통과되었다. 충분한 논의 과정 없이 법인화는 순식간에 결정되고 말았다. 2010년 1월경부터 ‘서울대법인화반대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투쟁을 지속하고 있던 학생·교수·직원들은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박배균 교수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최갑수 선생님한테 전화가 왔어. 법안이 통과됐다고. 충격적이었어. 바로 (국회로) 뛰어갔지. 그렇게 몇몇 교수들이 국회 앞에 서서 있는데, 감동적이었던 건, 학생들이 저기서 ‘와아아’ 하고 뛰어오는 거야.    최갑수 교수한 오십 명?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게 그렇게 감동스럽더라고. 그때부터 대응회의를 했지. 본부 앞에 텐트를 세우고, 직원, 학생, 다 같이 겨울을 났어. 그 해 겨울이 정말 추웠는데.(웃음)    당시 총학생회장은 지윤씨가 맡고 있었다. 11월에 당선되고 한 달이 채 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총학생회는 다른 일보다 법인화 투쟁에 집중해야 했다. 겨울방학 동안 천막농성과 피케팅 등을 진행했다. 3월 말 ‘법인화 반대 3천인선언’을 열었지만 참여는 저조했다. 한편 총학생회가 법인화에 총력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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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거된 본부 앞, 학생들의 과/반 깃발이 걸려있다. 다른 대학교에서 연대자보와 플랜카드도 속속 보내왔다.

  비상총회가 열리기까지  본부는 법인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법인설립준비위원회’(설준위)를 구성하기 시작했다. 학생회가 여기에 참여하느냐 마냐 하는 논의가 일어났다. 설준위에 참여하는 것은 법인화에 찬성한다는 의미가 될 수 있었다.  지윤겨울방학부터 비상총회 개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죠. ‘2009 학생총투표’에서 법인화법 반대를 결정한 것에 따라 활동하고 있었지만, 학생들의 의견이 뭐냐 하는 갈증도 내부적으로 있었어요. 이게(2009 총투표 결과) 학생들의 총의라고 장담할 수 있냐는 것이었죠.    집행부는 고민했다. 만약 비상총회가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무산되면 투쟁동력을 상실하게 될 터였다. 한 번 투쟁을 할 때 끝장을 봐야하지 않겠나 하는 갈증도 있었다. 단대 학생회장들을 만나 설득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5월 8일 연건 캠퍼스에서 열린 총운영위원회(총운위)에서 만장일치로 비상총회 개최가 결정됐다.  지윤<대학신문>에서 ‘이런 식으로 대응할거면 설준위에 들어가라’는 요지의 사설을 냈었어요. 그래서 ‘대학신문에 답하며’라는 제목으로 비상총회 공고 자보를 냈죠. 3주가량의 비상총회 선전전에 총학의 모든 자본과 역량을 투자했어요.    총학생회는 매주 다른 유인물을 만들어 각 버전마다 5000장씩 뿌렸다. 도합 25000장은 됐다. 트럭을 타고 학내를 돌며 홍보하기도 하고, 단대별로 강의실을 돌기도 했다. 총학생회비는 홍보 선전비로 거의 다 지출됐다. 단대별로도 각자 잘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홍보했다. 미대에서는 웹툰작가 무적핑크가 그림을 그려서 웹 자보를 만들기도 했다. 각 과/반에서는 왜 우리 과/반이 비상총회에 가야 하는지 토론하고 자보를 냈다. 방 바깥 창문에는 ‘우리 과/반/동아리는 비상총회에 참가합니다’라고 적힌 플랜카드가 걸렸다.  정주회 아무도 성사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을 걸요? 그런데 막판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좋아지더라고요.    김새내법인화, 비상총회, 하도 홍보를 많이 해서 다들 알고 있었을 거예요. 주변에서 다들 가니까, 저도 당연히 가는 거였죠. ‘대학에 와서 이런 것 한 번 가봐야지’ 하는 생각도 있었죠.  지윤초반에는 사실 (성사 여부가) 긴가민가했죠. 홍보 막판이 축제 때였어요. 트럭을 타고 관악캠퍼스를 돌면서 선전하는데, 그때 보니 비상총회 홍보를 위해 맞춘 빨간 티셔츠를 입은 사람이 많이 있더라고요. 트럭을 보면서 환호도 해주고요. (비상총회가 성사)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최갑수 교수될까 말까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지. 민교협 선생님들 열 몇 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고 있었어. 그런데, 2,500명 가까이나 왔다는 거야!    5월 30일, D-day. 학생들이 점점 몰려왔다. 사회대와 인문대의 행렬은 특히나 길었다.  정주회인문대 새내기들이 듣는 ‘삶과 인문학’ 강의가 문화관에서 있었거든요. 선배들이 깃발을 들고 기다리다가, 강의 끝나자마자 후배들을 모아서 아크로로 데리고 갔죠.  지윤무대 위에서 쭉 보는데, 인문대 방향에서 끝없이 오는 모습이 감동이었어요.  입구에서는 들어오는 사람의 숫자를 일일이 확인했다. 1800명이 넘어갈 때 총학생회장이 성사 선언을 했다. 이날 참여한 학생은 정족수 1565명을 훨씬 넘은 2400여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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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총회. ⓒ뉴시스

