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만능주의

교육만능주의의 허상과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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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혹자는 교육이 바뀌어야 한국이 산다고 한다. 정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시민교육을,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경제교육을, 소통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국어교육을, 폭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인성교육을, 국가관을 통일하기 위해서 역사교육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들은 지금까지의 사회문제들은 모두 교육에 문제가 있어서 발생한 것들이라는 느낌을 준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우리들은 다른 사회 영역에서 일어난 문제들의 원인들을 마치 나비효과를 역추적하는 것처럼 교육문제로 돌리는 것은 아닐까.

 

  교육에 대한 문제의식은 잦은 교육과정의 변화로 이어진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은 2007년 이래로 수 없이 바뀌어왔다. 2007년(2월), 2008년(2월, 9월, 12월), 2009년(3월, 12월), 2010(5월), 2011년(8월), 2012년(3월, 7월, 12월), 2013년(12월), 2015년(9월)에 걸쳐 교육과정은 변화해왔다. 아마도 지금 학교를 다니고 있는 대부분의 학부생 및 석사들은 이 격동의 시간 속에서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기간의 교육과정 변천을 직접 몸으로 겪은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야 할 시간이다. “그래서 무엇이 바뀌었나? 우리 사회 문제는 해결되었는가?”

교육은 램프의 요정 지니가 아니다.

  국회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당시 내가 맡은 일은 의원실로 들어오는 법률 제·개정안을 분류하는 작업이었다. 개인적으로 정말 멋져 보이는 법률안을 들고 이 법안은 통과가 어렵지만 시의성이 있다고 말하며 비서관에게 설명하고 있었다. 비서관이 나에게 이렇게 물었다. “이것을 통과시키면 교육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나?” 그래서 나는 “교육이 나아진다는 게 뭐라고 생각하시나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비서관이 다시 물었다. “자네가 사범대생이니까 자네가 알겠지. 그래, 좋은 교육이 뭔가? 나도 궁금하네.” 그래서 나는 교사 1인당 학생수, 학교폭력 근절, 학교시설 개선 등에 대해서 마구 떠들었다. 비서관이 웃으면서 말했다. “정책 말고 이 친구야, 좋은 교육의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보게” 그래서 교육의 대표적인 외재적 목적인 국가발전, 사회통합, 경제성장 등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비서관이 말했다. “완전 램프의 요정 지니네! 이것을 다 책임져야 좋은 교육이라니 너무 비현실적인 것 같아.” 

  많은 사람들이 교육을 램프의 요정 지니처럼 생각한다. 소원을 말하면 들어준다! 그런데 나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간과한 사실이 있다. 교육이라는 이름의 요정은 소원을 들어주긴 한다. 그런데 15년 뒤에 효과를 볼 수 있다. 램프를 확보한 사람은 자신의 소원을 들어달라고 외친다. 그런데 몇 년 혹은 몇 달 뒤에 다른 사람이 그 램프를 빼앗아 외친다. 이전 소원은 됐고 자기 소원을 들어 달라고 한다. 주문 발동에 걸리는 시간은 15년인데 도무지 틈이 없다. 만일 15년을 꾹 참고 기다리면 소원은 그대로 이루어질까? 그것도 보장할 수 없다. 우리가 교육을 만능이라 생각하지만 교육은 만능이 아니다.

미래로 향하는 길

  우리가 사회문제를 가운데 두고 교육과 연결 짓고 있는 행위들은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다. 사회문제를 인식하는 것도 사람마다 다르고 그에 연결짓는 교육영역도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에 교육정책은 매번 바뀐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교육은 현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는 것이다. 교육은 미래 세대를 위한 계획하에 교육의 내재적 목적뿐만 아니라 외재적 목적까지 아울러 장기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문제들을 교육책임으로 돌리는 것은 지금 해결할 의지가 없다는 의지의 표현과 다르지 않다. 문제를 타자화(他者化)하며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그 해결은 후세대에게 맡기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교육을 바라보는 관점이 이렇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교육을 현재의 도구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분야는 정치권이다. 현재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교육문제를 정치 문제로 끌어들이는 것은 교육이 추구해야 할 본질을 흐리고 교육문제가 정치적 논쟁으로 끌려들어가도록 만든다. 교육의 정치화에서 가장 큰 문제는 사람들이 가진 교육에 대한 시각을 근시안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교육을 정치적으로 생각하면 할수록 정작 교육에 대한 이야기는 사라지게 된다. 최근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첫 시작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였으나 지금은 친일파와 종북 논란으로 이어진다. 이 안에서 역사의 학문적 속성과 자유로운 교육에 대한 논의는 점점 무시 받는다. 교육을 통한 현재의 욕구 해소는 다시 또 다른 불만을 만들어내고 현 상황을 타개하고자 다시금 교육을 뜯어고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이 상황에서 고통 받는 것은 우리의 미래인 학생들이다.

  교육정책은 교육을 위한 정책이어야 한다. 경제적 논리나 사회적 논리, 역사적 논리가 주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 인간을 횡적이 아닌 종적으로 보며 그 사람을 위해 세심하게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은 바로 앞에 직면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서야 한다. 그것이 교육만능주의의 허상을 깨고 우리 사회를 앞으로 끌어갈 것이다.

김경호(교육학과 석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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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만능주의를 누구보다도 신봉하며 사회문제를 교육으로 해소하고자 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나라 교육이 길러낼 한국인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평범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아니어도, 교육이 아니어도 우리 사회 문제를 해결할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행동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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