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설계수명을 다한 고리 1호기의 폐쇄가 결정됐다. 이는 부산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시민들이 원전폐쇄를 지지한 데에는 지역 주민운동의 공이 컸다. 원자력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한 주민운동은 비단 부산에서만 벌어지고 있지 않다. 영덕에서는 원자력발전소(원전) 유치에 찬반을 묻는 주민투표가 추진 중이고, 대전에서는 원자력 시설에 대한 민간감시기구를 설치하기 위한 조례운동이 벌어졌다. <서울대저널>은 영덕과 대전의 치열한 주민운동 현장을 취재했다.
*영덕과 원자력의 인연은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됐다. 영덕은 1989년, 2003년, 2005년 세 차례나 방사능폐기물처리장(방폐장) 건설 부지가 될 뻔했다. 지역발전을 위해 방폐장을 유치하려는 군과 시설에 반대하는 일부 주민들이 대립했다. 그리고 2010년 말, 영덕군이 예정지 주민들의 의사만 묻고 정부에 원자력 발전소 유치를 신청하면서 또다른 갈등의 씨앗이 심어졌다. 후쿠시마 사고가 터지고서 지역주민의 반대의사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고, 작년 10월 영덕 최대의 농민단체인 ‘한농연’이 2010년 유치신청과정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후 지역 주민단체들이 연합한 ‘영덕천지원전건설백지화 범군민연대’가 꾸려져 주민투표를 추진하고 있다.
‘청정영덕 지켜내자’
이른 아침에 영덕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당일 아침에 내리던 비는 영덕에 다가갈수록 잦아들었다. 빗발이 완전히 그쳤을 때쯤 버스는 영덕 터미널에 멈췄다. 터미널을 나서자마자 영덕 읍내가 보였다. 낮고 낡은 건물들이 엉켜있는 읍내의 풍경에서 적막함이 느껴졌다. 영덕의 광경이 주는 여운을 뒤로하고, 주민투표운동을 주도하는 ‘영덕천지원전건설백지화범군민연대’(범군민연대) 사무실을 찾아 손성문 대표를 만났다.

범군민연대의 홍보스티커. 깃발을 들고 있는 게는 대게가 아니라 홍게라고 한다. ⓒ박나연 사진기사
신부이기도 한 손 대표는 영덕으로 부임하면서 원자력 발전에 처음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먼저 나서면 매장당하는 분위기였다”며 원전 유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꺼내는 것조차 쉽지 않았던 지역의 분위기를 전했다. 원전 유치를 주도했던 김병목 전 영덕군수는 약 10년 간 집권했고, 군의회에도 야당 소속의원이 없는 실정이다보니 야권성향의 모임이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그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주민투표가 지역민 모두가 참여하는 축제의 장이 돼 주민들의‘주인의식’을 확보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범군민연대에서는 매주 수요일마다 주민투표 성사를 위한 촛불집회를 열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위를 둘러보니 범군민연대 사무실이 촛불집회 준비로 분주했다. 보통 집회는 7시부터 시작하며 약 한 시간 전부터 영덕 군 내를 차량을 타고 돌면서, 방송으로 집회 홍보를 한다고 했다. 홍보차량은 농사를 짓는다는 김종혁 씨의 낡은 트럭이었다. 작은 스피커가 트럭 위에 설치돼있었다.

대구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2002년부터 영덕에서 살았다는 김 씨는 마을 이장을 맡을 정도로 착실히 귀농생활을 했다. 영덕이 방폐장 문제로 시끄러울 때는 방폐장 반대운동에 참여하지는 않았다는 김 씨는 “2010년 12월에 (원전 유치신청을 했을 때) 아무도 언급을 하지 않는게 이상했다. 우리라도 나서야겠다고 마음먹었다”고 말했다. 김 씨 내외와 1명의 주민이 모여 원전반대 운동을 시작했다고 한다. 대화를 나누다보니 차량은 영덕읍을 벗어나 해안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항구에 정박해있는 작은 어선들이 보였다. 집 밖으로 나와 더위를 피하는 주민들이 차량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수요촛불집회, ‘주민투표 추진’을 외치다
어스름이 깔려올 때쯤, 차량은 집회가 열리는 영해면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범군민연대 회원들이 집회에 필요한 물품들을 내리고 있었다. 회원들은 바닥에 스티로폼 돗자리를 깔고, 스크린을 설치했다. 한쪽에서는 지난 집회 때 사용한 촛불과 종이컵 중에서 다시 쓸 만한 것들을 골라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집회장소 바로 옆에 있는 한 약방에서 주인 할머니가 나왔다. 할머니는 준비하는 회원들에게 비타민 음료수를 하나씩 나눠주었다. 80년도부터 이곳에서 약국을 했다는 할머니. 그녀는 원전건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어떤 사람들은 이미 결정된 일에 왜 반대하냐고 해요. 몰래 원전을 짓기로 한 건지 어쩐 건지도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다.