  비상총회의 현장, 그리고… 본부로!  총회의 안건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설준위에 참여할 것인가? 해체를 주장할 것인가?’였고 두 번째는 ‘해체를 주장한다면, 투쟁 방법은 국회 앞 촛불 집회, 본부점거, 총동맹휴업 중 무엇을 할 것인가?’였다. 곧 토론회가 개최됐다.  정주회총회에서 본부점거를 결정하는 데 반대했어요. 선례를 일단 남기면 그 뒤로는 본부점거를 적어도 총회를 거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할까 싶어서였죠.  지윤한 쪽으로 쏠리지 않도록 나름대로 조절을 했어요. 사실 본부점거가 결정될 것 같은 느낌이 있더라고요. 침투할 계획은 마련해 놓고 있었죠. 하지만 절대 유도하려는 것은 아니었어요. 학생들의 의견에 따를 생각이었죠. 그런데 법인화에 찬성하는 토론자를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집행부에서 한 명을 찬성 측 토론자로 만들어 내보냈죠.    김새내토론회 분위기는 좋았어요. 선동하고 그런 분위기도 아니었고. 법인화 찬성하는 토론자도 나왔거든요. 다들 박수쳐줬어요. 

  날은 어둑어둑해지고,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신해성뜨거워진 분위기 속에, 이렇게 학생들이 많이 모였으니, 뭔가 제대로 하나 해야 한다, 이대로 물러서기엔 아깝다, 이런 생각이 다들 있었던 것 같아요.  투표 결과, 학생들의 총의는 ‘설준위 해체’, ‘본부점거 투쟁’으로 모아졌다. 학생들은 곧이어 본부를 향해 걸어갔다. 본부를 빙 둘러 유리문 앞까지 다다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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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진입.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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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진입. ⓒ뉴스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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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진입. ⓒ대학신문

  김새내 본부점거가 결정되고 나서도 그 날 바로 그렇게 쳐들어가는지는 몰랐어요. 아무도 예상 못했을걸요. 그땐 재밌기도 했고, ‘대학에 왔으면 바로 이런 경험을 해 봐야지!’ 하는 생각으로 ‘와아’하고 따라갔어요.    신해성인상 깊은 광경이었어요. 깃발들이 우르르 몰려가던 모습. 여론을 모아서 깃발을 세우고. 본부 앞에서 (닫힌 문을) 뚫으려던 장면이. 이제는 볼 수 없는 장면이죠.    학생들은 본부 앞 유리문을 둘러쌌다. 어디선가 미술용 톱을 가져와 빗장을 썰기 시작했다.  오준규누군가 2층 기자실 창문이 열려 있는 걸 발견한 거예요. 방충망을 뜯고 본부로 들어갔죠. 처음 사람은 어떻게 올라간 건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먼저 올라간 사람이 잡아 주고 아래에서 밀어 주고 해서 (저를 포함해)7명 정도가 먼저 침투했어요. 계단으로 바로 내려가서 다섯 명 정도는 몸으로 직원들을 막고, 두 명이 가서 문을 땄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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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1층. ⓒ뉴시스

