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가해의 역사 조명하기

베트남 전쟁 한국군 파병에 대한 사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빈호아 마을에 있는 한국인 증오비 ⓒ길담

▲빈호아 마을에 있는 한국인 증오비 ⓒ길담

  1964년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 간의 내전에 개입하면서 베트남 전쟁은 국제전으로 확대됐다. 한국은 한국전쟁 당시 도움을 준 미국에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베트남 전쟁에 1964년부터 1973년까지 총 25만 명 정도를 파병했다. 한국 사회는 참전의 대가로 한국이 미국으로부터 받은 경제적 지원이 70년대 눈부신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라 서술한다. 이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을 기억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이지만, 동시에 베트남 전쟁의 어떤 측면도 온전히 담지 못한다.

우리가 모르는 역사가 있다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민간인 학살)’ 통계는 여전히 2000년 제주인권학술회의에서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가 발표한 내용을 따른다. 해당 통계는 총 80여 건의 학살로 9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고 밝힌다. 그러나 베트남에서는 현재까지도 사체 발굴을 통해 새로운 피해자가 확인되고 있다. 공인된 정부 차원의 조사 없이 20여 년 전에 발표된 개인 연구자의 추정치에 의존하는 모습은 한국사회가 베트남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을 드러낸다.

  베트남 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이 한국 사회에 처음으로 알려진 것은 1999년 <한겨레 21>의 기사를 통해서다. 기사의 반향으로 ‘미안해요 베트남 운동’이 진행됐고 관련 단체들도 생겨났다. 안타깝게도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심은 지속되지 못했고 2003년부터 점차 소강 상태에 이르렀다. 침체기의 끝은 2015년 4월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가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피해 사실을 증언하며 찾아왔다. 그 이후 하미마을, 퐁니·퐁넛마을의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가 원고로서 한국 정부를 소송하는 민간 모의 법정인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시민평화법정’이 열리기도 했다.

  시민단체의 활동은 존재했지만 베트남 전쟁에 대한 한국사회의 인식은 일면적이다. 베트남 전쟁은 주로 ‘월남전 파병 용사’와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특수’와 엮여 언급될 뿐이다. 그 예로 한국 역사 교과서는 현재까지도 베트남 전쟁으로 인한 경제 특수를 강조한다. 이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의 존재는 쉽게 지워진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임재성 변호사는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라 평하며 “미국 사회 내부에서 이라크 전쟁을 통해 미국 경제가 발전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임 변호사는 베트남 전쟁에 대해 경제특수만 언급하는 상황이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아무런 가치 판단이 이뤄지지 않은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제라도 한국 사회에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뜻이다.

전쟁은 국가가 시켰다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참전 군인)’들은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부정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국제대학원 박태균 교수(한국학과)는 참전 군인들이 ‘베트콩을 죽였지 민간인 학살을 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며 “(참전 군인들의 입장에서) 본인이 베트남에 가서 민간인을 죽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쉽지 않겠지만 실제로 죽은 것은 민간인들”이라고 말했다. 참전 군인들이 민간인 학살 자체를 부정하는 행태는 민간인 학살 피해에 대한 발언을 저지하는 움직임으로 드러난다. 2000년 참전 군인들은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을 고발한 <한겨레>에 난입을 시도했으며 2015년엔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들이 한국을 방문해 직접 피해사실을 증언하는 기자회견장 주위에 모여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들을 압박했다. 베트남 민간인 학살 피해 사실에 대한 전면 부정은 전쟁 피해자들에게 2차 가해로 작용한다.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에 있어 참전 군인들은 가해 당사자다. 하지만 강제로 파병됐다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참전 군인들은 국가권력에 의한 피해자가 된다. 참전 군인에 대한 법률이나 정부의 지원은 파병 후 20년이 지난 1990년대에 들어서야 생겼으며 제대로 된 전투 수당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임재성 변호사는 “(자신들의 피해에 대해) 국가가 주목하지 않는 상황에서 베트남 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상황은 자신의 젊은 시절에 대한 부정과도 같았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참전 군인이 베트남 피해자와 같은 처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 또한 전쟁의 고통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석미화 사무처장도 베트남 전쟁의 주요 당사자인 참전 군인이 “역사적 성찰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대상물이 돼버린 현실에 대한 고민이 있다”고 털어놨다.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와 참전 군인이 개인 단위로 충돌하는 이유는 베트남 전쟁 파병에 근본적 책임이 있는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박태균 교수는 “(베트남 전쟁에 참여했던 개인의 동기가 무엇이든) 국가가 참전을 결정함으로써 (참전 군인들이) 베트남에 가게 된 것”이라며 “국가가 구조를 만들었으니 책임도 국가가 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전쟁에 참전한 군인 개개인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기에 앞서 그 명령을 내린 국가가 적극적으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조사를 하고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한국 정부의 본심