80년도부터 이곳에서 약국을 했다는 할머니. ⓒ박나연 사진기자
집회 준비가 진행될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집회에 참여한 이유를 물었다. 영덕 바로 옆 지역인 영양에서 왔다는 김형중 씨는 “원전이 터지면 결국 다같이 죽는 거야. 요새 사람들이 배짱이 좋아서 다같이 죽으면 괜찮은 줄아는데, 큰 오산이야”라고 말했다. ‘영덕핵발전소 찬반주민투표 추진위’의 서수연 씨는 “이미 선진국에서는 다들 (위험성을)알고 있는데도 원전을 짓는다는 건 무식한 주민들을 무시하는 처사”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녹색당 한재각 공동정책위원장은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이 발표되면서 신고리 5,6호기의 물량이 영덕에 지어지게 됐다”며 “우리 나라 핵 정책에 있어서 영덕의 상황이 미치는 영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풍물패의 꽹과리 소리와 함께 집회가 시작됐다. 참여한 주민들은 ‘주민투표 참여하자’, ‘민주주의회복’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거리를 행진했다. 엄마의 옷자락을 잡고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어린아이, 한복을 곱게 입은 노인 등 다양한 연령의 사람들이 함께 했다. 마을 농협을 기점으로 행렬은 머리를 돌려 집회장소로 돌아왔다. 상인들은 가게에서 나와 행렬을 쳐다봤다.

주민투표 성사를 위한 수요 촛불집회. ⓒ박나연 사진기자
자리로 돌아온 주민들은 촛불을 밝혔다. 주민투표 추진과 관련된 진행 사항들을 공유하고 원자력발전과 관련된 영상을 시청하였다. 또 희망하는 주민들이 앞으로 나와서 원자력 발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역설하기도 했다. 한재각 공동정책위원장은 7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 대해서 주민들에게 설명하였다. “환경부의 2029년 전력 수요 예측량 보다 산업부는 7분의 1만큼 더 예측했어요. 환경부의 이야기가 맞다면 핵발전소는 필요없는 거죠” 그의 말에 주민들의 호응이 이어졌다.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의 연대발언이 끝난 뒤, 공연이 이어졌다. 범군민연대의 활동가 한명이 리코더로 ‘고향의봄’을 연주했다.
약 두 시간 동안 진행된 집회가 끝나고 주민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주민들에게 주민투표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집회가 열린 영해면에서 태어났다는 최영기 씨는 “주민투표는 당연히 해야죠. 그런데 지역 정서가 군수를 좋아하고, 선거운동을 도운 사람이 많아서 눈치만 보는 거죠”라고 대답했다. 실제로 지난 7월 영덕의 이희진 군수는 주민투표 진행 요청을 거부한바 있다.

촛불집회가 끝나고 영해성당에서 진행된 회의. ⓒ박나연 사진기자
집회장소 정리가 끝나고 범군민연대 회원들은 영해성당으로 이동했다. 회의에서는 각 지역별로 주민들에게 받은 서명의 현황을 공유했다. 범군민연대는 주민투표 추진을 위해서 자체적으로 주민들에게‘ 주민투표에 참여하겠다’는 서명을 받고 있다. 범군민연대에서 이탈할 의사를 밝혔다는 농민단체들에 대한 논의도 진행됐다. 다소 격앙된 목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지원금을 받는 사람들은 생각이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이탈의사를 밝힌 한 농민단체는 영덕군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범군민연대의 태도에 문제를 제기해왔다고 한다.
범군민연대 회원들은 회의가 끝나고서야 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반찬은 영덕 식으로 생선과 함께 담긴 김치였다. 식사가 끝나니 시간은 자정을 넘어섰다. 하지만 회원들의 일과는 끝나지 않았다. 한 회원이 현수막을 영덕 군 곳곳에 다는 작업이 남아있다고 말해주었다. 차량에 현수막을 싣고 서너 명이 한 조가 되어 현수막을 붙이러 출발했다. 차량 없는 도로를 지나며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잘 보일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차량을 운전한 이는 남어진 씨로, 밀양에서 영덕으로 ‘파견’나왔다고 한다. 남어진 씨는 능숙한 솜씨로 현수막을 달았다. 지난 6월 달에 ‘한 달 동안 연대하는 것’이 목표였다는 그는 생각보다 다급한 영덕의 상황 때문에 더 머물고 있다고 했다. 곳곳에 현수막을 다니 시간은 새벽 2시였다. 영해성당으로 돌아와 잠을 잤다.