  최직원학생들이 모인다는 소리는 들었어요. 본부에 올지도 모른다고 해서 서류를 미리 정리해 놓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전 본부점거 때 학생들이 문서를 다 파손시킨 적이 있다고 해서. 설마 본부가 정말 뚫릴까 했는데… 문을 분명히 다 잠그라고 했는데, 기자실 창문이 열려 있었대요. 어떤 진보적인 기자가 학생들 도와주려고 그랬다는 소문이 돌았었죠. ‘와아아!’ 하고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쿵쾅쿵쾅’, ‘우와아아’ 하면서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조금 무서웠죠. ‘맞아 죽는 건 아니겠지?’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도 의연하게 저의 자리를 지켰죠. 첫날까지는 학생들이 복도에만 있었어요. 총장실만 들어가고. 직원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 다음부터는 건물에 못 들어가게 하더라고요. 


  지윤씨에 따르면, 본부점거가 결정되면 본부에 침투하기 위해 집행부는 미리 본부점거 플랜 A, B, C, D를 고안해 놓았다고 한다.

  A 집행부원 1명이 절단기를 들고 본부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문을 딴다. →총회 종료 직전 들켜 쫓겨나서 실패하고 말았다.

  B 본부 지하실로 통하는 루트를 이용한다.

  C 2002년 본부점거의 전설 재현-공대에서 아시바(쇠파이프 구조물)를 쌓아 가져와서 3층 학생과로 들어간다.

  D 정면돌파. 아마 불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 방법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일단 본부에 들어가자, 잠시 소강상태가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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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농성 ⓒ경향

  지윤본부에 일단 들어가면, 사람들이 스스로 해나가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렇지만 이불도 음식도 없는 상태였죠. 하룻밤 날 준비를 하느라 집행부가 정말 바쁘게 움직였어요.    최갑수그 날 바로 구로 이마트에 가서 이불, 베개 이백만 원 어치를 사왔어. 다 갖다 줬지.

  우왕좌왕했던 본부점거 첫날

  대학원생 박시훈씨는 학생들에게 먹을 것 등 물질적인 지원을 해주자는 의견을 학내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올렸다. 게시글은 곧 호응을 얻었고, 박시훈씨는 점거 내내 후원창구 역할을 도맡아 일했다. 이후 본부에는 적어도 음식이 부족한 일은 없었다.  학생들은 점차 공간 안에서 질서를 잡아 나가기 시작했다. 각 자치단위별로 본부의 공간을 배정하고 각자가 맡아서 지켰다. 본부에서의 시간을 채워나가기 위한 각종 프로그램들도 마련되었다.  정주회저희 반이 총장실에 있었어요. 총장실 되게 좋아요. 바닥이 분홍 카펫으로 되어 있고, 비록 저희가 나갈 때쯤엔 까만 색이 되었지만(웃음), 침대도 있고, 샤워실도 있어요. 거기서 씻고 자고 먹고 그랬죠. 아, 비상구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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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실. ⓒ문화일보

  총장은 CJ관으로 대피했다. 아관파천을 패러디해 ‘CJ관파천’이라는 유행어도 돌았다.  6월 3일 총장이 본부에 찾아왔고 6일에는 대토론회를 진행했지만 소득은 없었다. 학교는 ‘설준위 설립은 국회에서 결정한 것이고, 본부는 이를 집행할 뿐, 해체할 권한은 없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이석사총장이 좀 떠는 것 같았는데.(웃음) 병풍처럼 늘어서 있는 학생들 표정은 아주 굳어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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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3일 총장 면담. ⓒ연합뉴스

  지윤지나가는 얘기지만, 사실 이전에 본부를 점거했을 땐 총장실이 있는 핵심, 4층만 점거했다고 해요. 전 층을 점거한 것은 사실 그렇게 하는 건 줄 모르고 한 거예요. 본부 전 층을 점거한 것은 이때가 사상 최초였대요.

