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40년대, 전쟁이 휩쓸고 지나간 프레디 퀠의 삶은 폐허 그 자체다. 참전군인인 그는 사회에 복귀했지만 삶의 리듬을 회복하지 못한다. 트라우마로 마음이 고장나버렸지만 가족도 없고 군병원의 정신치료도 거부한 프레디는 어떤 보살핌도 받지 못한다. 그는 전쟁 때문에 연인과 헤어졌다는 상처에서 비롯한 성도착증세를 보이고, 백화점의 사진기사로 일하다가 손님에게 행패를 부려 해고되기도 한다. 전쟁은 끝났지만 남겨진 프레디의 삶은 여전히 전쟁 중이다. 그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소망과 의지를 잃어버린 채 떠돈다.

벼랑 끝에서 만난 마스터
절망적인 삶 한가운데 내던져진 프레디의 선택지는 술에 기대 절망을 외면하는 것뿐이다. 그는 위험한 액체들을 혼합한 술을 마시며 갈증을 달래보려 한다. 계속해 자극을 높여보지만 폐허가 된 마음에서 비롯한 그의 갈증은 술로는 풀릴 기미가 없다. 술은 프레디를 더 비참한 벼랑으로 몰아갈 뿐이다. 프레디는 백화점에서 해고된 후 농장에 들어간다. 농장에서 프레디가 제조한 술을 마신 노인이 기절하자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며 쫓아낸다.
만취한 채 우연히 탑승한 유람선에서 프레디는 랭케스터 도드를 만난다. 랭케스터는 스스로를 “작가이자 의사이고 핵물리학자이자 이론철학자”라고 소개한다. 그는 정도(正道)를 벗어나 헤매는 프레디의 처지를 단박에 꿰뚫어본 후 프레디의 술을 극찬하며 접근한다. 술은 프레디를 벼랑으로 내몬 장본인이지만 랭케스터에겐 ‘놀라운 음료’다. 환영받지 못하던 존재가 특별한 손님으로 역전된다. 그는 자신이 이끄는 ‘코즈’라는 모임에 프레디를 초대한다.
트라우마에 대한 랭케스터의 처방은 간단하다. 바로 시간여행을 떠나 과거의 스스로를 마주하는 것. 마치 최면에 든 것처럼 기억을 떠올린 후, 그 시절에 얽힌 고통을 극복하면 된다. 이것이 랭케스터의 ‘일반 프로세싱’ 치료다. 과거의 문제가 현재 나를 아프게 하면 그때로 돌아가 문제를 제거하면 된다는, 핵심을 찌르는 발상이다. 코즈 회원들에게 프로세싱 치료의 유익을 말하는 랭케스터의 논리는 참으로 명료하고도 유려해 듣는 이를 현혹시킨다.
아쉽게도 시간여행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프로세싱이 사람의 심리를 치료하기 위해선 세뇌와 암시가 필요하다. 랭케스터는 화려한 언변과 통찰력으로 코즈 회원들의 마음을 파고드는 데 성공한다. 프로세싱에 참여한 사람들은 초월적 경험을 통해 치유받았다고 고백한다. 처음 몇 개의 증언은 다른 회원들의 믿음을 이끌어내는 ‘데이터’가 된다. 랭케스터는 프로세싱이 감각을 깨우는 작업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 반대다. 사람의 마음에서 가장 취약한 한구석을 점령해 시야를 가리는 기만적 치료법이기 때문이다.
프레디 역시 랭케스터에게 프로세싱 치료를 받는다. 그 과정에서 프레디는 연인과의 이별을 떠올린다. 그를 가장 괴롭게 하는 기억이다. 이를 간파한 랭케스터는 섬세하고 교묘하게 프레디의 취약한 내면을 뒤흔들어놓는다. 그는 프레디에게 트라우마를 해소할 수 있다는 희망을 보여준다. 그의 카리스마에 프레디는 충성한다. 프레디에게 랭케스터는 ‘마스터’이고 코즈는 ‘낙원’이다.
프레디는 폐허에서 만난 랭케스터를 완전한 구원자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그는 때때로 의심할지언정 충실하게 랭케스터의 곁을 지킨다. 그러나 랭케스터는 프레디와 마찬가지로 불완전한 ‘사람’일 뿐이다. 프레디가 랭케스터를 신뢰하는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절실하게 랭케스터는 프레디에게 의지한다. 그는 프레디의 망가진 마음을 도구 삼아 자기 능력을 증명하고자 한다. 진정 완전한 존재라면 스스로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불완전한 구원자가 베푸는 치유는 완전할 수 없다. 계속되는 프로세싱에도 전쟁과 이별의 트라우마는 집요하게 남아 프레디의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고통스러운 기억은 오히려 프로세싱이 반복될수록 사납게 되살아나며 그를 괴롭힌다. 프레디는 어느 순간부터 랭케스터라는 인간과 프로세싱 치료의 불완전함을 감지한다. 복잡한 형태로 지속되던 그의 신념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냥, 이게 나’이므로
결정적 깨달음의 순간은 불현듯 찾아온다. 랭케스터의 신간을 홍보하는 코즈 연합 총회에서 프레디는 문득 염증을 느낀다. 강단에서 랭케스터가 늘어놓는 세계와 인간의 문제에 대한 해답들은 빈껍데기처럼 헛되게 들린다. 프레디는 랭케스터와의 인간적 관계를 떠올리며 갈등하지만, 자신도 모르는 사이 삶의 방향을 정한다. 랭케스터와 함께 간 황무지에서 바이크에 올라 눈앞의 악어 머리 바위만 찍고 오겠다던 그는 랭케스터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프레디는 그대로 자신의 마스터를, 낙원을 떠난다.

코즈를 떠난 프레디는 전쟁으로 잃어버린 것들 중 어느 하나도 되찾지 못한다. 꿈을 가졌던 젊은 시절은 복원할 수 없는 과거에 머물러 있다. 사랑을 되찾고자 옛 연인을 찾아갔지만 그녀는 이미 누군가와 결혼해 먼 곳으로 떠났다. 이 모든 정황이 프레디에게 말한다. 너의 삶은 여전히 삐걱거린다고. 프레디는 파리한 얼굴로 절뚝이며 코즈 바깥의 세상을 배회한다. 랭케스터와 함께할 때 그의 얼굴에 가득하던 충만감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다만 프레디는 연약함마저 그의 일부로 끌어안음으로써 삶의 전환점을 맞이한다. 코즈를 떠난 후, 프레디는 영국에서 랭케스터와 그의 아내 페기와 재회한다. 프레디의 창백한 안색을 보고 나을 순 없냐고 묻는 페기에게 그는 답한다. “그냥, 이게 나예요.” 랭케스터는 프레디를 붙잡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프레디는 더 이상 몸과 정신에 스며든 상처를 지우려 하지 않는다. 상처입을 수밖에 없는 나약함을 부인하지 않는다. 나약함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불완전한 존재에 기대려 하지 않는다. 프레디는 자신의 연약함을 고스란히 직면하고 나서야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