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 품이 많이 드는 일

  95년생인 기자에게 이번 총선은 첫 투표였다. 첫 투표인만큼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던 각 정당들의 현수막과 선거 공보물을 자세히 살펴보게 됐다. 여러 슬로건과 공약들이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동성애 확산과 이슬람 침투를 막아 대한민국을 바로 세우자”는 기치를 내건 한 원내 정당의 현수막이었다. 동성애와 이슬람이 가정과 대한민국에 유해하다고 말하는 그 정치 슬로건은, 노골적인 혐오의 표현이었다.

  “할랄 단지 조성 계획 중인 익산시에 무슬림 30만 명이 거주하게 되면 대한민국은 테러 안전국에서 테러위험국으로 전락.” 해당 정당의 선거 공보물에는 할랄 체험의 계기가 됐던 근거 없는 왜곡과 오해들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명백한 혐오의 언어가 선거 슬로건이 된 것을 보면서, 차별할 권리가 당당하게 요구되는 사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별과 혐오가 만연한 세상이다. 그리고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이런 차별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 같다. 무심결에 내뱉는 언어가, 행동이, 시선이 차별이고 혐오라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어버린다. 폭력적인 일반화와 타자화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과 이야기들을 지워버릴까. 당연한 이야기지만, 2주 동안 할랄 식품 체험을 하면서 만난 무슬림은 테러범이 아니었고, 할랄은 테러범 유입의 도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이 당연한 사실은 일반화와 타자화 속에서 쉽게 잊혀져버린다. 할랄 관련 기사를 찾으면서, 많은 인터넷 뉴스의 댓글들이 무슬림을 ‘잠재적 테러범’으로 일반화하는 것을 봤다. 이렇게 일반화된 무슬림들은 ‘정당하게 혐오 가능한 집단’이 됐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한국 사회에서 저마다의 방식으로 할랄이라는 삶의 양식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결코 일반화될 수 없는 다양한 주체들이다.

  이들의 삶을 이해해보고자 할랄 체험을 시작했지만, ‘이 짧은 체험을 통해서 과연 얼마만큼 무슬림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도 들었다. 이태원에서 만난 한 한국인 무슬림은 기사의 취지를 설명하자 대뜸 “저희는 2주가 아니라 평생이거든요”라고 말했다. 순간 일주일 동안의 할랄 체험이 불편하고 힘들다고 칭얼댔던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이해에는 많은 시간과 품이 든다. 그리고 그 노력이 항상 더 깊은 이해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일반화의 이유가 될 순 없다. 혐오가 만연한 지금은, 한 번 더 들여다보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시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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