늦은 저녁식사 후에도 현수막을 붙이는 작업이 남아 있었다. ⓒ박나연 사진기자
원전 유치를 둘러싼 서로 다른 목소리
이튿날, 손성문 대표의 안내로 원전 건설 예정부지를 찾아갔다. 예정부지는 석리를 중심으로 4개의 마을에 걸쳐있다고 한다. 먼저 찾은 곳은 예정부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노물리였다. 열려있는 구멍가게가 있어 들어가보았다. 50년 째 노물리에서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는 임동희 씨는 원전 건설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정부에서 너무 늑장을 부려서 반대파가 그 사이 힘을 얻었다”고 말했다. 노물리는 부지에 포함되냐는 질문에 그녀는 “1차 발표 때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2차 발표 때는 포함된다고 하더라, 주민들이 한수원 본사에 찾아가서 직접 들었다”고 대답했다.
노물리 다음에는 마을이 예정부지에 포함된 석리를 찾아갔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마을은 급한 경사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일하고 있는 주민에게 석리의 상황에 대해 물었다.숙박업과 농업을 병행한다는 박명진 씨는 “이 동네에서는 물을 것도 없어요. 팔십, 구십 먹은 노인들이 여기서 살고 싶겠어요?” 라고 말했다. 박 씨는 석리에 사는 대부분의 노인이 이주단지로 떠나는 것을 희망한다고 설명했다.

석리에서 70년을 살았다는 박춘녀 씨. 비탈길을 올라온 그녀는 땀을 많이 흘렸다. ⓒ박나연 사진기자
마을로 향하는 비탈길을 올라가다가 집 앞에 나와있는 주민을 만났다. 석리에서 70년을 살았다는 박춘녀 씨는 원전에 대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겠죠. 들어온다면 나 살 적에 들어왔으면 싶어요”라고 말했다. 대화를 마치고 약 1m쯤 더 높은 지대에 있는 이웃집을 찾았다. 익명을 요구한 이웃주민은“ 처음에는 원전이 뭔지도 몰랐어요, (원전이 들어와야) 군이 잘살고 군민들이 잘산다고 했어요”라며 2010년 유치 신청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그는 연세가 많은 노인들이 경사가 심한 석리에서 사는 건 너무 힘든 일이라는 것도 전했다. 그의 아내가“ (노인들이) 이제 평지에서 살고 싶어해요”라고 덧붙였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석리의 북쪽에 자리잡은 경정리였다. 경정리는 석리와 달리 평지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경로당이 눈에 들어와 찾아가보았다. 경로당 안에는 할머니 예닐곱 분이 있었다. 할머니들은 원전에 대해서 물어보자 많은 이야기를 꺼냈다. “공무원들은 난리쳐도 백성들은 다 반대야” “(원전이 들어오면) 젊은 사람들은 어디에 가도, 나 같은 사람은 못간다”, “돈 몇 푼 받아봐야 도시에 방 한칸도 못구한다” 그녀들이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전 유치에 대해서 찬성하는 석리 주민들에 대해서 물으니, “그 동네는 사람살기 불편하니까 (원전이)들어온다카니까 좋다고 하지”라고 대답했다.
예정부지에 대한 답사를 마치고 시내로 돌아왔다. 마지막 일정으로 원전 유치에 대해서 찬성하는 주민단체 대표를 만났다. 김영규 천지원전추진운영대책회 회장은 활동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군수의 뜻에 따라 민간단체에서 할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이들에 대해 “환경이 나빠지고 농수산물 가격이 떨어진다는 건 엉터리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들은 제주도하고 여기저기 돌면서, 전국적으로 반대하는 사람들이에요. 많은 군민들이 그들을 종북세력이라고 보고 있습니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국가가 원전 건설에 대한 대가로 지역 발전에 확실한 도움을 줘야한다고 주장하며 “카지노, 복합 리조트 같은 큰 걸 터뜨려줘야한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터미널로 돌아왔다. 많은 노인들이 터미널 의자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무심한 그들의 얼굴에 영덕에서 만난 주민들의 얼굴이 겹쳐졌다. 의견수렴부터 제대로 해보자 는 사람, 당장의 삶이 힘들어 떠나고 싶은 사람, 원전 유치에 반대하는 사람, 찬성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의 주민들에게는 뭐가 옳은 건지 판단하기 위한 정보조차 충분히 주어지지 않은 상태였다. 일부의 성급한 계산으로 유치 신청했던 원전이 지역 갈등의 씨앗이 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전이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무엇일까?
숨겨진 원자력의 도시, 대전
지난 7월 16일, 종로구에 위치한 참여연대에서는‘ 2015 하반기 탈핵운동워크숍’이 열렸다. 행사는 원자력발전 관련 시설이 유치됐거나 유치 예정인 지역 대표자들의 발제를 통해 지역 현안이 공유되고, 탈핵 운동과 방향에 대한 각 단체의 의견이 소개 되는 자리였다. 행사 시작 전, 참가자들이 자기소개를 할 때, 유난히 긴장한 목소리의 한 참가자가 있었다. 대전 유성구에서 온 안옥례 씨였다.