  본부점거의 일상  지윤전 사실 국회를 가거나 총장이 대피한 CJ관에 가느라 본부에는 많이 못 있었죠. 집행부원들이 많이 고생했는데, 유인물을 매일 밤 써서 강의실을 돌곤 했죠. 매일 촛불문화제를 열고, 재미있는 프로그램 만든다고 고생했어요. 투호던지기, 마임, 수건 돌리기, 별 걸 다 했어요. 아침마다 점거 총회를 열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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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2층. ⓒ박배균 교수

  신해성당시 언론 보도가 이상하게 났던 게 기억이 나요. 학생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불법 행위를 한다고 말이죠. 기자들이 사진을 나쁘게 찍어서 보도하고 그래서 출입도 엄격하게 차단하게 됐어요. 본부 환경도 깨끗하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언론 보도가 잘못 날까봐 학생들 모두 행동을 조심했어요.  김새내시험이라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사진을 찍어 온라인에 올려서 마구 퍼졌어요. 조금 당황스러웠죠. 그냥 시험기간이라 공부한 것뿐이었는데.(웃음) ‘공부시위’라고 유명해지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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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시위. ⓒ참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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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 시위. ⓒ엑스포츠뉴스 캡처

  직원들은 출근을 해야 한다며 아침마다 몰려오곤 했다. 업무를 할 수 없어 근로장학생들의 월급을 줄 수 없다며 협박을 하기도 했다.  지윤직원들은 CJ관과 중앙전산원에서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고, 정말 필수적인 인원은 들여 보내 줬거든요. 일을 못한다는 건 뻥이었죠.   나중에 들어 보니, 그 중에는 사실 간부가 시켜서 온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라고요. 사실 직원들도 법인화 반대 투쟁 하면서 학생들이 점거하기 전에 하루 동안 본부 4층을 점거한 적이 있거든요. 법인화에 반대하는 직원들도 많았어요. 실제 실랑이를 자주 했던 어떤 분은 나중에 법인 직원으로 신분이 전환되는 것에 반대해서 다른 곳으로 전출 갔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출근하겠다는 직원과 대치하고 설전을 벌이는 게 가장 피곤했어요. ‘우리를 위협하지 마라’와 ‘힘내시라’는 의미를 둘 다 담아서, 토마토를 믹서에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 드리는 퍼포먼스도 했죠…. (지금 돌아보면) 왜 그랬는지 잘 모르겠지만.(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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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러디 제작 중. ⓒ뉴시스

  건축학과 학생들은 책상과 의자를 만들어 본부에 놓아 주었다. 마침 시험 기간이었다. 본부로 사람을 끌어오기 위해 ‘본부 독서실’을 조성했다. 몇몇 교수들은 본부에서 강의를 하기도 했다. 연건에서는 남은 병원식을 포장해 보내 주기도 했다. 과/반이나 동아리에 따로 소속되어 있지 않은 학생들은 ‘원자모임’이라는 이름으로 모여 본부를 지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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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 4열 독서실. ⓒ박배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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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물품. ⓒ뉴시스

  신해성왜 그렇게까지 열심이었는지(웃음). ‘이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기숙사에 가서 캐리어에 짐을 싸 와서는 대부분의 시간을 본부에서 지내다가, 또 챙겨온 물건을 다 쓰면 또 기숙사에 갔다 오고, 하는 날들이 반복됐죠.  한편 다른 대학들과 연대하고 전선을 새롭게 설정하자는 주장도 나왔다.  오준규다른 대학들도 등록금 현안 등으로 투쟁하고 있는 상황이었어요. 다른 학교와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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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만든 패러디물과 대자보들은 본부를 빼곡히 채웠다.

  문화 시위, 총장실 프리덤, 본부스탁  본부가 학생들의 공간이 된 동안, 노래를 개사해 부르는 것부터 각종 자보, 포스터, 뮤직비디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이 탄생했다. 특히 그룹 UV의 <이태원 프리덤>을 패러디한 <총장실 프리덤> 뮤직비디오는 온라인상에서 큰 인기를 끌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오연천 총장의 “설준위는 경륜 있는 분들이 모인 상징적인 자리라 학생이 참여해도 역할에 의미가 없다고 봤다”는 발언으로 ‘경륜’이라는 유행어가 퍼지기도 했다. 총장과 본부는 더 이상 학생들에게 금기의 공간이 아니었다.    특히 ‘본부스탁’은 이러한 ‘문화시위’가 꽃핀 사건이었다. 본부스탁은 법인화 반대 락 페스티벌로, 학내 공연 동아리와 학외 인디밴드 다수가 이 행사에 참여했다. 당시는 본부를 점거한 학생들의 숫자도 동력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윤본부스탁은 결국 사람을 많이 이끌어 오려는 시도였어요. 점거가 길어지고, 기말고사가 끝나고, 학생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던 참이었거든요.  신해성처음에 강산(본부스탁 주최자)씨가 아이디어를 이야기해주었을 때는 그냥 ‘이런 걸 해볼까?’ 하는 느낌이었어요. 실제로 행사가 성공적으로 개최돼서 굉장히 놀랐어요. 문화적으로 집회를 승화시키려는 시도들이 계속적으로 있었는데, 강산씨가 등장하며 큰 물결로 본부스탁이 나타난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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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부스탁. ⓒ박배균 교수

