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이 국제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제 식상한 소리가 돼버렸다. 이미 많은 한국 대학에서 국제경쟁력 강화와 해외 교류 증대의 필요성을 지각하고 여러 정책을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국인 교원을 적극 확보하고 학위 과정에 재학 중인 외국인 학생 수를 늘리는 것, 영어로 이뤄지는 전공강의를 많이 개설하는 것, 교수들의 영어 논문 작성을 장려하는 것 등이 그 구체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정책이 양적 지표를 올리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어 대학의 질적 성장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어강의 수도, 외국인 교원 수도 늘어났지만 세계의 다른 대학과 견줘 봤을 때 내실을 많이 챙기지 못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국제화를 표방하며 추진하는 정책이 오히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다는 비판도 있다. <서울대저널>에서는 한국 대학의 국제경쟁력에 대한 여러 목소리를 듣고 대학 국제화 정책이 추구해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해봤다.
해외로 떠나는 한국 학생들
한국 대학이 질적인 측면에서 아직 국제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사실은 들어오고 나가는 유학생 수에서 여과 없이 드러난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교육지표 2013’에 따르면 고등교육 단계에 있는 전체 한국인 학생 중 해외 유학생의 비율은 4%로 OECD 전체의 비율에 비해 두 배 가량 높다. 반면 해외 유학 중인 한국인 학생 1인당 국내 외국인 학생 수는 0.5명으로 조사됐다. 2.9명으로 집계된 OECD 전체의 수치에도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다른 나라와 비교했을 때 더 많은 한국인 학생이 해외 대학에서 공부하고, 더 적은 외국인 유학생이 국내로 유입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더욱 심화된다. 학부와 석사과정은 국내에서 마친 학생들도 박사학위는 해외에서 따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장래에 전문연구자나 교수가 되고자 하는 학문후속세대다. 연구중심대학을 표방하고 있는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많은 한국 대학이 정작 미래의 연구자들로부터는 외면 받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한양대학교 윤해동 교수(비교역사문화연구소)는 “1990년대 이후 한국 대학에서는 더 이상 학문후속세대가 양성되지 못하고 있다”며 “지금의 한국 대학은 미국 대학원의 ‘피더 스쿨(feeder school)’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피더 스쿨’이란 말 그대로 미국 대학원에 먹이를 공급해주는 학교를 의미한다. 서남표 전 한국과학기술원 총장도 그의 저서 《한국 대학의 개혁을 말한다》에서 ‘피더 스쿨’이란 표현을 사용하며 한국 대학원 교육의 낮은 질을 비판한 바 있다. 미국 국제교육원(Institute of International Education)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2014학년도에 미국 대학에서 공부한 한국인 유학생은 6만8047명으로 전체 미국 유학생 중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들이 떠나는 이유
그렇다면 학문후속세대에게 해외 대학원, 특히 미국 대학원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풍부한 장학금•생활비 지원 등 각종 복지혜택을 꼽을 수 있다. 조동준 교수(정치외교학부)는 “나머지 조건은 전부 같은 상황에서 한쪽에서는 장학금에 생활비까지 지원해주겠다는데 어떻게 그리로 가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미국에 비해 열악한 한국 대학원의 장학금 지원 현황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한국에서는 아무리 뛰어나게 공부해도 받을 수 있는 금전적 혜택이 등록금 면제에 고작 월 삼십여 만 원뿐이지만,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에 가면 등록금 면제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보험과 월 1,500 달러 정도의 기초생활비까지 제공받을 수 있다”고 했다. 해외에서 공부할 때 더 많은 비용이 들 것이라는 상식과는 달리 정말 뛰어난 학생이라면 해외에서 훨씬 적은 비용으로 더 좋은 교육 환경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조 교수는 “한국에서는 대학원 중심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아직 사회 전반의 준비가 안 돼있다”고 지적했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말하면서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 프로그램의 질이다. ‘OECD 교육지표 2013’에서는 ▲주요 유학 대상국에 유수의 교육기관 비율이 높다는 점 ▲인기가 높아지는 유학 대상국의 대학 순위가 상승하고 있다는 점 등을 근거로 들며 학생의 고등교육기관 선택에 있어서 교육 프로그램의 질이 중요한 결정요인 중 하나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서울대 교육의 질은 학교의 국제적인 명성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다. 메이비스(경영 14) 씨는 “서울대에서의 다양한 학내•외 활동에 대해서는 만족하지만 강의의 밀도나 커리큘럼의 체계성 측면에서는 부족함을 느낀다”며 서울대 교육의 질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메이비스 씨는 싱가포르 출신으로 싱가포르국립대학교를 다니다가 2014년에 서울대에 입학했다. 조동준 교수는 “연구, 교육, 사회공헌 등 대학의 세 가지 역할 중 서울대가 가장 약한 지점은 교육”이라면서, 그 이유로 연구 실적 중심의 교원 평가 체계를 들었다. 교수들을 논문 게재 실적만 가지고 경쟁시키다 보니 학교 전체가 학생 교육에는 소홀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또 그는 학생들이 창의적 도전을 회피하도록 압박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한국 대학 교육의 질 저하에 영향을 미쳤다고 덧붙였다.
