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호가 나왔다. <서울대저널>의 정기자가 되어 쓰는 첫 기사들이 실렸다. 경험과 능력에 비해 버거운 주제들을 골랐고 그래서 힘들었다. 7년 전 고등학생 시절, 신문을 통해 막연하게만 접했던 용산 참사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고 싶다는 개인적 욕심에서 시작한 취재였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들었고, 그들의 이야기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담아내고 싶었지만 부족한 역량과 한정된 지면으로 인하여 그럴 수가 없다는 게 참 아쉬웠다.
‘기억은 권력이다’라는 코너의 이름은 처음 들었을 때부터 인상에 깊게 남았다. 유용태 교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우리는 애도에 참 후하다. 한국 사람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아낌없이 애도를 표한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 때 그랬고 세월호 참사 때 그랬다. 심지어는 머나먼 파리에서 테러가 일어났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애도를 표했다. 단순히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가방에 리본을 매달고 페이스북의 프로필 사진을 바꾸었다. 문제는 사람들이 애도를 표하고 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슬랙티비즘(slacktivism)’이라는 단어가 있다.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노력이나 행동에는 나서지 않는 게으른 행동주의를 의미하는 단어다. 가방에 노란 리본을 다는 것,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다. 쉬운 만큼 실제로 시스템을 바꾸는 데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자 프로필 사진은 원래대로 돌아갔고 가방의 리본은 단순한 액세서리로 전락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인터넷 기사에는 어김없이 “또 세월호야?”라는, 불평 섞인 댓글이 달린다.
애도의 감정은 순간적으로는 더 강하게 표현되지만 지속적으로는 결국 희미해진다. 아무리 애도를 표한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슬픔에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렵다. 타인의 애도는 당사자에게 분명 힘이 되겠지만 그것만으로 슬픔이 완전히 해소될 리도 없다. 물론 애도는 필요하겠지만 그것만큼 기억 또한 필요하다. 집단의 기억을 통해서 공론이 형성되고 시스템을 바꿀 수 있는 감시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억을 통해서 시민들은 비로소 정부에 그들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힘, 다시 말해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기억은 권력이다’는 본래 <서울대저널>에 있었다가 폐지된 코너이다. 기사로 쓰기 ‘괜찮은’ 소재를 발굴해내기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135호에서 이 코너가 부활한 것은 <서울대저널>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괜찮은 소재들이 다시 생겼다는 뜻이지만, 사실 이 괜찮은 소재들은 한국 사회 전체로 보면 전혀 ‘괜찮지 않은’ 사건들이며 동시에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고 있는 일들이다. <서울대저널>에서 굳이 상기시킬 필요가 없을 만큼 사람들이 지나간 사건들에 대해 또렷이 기억할 수 있기를, 그리하여 <서울대저널>에서 다시금 ‘기억은 권력이다’라는 코너가 없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