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서

법과 정의를 구분하기

 시위나 집회가 있을 때마다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비판들이 있다. 다음의 익숙한 구호들을 확인해보라. 불법 시위, 범법적 폭력 집회, 반국가적 이적 단체들, “광화문 광장을 시민들에게 돌려주세요.”(도대체 ‘시민들’은 누구인가?), “불법이니까 경찰이 진압하지!”, 등등.

 

 카프카의 짧은 소설 <법 앞에서>를 통해, 법 앞에서 사고하기를 멈추는 인간의 모습을 재차 확인할 수 있다. 법을 만나고자 했던 농부는, 문지기가 내세우는 법의 신성한 권위 앞에 전전긍긍하다 문 앞에서만 평생을 소비하고 종국엔 죽음을 맞이한다. 죽어가는 농부에게 문지기가 남긴 말은 의미심장하다. “이 문은 당신만을 위한 것이었는데. 나는 이제 문을 닫고 가야겠소.”

합법적인 것과 정의로운 것은 동일하지 않다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는 법과 정의의 구분을 주제화한 바 있다. 다음은 데리다가 몽테뉴와 파스칼로부터 직접 인용하는 구절들이다. “법은 정당해서가 아니라 법이기 때문에 신용을 얻으면서 존속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법들이 가지는 권위의 신비한 토대이며, 그것들은 이것 외에 어떤 다른 토대도 가지고 있지 않다.”(몽테뉴) “관습이 모든 공정성을 만들어내는데, 이는 오직 그것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이유에 의해서다. 이것이 그 권위의 신비한 토대다. 권위를 그 기원에까지 더듬어 올라가는 자는 그것을 파멸시키게 된다.”(파스칼)

 

 법은 구성된 시스템이며 (그렇지만) 어디에도 합리적으로 정초되어있지 않다. 법들은 법들인 한에서는 정당하지 않다. 법들이 정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권위를 믿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앞에 복종한다. 법은 문법에 따라 계산 가능하며 따라서 해체 가능하다.

 

 정의는 본질적으로 법과는 상이하다. 정의는 법에 관계하면서도 그 바깥 또는 너머에 있다. 정의는 법에 외밀한(extimate) 것이다.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정의인지 알고 겨냥할 수는 없다. 정의는 계산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정의는 법과 함께 계산될 것을 요구한다. 즉, 우리는 법을 논의하는 한 정의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합법적인 것과 정의로운 것은 구분되어야 한다. 사실 우리 모두는 어떤 식으로든 정의의 운동을 경험하고 있다. 예컨대 어떤 법이 부조리하거나 불완전하다고 판단할 때, 계약론적 감수성 하에서 법을 합의에 의한 것 혹은 가변적인 것으로 판단할 때 그렇다.

 

 그렇다면 카프카의 저 순진한 농부는 이러한 구분에 실패했던 것이다. 시위에서 ‘불법적인’ 측면만을, 다시 말해 법에 저촉된다는 사실만을 즐겨 발견하는 정신들 또한 법에 고착(fixation)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법이 일종의 물리적 한계를 의미하는 것처럼 여기다 권위에 삼켜지는 것이다.

 

 이와 달리 정의의 출현을 사유하는 일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제기하는 일이다. 노예가 노예문서를 찢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가? 게임의 규칙을 바꾸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다른 세계를 꿈꾸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시간의 흐름은, 역사의 존재는, 더 나은 삶의 추구와 실현은 어떻게 가능한가?

 

 법이 정의와 동일하다는 통상적인 견지에서 본다면, 외부는 없다. 우주는 유한하고 정적이다. 실질적인 운동은 불가능하다. 기계적인 자리바꿈만이 있을 뿐이다. 변혁의 역량은 처음부터 제거되어있다.

 

 반면에, 정의를 사유하는 일은 법 안의 외부를 사유하는 일이다. 법의 균열에서, 그것이 단속되는 지점으로부터 정의의 운동을 포착하고 따라가며 점근선을 그리는 일이다. 우주는 무한하고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변혁의 역량은 위협적이고 위태롭지만 성실하다.

 

 예를 들어보자. 3.1 운동은 근본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던가? 침탈은 부조리한 조약을 강제하며 이루어졌다. 조약은 특정한 ‘법’을 강요하는 과정이었고, 따라서 독립운동은 ‘불법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적 동기들이야 어쨌건 운동은 법을 초과하는 외부의 무엇, 즉 ‘정의’의 운동을 감지해야만 가능했을 것이다(3.1운동은 왕정복고운동과는 이미 결을 달리 했다).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여 흐르는 민주화운동의 맥 또한 마찬가지이다. 변혁의 역량은 법과 정의의 틈새, 합일되지 않는 간극에서만 섬광처럼 번쩍인다. 어떤 종류의 혁명이든 개혁이든 이 섬광을 붙잡지 않고는 그림자조차 드리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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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에서 정의로/정의의 권리에 대하여(De droit à la justce)”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지금 법을 무시하자고 말하는 것인가? 불법에 눈 감자는 것인가? 법이 무가치하다는 것인가? 모든 범법 행위들이 정의롭다는 것인가?

 

 그러나 법과 정의의 구분은 법을 말소하지도 불법을 조장하지도 않는다. 모든 ‘비합법적인’ 일들이 정의롭다는 귀결은 한낱 비약이다. 심지어 정의를 간단히 취득할 수 있다고 전제하지도 않는다. 법과 정의의 경계를 명쾌하게 구분할 수 있는 기계적 공식은 없다.

 

 덧붙이자면, 우리는 법 앞에서 습관적으로 멈추는 사람들을 일컬어 법에 “고착되어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기묘하게도, 가령 ‘성적 자유’의 구호를 훔쳐내어 성적 방종을 자랑거리로 삼는 사람들의, 요컨대 위반을 전략적 즐거움으로 삼는 사람들의 정신 구조 또한 법에 고착되어있다. 그들은 법에 매달린다. 위반할 법이 없으면 은밀히 즐길 수 없는 탓이다. 마치, 법의 신성함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법이라는 절대적 타자가 결여를 보충해줄 무언가를 줄 것이라 기대하며 희열을 즐기듯이 말이다. 그러나 어느 작가의 말을 차용하자면, 역사적으로도 법에 고착된 사람들은 감옥과 묘지를 채우는 일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요점은 이렇다. 법의 신비한 토대에 짓눌려 병자로 전락할 것이 아니라 법이 우리 모두에게 봉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 이를 위해선 언제나 법과 정의 사이의 균열과 간극을, 법을 초과한 사유를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법에 대한 경의가 언제나 동시에 정의에 대한 사유를 동반하도록 그렇게 행동하라…….”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이지 않다. 정신은 존재하고 있는 것의 바닥과 지하를 훑는 일에 게으른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의를 사유하는 일은 정확히 그런 일이다. 보통 어려운 과업이 아니라 할지라도.

윤대웅(철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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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자기 뼈보다 무거운 그림자를 이고 걸어야 하는 어깨들이 서러워 자주 혀를 씹었다. 바쁜 걸음의 사람들이 자꾸만 팔꿈치를 밟고 지나갔다. 나는 그림자들의 거리에 살았던 것 같다. 도처에 산재한 불운(不運)들의 의미를 헤집으며 걷다 보니 언젠가부터 공부를 하고 있었다. “지도에는 표시되지 않는 밤”과 “지도를 만드는 사람들의 어두운 골방”이라는 어느 시인의 말을 내 것이라도 되는 양 마음대로 받아먹었다. 그때부터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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