  지윤가수들이 의미 있는 곡들을 많이 가져왔어요. ‘브로콜리너마저’의 <졸업> 후렴구를 계속 따라 부르며 팔뚝질했던 게 기억에 남네요.


  본부스탁을 하려던 날, 본부는 셔틀버스로 캠퍼스 출입길목을 모두 막았다. 본부스탁을 열기 위한 각종 장비를 학교 안에 들여오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버스들에는 당시 유행하던 ‘명박산성’을 본따 ‘경륜산성’, ‘연천산성’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행사장에 전기를 공급할 발전차였다. 결국 발전차가 캠퍼스에 들어오면서 본부스탁은 개최될 수 있었지만, 어떻게 학내에 들어왔는지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었다. 관악산을 넘어 들어왔다, 총장님 드실 아이스크림 차라고 속여 들어왔다 등 여러 설이 나돌았지만 지윤씨에 따르면 발전차는 수의대 쪽 출입구에서 자물쇠를 절단하고 들어왔다. 자물쇠가 끊어진 자리에는 똑같은 자물쇠를 도로 채워놓았다. 당시 학교 기물 파손 시에는 징계를 한다는 협박이 워낙 강해서 이를 숨길 수 밖에 없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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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배균 교수

  본부점거, 해제  본부스탁 바로 다음날 본부점거 인원은 최저를 기록했다. 300명 넘게 가득 차 있던 본부에 30명 정도밖엔 남아 있지 않았던 것이다.  신해성본부스탁이 너무 성공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몰라요. ‘(점거는) 아직 이렇게 건재하구나’, 그렇게 생각하고, 다들 같은 생각이어서, ‘내가 안 가도 본부점거는 건재할거야’ 이렇게 생각하고 사람들이 줄었는지도 모르죠. 안타까워요.  이석사본부점거가 그렇게 성공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정말 실망했었죠.  점점 동력은 떨어지고 있었다. 본부점거를 유지할 수 있을까, 총학생회장에게는 고민이 밀려왔다.  지윤이 인원으로 점거를 유지할 수 있을지도 불투명했어요. 집행부원 누군가 “언니, 난 (점거된) 본부가 괴물 같아”라는 말을 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충격적이었어요. 분위기라는 게 느껴지잖아요. 점거에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은 본부점거 상황에 점차 지쳐가고 괴리되는 것 같았고… 어떻게 본부점거를 학생사회에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많이 고민했어요. 실패로 기억되는 것만큼은 가장 피하고 싶었어요. 징계 얘기도 계속 나오고 있었고요. 200명까지도 징계하겠다는….    단과대학생회장 중에는 장터와 농활 등 자치 사업을 해야 하니 본부점거를 그만두자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학대회에서 점거해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했을 때 이미 점거 해제는 어느 정도 눈에 보이고 있었다. 점거를 하고 있는 사람끼리 해제를 논의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총회 다음으로 권위 있는 의사결정기구는 원칙적으로 전학대회였다.  지윤결국 본부점거가 실패했다는 느낌을 주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전학대회 안건도 ‘협상 결과를 수용할지, 말지’로 냈던 거고요. 수용한다면 점거를 해제하기로 한 것이죠. 투쟁을 멈춘 게 아니었어요. 점거는 해제하지만 대국회 투쟁으로 변경한 것이었죠. 실제 동맹휴업도 했고, 한나라당사도 점거하러 갔어요. 이번엔 점거까지 성공하진 못했지만.  신해성점거를 계속하던 사람들 입장에서 울컥했던 부분이 있었어요. 전학대회에 온 학생대표들 중에는 (점거에) 깊게 참여하지 않은 사람도 많았거든요. 점거 현장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면서, 갑자기 외부에서 나타난 사람들이, 점거를 해제하라는 표를 들어올리더군요. 물론 학생대표들의 결정이고, 그게 원칙적인 절차니까, 수긍은 하지만… 아쉬움이 남았어요.    