무엇보다도 예비연구자들에게 미국 대학원이 한국 대학원에 비해 매력적으로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현재 미국이 사실상 학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희대학교 김종영 교수(사회학과)는 그의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에서 미국 대학이 세계적인 지배력을 가지게 된 역사적•구조적 원인 중 하나로 ‘선도자의 이점’을 꼽았다. 연구의 양과 질에 있어서 이미 우위를 점한 미국 대학으로 전 세계의 우수한 연구자와 학생들이 몰리고 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한국 학생들은 수업시간에서부터 미국 이론과 방법론, 그리고 미국 학자들의 글로벌 헤게모니를 경험하게 된다”고 서술했다. 학부 때부터 미국 박사 학위를 가진 교수의 수업을 들으며, 미국 대학의 유명한 교수가 저술한 교재로 공부를 해 온 한국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미국 대학으로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또 대부분의 한국 대학에서 교수 임용 조건으로 영어 논문을 요구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학문후속세대가 영어권 국가인 미국으로 가야만 하는 이유는 더욱 명확해진다.

대학원 교육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
윤해동 교수는 한국 대학이 연구중심대학으로서 대학원의 기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교수들이 앞장 서 국내 대학원에서 학문후속세대를 길러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전문연구자나 교수가 되고자 하는 우수한 학생들이 한국 대학원에서 논문지도를 받으며 학위를 취득해야만 장기적으로 미국 학계에 대한 종속으로부터 벗어나 한국의 독자적인 학풍을 만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윤 교수는 “모든 우수한 학생들이 미국 대학원에 가서 미국 풍토에 맞는 방법론과 개념론으로 교육을 받고 있는 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각 국가만의 이론 체계가 따로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이론은 기본적으로 보편성을 추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을 추구하되 그 시작은 연구자가 속해있는 지역사회여야 한다”고 말한다. 연구자의 지역사회야말로 연구자가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윤 교수는 한국 사회를 기반으로 하면서, 전 세계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이론에 대해 강조했다. 또한 그는 “국내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더라도 해외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근무하는 등의 방법으로 얼마든지 국제적 감각을 기르고 경험을 쌓을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상지대학교 최종덕 교수(철학과)도 한국에서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이론이 자생적으로 나와야 한다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그는 대학원 유학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았다. 그는 자생 이론의 탄생을 위해서라도 외국에서 어떻게 공부하고 생각하는지를 잘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 최 교수는 “한국 대학의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외국 대학의 자유롭고 수평적인 분위기를 배워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 사회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미국을 중심으로 한 외국 유학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한국 대학에는 해외 대학과는 확연히 다른 위계적인 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 최 교수는 “해외 대학에서 엉뚱해 보이는 생각을 말해도 무시당하지 않는 실험실 분위기를 배우고, 나이 먹은 교수들도 계속 공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익히 배워온 사람들이 한국에 자리만 얻으면 금세 고약한 한국방식으로 되돌아간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김종영 교수도 그의 저서 《지배받는 지배자》에서 “한국 학계의 유교적이고 권위주의적 위계질서는 개방적이고 비판적인 연구 활동을 방해한다”며 학문의 자율성과 실력 위주로 학계를 재편할 필요성을 언급했다.

<서울대저널> 다큐 ‘내겐 너무 어려운 영어’ 갈무리. ⓒ박나연 PD
준비 안 된 국제화 정책, 오히려 국제경쟁력 약화 불러와
많은 학자들은 한국 대학이 국제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영어강의, 외국인 교원, 영어 논문 등과 같은 외형적인 측면에 집중하기보다는 학문의 내실을 키워야 한다는 데 동의한다. 또 정량적 지표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대학의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영어강의다. 현재 서울대의 각 전공에서는 졸업하기 위해 필수적으로 들어야 하는 영어강의의 수를 정해놓고 있다. 예를 들어 경영학과의 경우 전공과목 중 5개 이상을 영어로 들어야 한다. 이에 대해 이광근 교수(컴퓨터공학부)는 “학생들에게 영어강의를 강요하면 수업에 대한 이해도만 떨어질 뿐”이라며 쉬운 모국어로 하는 학습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영어공부의 중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전문연구자로서 연구 결과물을 전 세계의 학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전공 지식을 처음 쌓는 단계에서만큼은 영어가 장애물이 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이 교수는 “대학에서 국제화 정책을 추진하는 궁극적인 목표는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학문을 하자는 것”이라며 “쉽고 편안한 모국어로 기본기를 몸에 심는 공부를 사소하게 생각하면 안 된다.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깊이 있는 공부를 달성할 수 있는 인재를 최대한 많이 키우는 훈련법은 쉽고 일상적인 모국어로 공부하기”라고 말했다.
외국인 유학생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체계의 미비도 문제다. 싱가포르 출신인 메이비스 씨는 “다른 한국인 학생들과 똑같이 입학했음에도 불구하고 반 학생회 활동에 대한 안내를 전혀 받지 못했다”며 “많은 외국인 입학생들이 그로 인해 한국인 학생들과 어울리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외국인 학생 업무를 담당하는 국제협력본부와 단과대 사이의 소통 부재로 인해 필요한 행정서비스가 제때 제공되지 않는 문제도 지적했다. 해마다 서울대의 학위과정에 재학 중인 외국인 학생 수는 늘어나고 있지만 아직도 그들을 수용할 제도적 기반은 갖춰지지 않은 실정이다.
1990년대를 거치며 한국 사회에 불어온 세계화의 바람은 대학가에도 큰 영향을 줬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각종 대학평가 기관이 국제화 부문에 높은 비중을 부여하면서 대학들은 더욱 결사적으로 양적 지표들에 목을 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한국 학생들은 외국 대학원으로 떠나고 있으며 각종 국제화 정책의 문제점도 드러나고 있다. 이제는 한국 대학의 역사와 특수성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국제경쟁력의 질적 성장을 고민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