  갈등 해결에 앞장서야 할 한국 정부는 어떤 태도로 베트남 전쟁을 대하고 있을까. 석미화 사무처장은 “(베트남 전쟁에 대해) 한국이 사과한 줄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실제로는 사과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유감을 표명한 적이 있고 문재인 대통령도 ‘마음의 빚’이라고 언급한 적 있지만 공식적인 사과는 없었다.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참전 군인이 대립하는 가운데 국가는 묵비권을 행사하는 중이다. 2000년대 초반 국가정보원(국정원)은 민간인 학살 관련 자료에 대한 정보공개 요청에 정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에 2018년 민변 ‘베트남 전쟁 시기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위한 태스크포스’는 국정원을 상대로 해당 자료에 대한 정보공개청구소송을 시작했다. 공개를 요청한 구체적인 자료는 ‘퐁니·퐁넛학살사건’의 민간인 학살과 관련된 1969년 중앙정보부의 신문조서 목록 등의 문건이다. 국정원은 1심과 2심에서 베트남과의 외교 관계를 이유로 정보 비공개를 주장했다. 계속해서 정보를 공개하라는 판결이 나자 국정원은 관련된 제3자의 사생활 침해를 새로운 사유로 들어 다시 1심을 진행했다. 국정원의 강력한 침묵 의사에도 불구하고 올해 이뤄진 새로운 1심마저 정보를 공개하라는 판결로 마무리됐다. 계속되는 판결에도 불구하고 국정원은 여전히 관련 정보를 공개하지 않는 상태다.

  정보공개청구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임재성 변호사는 세 차례 진행된 소송을 통해 “국정원이 (베트남 전쟁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은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세 번째 소송에서 제3자의 사생활 침해를 사유로 든 것은 언론 인터뷰를 통해 공개한 바 있는 개인정보를 보호하겠다는 모순적인 주장이란 설명이다. 임 변호사는 이런 명목상의 거부는 “질 수밖에 없는 소송에서 시간을 끌기 위한 행위일 뿐”이라며 한국 정부가 “이미 50년이 지난 사건에 대해 적극적인 회피의사를 보인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 103명의 청원 기자회견 ⓒ한베평화재단

  한국 정부는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의 직접적인 사과 요구마저 외면했다. 지난해 4월 각각 퐁니마을과 하미마을 출신인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 2명이 직접 한국을 방문했다. 한국 정부에 민간인 학살 피해에 관한 진상조사와 사과 등을 요구하는 청와대 청원을 제출하기 위해서다. 청원을 요청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는 총 103명으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가 처음으로 한국 정부에 피해를 호소한 일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 최초의 공식 답변은 그간 계속된 문제 회피의 반복이었다. 관련 자료를 확인할 수 없고 베트남 정부와의 공동조사 여건이 조성되지도 않았다고 답했기 때문이다. 임재성 변호사는 “이는 사실상 아무 것도 하지 않겠다는 말”이라며 “현 정부가 일제 강제동원 문제에 대해서는 피해자 중심주의를 얘기하면서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여전히 보수적인 답변을 줬다”고 정부의 모순적 태도를 지적했다.

