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차별도 익숙해질 때가 있다. 너무 오랜 세월 차별을 당연하다고 배우며 살아와서, 이젠 차별인 걸 알아도 견고해진 세상의 질서를 바꾸기는 쉽지 않아서. 일상을 살아가는 왼손잡이는 매 순간 왼손잡이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오른손 질서에 부딪힌다. 일상 곳곳에 이 질서가 얼마나 견고하게 뿌리내렸는지 깨닫는다면, 대부분의 왼손잡이가 후천적 양손잡이로 길러진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으리라. 왼손의 ‘왼-’이란 접두사는 ‘그르다, 틀리다’란 뜻이다. 누가 ‘오른(옳은) 손’을 정하는가? 누가 다수의 이름으로 이들의 존재를 지우고 억압하는가? 우리 곁에 만연한 대안없는 ‘오른손 질서’와 왼손잡이의 고충들을 사진에 담았다.

#1. 오른손만 머무는 곳

집 안과 밖에서 접하는 물건의 대다수는 오른손으로 뻗어서 잡을 수 있도록 설계·배치돼 있다. 왼손으로 같은 작업을 수행하는 게 불가능한 수준이다. 키보드판의 주요 키들과 마우스, 문손잡이 위치와 카메라의 셔터키 위치, 대중교통의 교통카드 단말기 위치 등이 그렇다. 한편 주된 기능이 오른쪽에 편중된 컴퓨터 화면의 디자인을 비롯해 수도꼭지의 찬물·더운물 밸브, 오른손으로 잡았을 때만 그림이 제대로 보이는 대다수의 생활용품 디자인도 오른손 질서를 반영한다.

#2. 오른손에 편하게,더 편하게

  글씨를 쓰는 통일된 방식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다. 오른손잡이는 자신이 쓴 글씨를 확인하며 손에 묻지 않고 글을 쓰는 반면, 왼손잡이는 자신이 쓴 글을 가리며 나아가느라 번짐 등 영구적인 불편을 겪는다.

  책장은 오른손으로 넘기기 쉽게 되어 있고, 전등 스위치도 오른쪽으로 눌러서 켜는 경우가 많다. 약병 뚜껑, 문고리, 나사의 날처럼 회전운동이 필요한 경우 진행방향은 전부 오른쪽에서 왼쪽이며, 이는 왼손으로 힘을 가하기 불리한 방식이다. 믹서기·오븐·전자레인지 등의 가전제품에 달린 센서 역시 우측 회전으로만 작동한다. 결국 왼손잡이들은 이런 실용적인 측면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편한 손이 거세당한 채 ‘오른손잡이화’되고 만다.

#3. 대안은 있을까?

  우리의 일상 속 모든 곳에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대안 없는 오른손 질서를 바꾸기 어렵다면, 적어도 도구에서만큼은 왼손잡이를 위한 대안이 필요하지 않을까? 실제 왼손잡이들이 가장 크게 불편함을 느끼는 도구인 칼과 가위는 별도의 설명이 없다면 대부분 오른손용이어서 왼손잡이가 사용할 경우 작동이 불편하고 위험하다. 왼손잡이 용품 중 가장 널리 보급된 것은 가위지만 이마저도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국내에서 왼손잡이용 칼은 온라인에도 전무한 실정이어서 일본식 횟칼을 제외한 가정용 보급형 칼은 구하기조차 어렵다. 왼손을 강제로 교정하는 추세가 줄어들면서 왼손잡이의 수는 증가하고 있는데, 왼손잡이용품은 그 수가 극히 제한적이어서 이들의 필요를 충족시키지 못한다. 안전하게 자신의 손을 사용할 권리가 보장되려면 앞으로 키보드, 젓가락, 칼과 카메라에 담긴 일상의 수많은 차별적 질서에 ‘왼손’이라는 대안이 생겨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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