이석사학생대표라는 그들에게는 발언권과 의결권이 있었던 반면, 점거에 참여했던 우리에게는 없었어요. 일반 학생들은 뒤에서 그저 지켜보고 있었죠.    오준규해제가 결정된 데는 학우들에게 본부점거가 승리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주지 못한 탓도 있을 테니, 우리 단체(사노위) 역시 부족한 면이 있었던 거라고 생각해요. 총학만 탓할 수는 없을 거예요.    신해성그래서일까 허무하게 끝나버렸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차후에 대국회투쟁도 벌이자고 했지만, 결국 다들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죠.    오준규본부점거를 해제할지 말지 결정한 곳이 전학대회였어요. 총회를 통해 2500명의 학생들이 본부점거를 의결했는데, 전학대회가 그 총의를 꺾을 수 있는 게 맞을까 의문이 들었어요. 이런 식의 점거 해제는 비상총회에 모여 준 학생들에 대한 약속을 깨버린 것이라고 생각했죠. 전학대회가 끝나고 본부에서 민중가요를 불렀어요. 학교가 떠나가도록. 아마 약속에 관한 노래였던 것 같아요. 그러다 잤어요. 아침 일찍 일어나서 다 같이 깨끗이 청소하기로 했거든요.  지윤솔직히 말하면, 더 버티다가 경찰이 들어와서 내가 끌려 나가면 좋겠다고도 생각했어요. 그랬다면 돌파구가 생겼을지도. 하지만 현실적으로, (점거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어요. 본부는 본부 건물 밖에서 업무를 하는 데 익숙해져가고 있었고,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는 느낌이었어요. 불편함을 전혀 주지 못하는데 무슨 위력이 있을지… 전학대회 동안은 다들 날이 서 있었고 서로 상처도 줬고… 음모론도 많이 돌았어요. 점거를 지속했다면 개인적으로는 덜 힘든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었겠죠.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서 선택하더라도 전학대회를 열 것 같아요.  본부점거를 해제하던 날에는 우연찮게 비까지 내렸다. 기자회견 자리에서 총학생회장은 눈물을 보였다. 총학생회장, 부총학생회장, 그리고 비상총회집행위원장이 징계를 받고 사건은 마무리됐다. 총장은 법인화 추진 과정에서 의견 수렴이 부족했음을 인정하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본부점거타임라인.JPG

  남은 이야기  누군가는 ‘너무 다양한 사람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점거에 참여했다. (법인화에 대해) 본부는 권한이 없는데, 학생들이 잘 몰라서 본부를 점거한 것 아니냐’고 묻기도 한다. 하지만 최갑수 교수는 “본부를 점거한다는 것은 상징적인 곳을 점거함으로써 학생들이 항의를 한다는 것을 보이는 최고의 방법이다. 본부점거가 적절한 대응이 아니었다는 말은 본부에서 만든 프레임에 갇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총장이 ‘비민주적인 법인화 결정에 반대한다’는 한 마디만 했어도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윤씨는 본부점거를 평가하며 “그렇게 학생들이 움직여본 기억이 많이 없다. 학생총회가 이렇게 돌아간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면서도 “좋은 기억으로 남게 된 본부점거였는지 의문이 드는 것은 사실”이라고 술회했다.  법인화를 막아내지는 못했지만, 본부점거의 경험은 학생들에게 강렬한 기억을 남겼다. 이를 계기로 학생사회의 주역으로 성장한 사람들도 있다.  ‘이제 학생사회는 죽었다’고들 하지만, 2011년에도 그랬다. 아무도 될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비상총회였다. 하지만 학생들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다.  아직도 행정관에 가면 그 때 자보와 패러디 포스터들을 붙였던 청테이프 자국을 찾을 수 있다. 학생들이 ‘뭔가 해 냈다’라는 뜨거운 기억이 지금 학생들에게도 전해지기를 바란다. 2011년 5월 30일의 뜨거운 잠재력이 여전히 학생들에게 남아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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