  베트남 정부가 베트남 전쟁 관련 문제 해결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는 것은 사실이다. 베트남 내부에서는 베트남 전쟁을 내전이 아닌 ‘항미항전’이라 일컬으며 승리한 전쟁으로만 기억하기 때문이다. 임재성 변호사는 “베트남 정부는 이 전쟁에서 군인들만 기억하고 영웅을 만들면서 민간인 학살 등은 (승리한 전쟁의) 부수적 피해로 본다”고 설명했다.

  당장 베트남 정부와의 공동연구가 어렵더라도 베트남 정부의 태도를 빌미로 책임을 회피하기 전에 한국 정부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 가해자임을 받아들여 사과하는 일이다. 석미화 사무처장은 “베트남이 한국의 사과를 원치 않는다는 것은 오해”라고 말한다. 베트남 정부는 몰라도 실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들은 사과를 원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민간인 학살에 대한 민간인 학살 피해 당사자 103명의 청원이 이를 뒷받침한다. 임재성 변호사는 “피해자들의 진상규명 요구가 있으면 최소한 자국군의 불법행위에 대한 검토 절차가 있어야 하는데 한국 정부가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에 대해 유감을 표했다.

아직 문제는 남아있다

  정부가 책임져야 할 문제는 민간인 학살 사건이나 참전 군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아직 조명조차 되지 않은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 중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과 한국계 혼혈아인 라이따이한 문제가 대표적이다. 한국군에 의한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 대한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1999년에 처음으로 한국 사회에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민간인 학살이 알려진 후 시민단체의 노력으로 그나마 공론화가 이뤄진 민간인 학살 피해자와 대비된다.

  베트남에 살고 있는 한국계 혼혈아인 라이따이한 문제는 더욱 복잡하다. 전쟁 중 성폭행뿐 아니라 참전 군인과 함께 베트남으로 간 기업 노동자와의 관계 등 다양한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라이따이한문제가 불거질 당시 모인 성금으로 이들을 위한 지원 사업이 생겼지만, 1970년대에 태어나 이미 성인이 된 이들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등 부적절한 방식의 지원에 불과했다.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있는 ‘베트남 피에타’ 동상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정의기억연대 윤미향 대표는 “(정부가 계속해서 책임을 회피한다면) 제 역할을 하도록 시민사회가 움직임을 이끌어내야 한다”고 말했다. 정의기억연대는 “정부가 책임을 다할 때까지 피해자 분들에게 기다리라고만 할 수 없다”며 2012년 전쟁 중 성폭력 피해 여성을 돕는 ‘나비기금’을 베트남에 보내기 시작했다. 일본군 ‘위안부’ 故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한국군에 의한 베트남 성폭력 피해 여성들에게 ‘한국 국민으로서 사죄드린다’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한국이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에 지속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이유에 대해서 “한국 사회는 사회적 역량이 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임 변호사는 베트남은 아직 (베트남 전쟁에서 일어난 피해 사실을 공론화 할) 사회적 기반이 갖춰지지 않았다”며 “응답하라는 피해자의 요구를 받았을 때 응답하는 것이 우리 사회가 갖춰야 할 의무”임을 강조했다.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에 대해 가져야 할 태도는 무엇일지 묻는 질문에 석미화 사무처장은 “생각해보는 것”이라 답했다. 우리는 “임진왜란보다도 길고, 한국전쟁의 두 배에 달하는 시간 동안 일어난 전쟁에 대해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정부가 주입한 기억”만 떠올린다. 아직까지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인식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한국 사회가 베트남 전쟁에 무관심한 까닭이다. 사과와 보상, 진상규명 등의 문제는 이를 저지른 나라가 의지를 가질 때만 가능하다. 임재성 변호사는 “우리가 폭력을 일으킬 수 있다는 공포가 있을 때 가질 수 있는 ‘저어함’”에 대해 얘기한다. 이런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전쟁에 대한 인식의 재정립이다. 가해의 역사와 그로 인해 발생한 참혹한 결과에 대한 들춰내기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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