‘핵없는사회를위한공동행동’이 개최한 탈핵 워크숍에서는 대전을 포함한 각 지역의 상황이 공유됐다. ⓒ김대현 사진기자
대전 유성구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한전원자력연료’ 등 원자력발전 관련 시설이 있다. 연구용 원자로 ‘하나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시설에 보관 중인 핵 폐기물은 전국에서 두 번째로 많다. 얼마 전 원자력발전을 위한 핵연료를 제조하는 ‘한전 원자력연료’가 공장 세 개를 증축하겠다고 발표하며 주민들의 반대가 일었고, 곧 주민이 참여하는 민간환경감시기구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생겨났다. 주민들은 관련 조례 제정을 위해 서명운동을 진행했고, 세 달 만에 9,219명의 서명을 받았다. 안옥례 씨는 “여기 계신 분들에게 대전의 상황을 알리러 왔다”며 운동 과정에 겪었던 어려움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같은 지역 거주민이라도 원자력 시설 실태에 대해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서명운동 과정에서는 일부 주민들이 용지를 찢어버리는 등 고역을 겪었다.
워크숍이 끝난 얼마 뒤 안옥례 씨가 참여하고 있는 ‘유성 원자력안전 조례제정 운동본부’를 찾았다. 운동본부는 매 주 진행되는 운영회의에서 주요 안건을 결정한다. 회의에 참석한 열 명 남짓의 사람들 중에는 원자력 시설 인근 주민인 안 씨를 비롯해 평화캠프, 천주교 대전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정의당, 녹색당 등 다양한 단체 및 정당의 인물들도 포함돼 있었다. 운영회의는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열띠게 진행됐다.
회의가 끝난 뒤 안옥례 씨의 자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 씨는 원자력연구원과 한전원자력연료 바로 앞에 위치한 아파트에 살고 있다. 아파트에 입주할 당시 누구도 아파트 주변에 이런 시설이 근접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지 않았다. 한전원자력연료의 공장 증설을 저지하기 위한 서명운동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탈핵운동에 가담하게 됐다. 대전 원자력연구원에서는 2007년부터 지금까지 총 세 번의 사고가 있었지만 민간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안 씨는 “소방차가 줄줄이 들어가면 그걸 구경해야 할지, 당장 짐을 챙겨 떠나야 할지 모르겠다”는 불안을 전했다. 그는 핵발전은 해당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의 문제라고 말했다. “다 같은 생명이잖아요, 핵발전은 모두의 문제예요.” 그는 7살 난 딸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입장에서 다음 세대에 대한 걱정이 크다고 말한다. “금쪽같은 내 새끼들이 살 땅인데… 내가 (탈핵 운동을) 하지 않으면 우리 아이들이 피해를 입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니 원자력연구원이 한 눈에 들어왔다. ⓒ김대현 사진기자
오후 즈음 회의장소로부터 안옥례 씨가 살고 있는 주거단지로 이동했다. 15분 정도 차를 타고 가자 한국원자력연구원이 눈에 들어왔고, 곧 주거단지가 나타났다. 연구원에서 차로 5분도 채 떨어지지 않은 거리였다. 연구원 주변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둘러싼 아파트가 단지가 있었고, 근처 상가에는 학원과 마트가 주를 이뤘다.

원자력연구원 반경 2km 내의 주거지역에서는 3만 명이 넘는 거주민이 살고 있다. ⓒ김대현 사진기자
지역 주민들에게 대전 원자력연구원의 사고 은폐 사실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물었다. 대부분은 잘 알지 못한다고 대답했다. 봉산 동에서 66년을 살았다는 이종식 씨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했다. “예전에 공장이 들어섰을 때 그 근처 개울에서 물고기를 잡았는데 고기가 휘어져 있었어. 위험하다 생각해서 이쪽 원자력연구원 근처 도랑에서 물고기를 잡았더니 머리에 구멍이 나있는 거야…” 이 씨는 그 때 원자력발전의 위험성을 직감했다. 그는 원자력발전이 하루 빨리 중단되길 바란다.“ 사람 생명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어, 그게 가장 중요하지.” 느릿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였다.

학생들이 자주 오가는 버스정류장 옆에는 ‘대전유성 민간 원자력감시 조례제정 운동본부’의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김대현 사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