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시하지 않기 위해

  이번 호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착취입니다. 착취가 지나치게 일상화된 탓에 ‘착취는 옳지 않다’는 감각이 무뎌지기 쉽습니다. 어쩌면 이런 감각의 마비는 무의식이 택한 생존방법일지 모릅니다. 모든 착취를 체감한다면 이를 견디며 살아가기 힘들겠죠. 하지만 이는 착취가 낳는 모순을 잊어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착취를 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는 사실이 ‘착취를 잊고 살아도 된다’는 당위를 정당화하지는 못하니까요.

  효율성이란 명분 아래 ‘동물공장’이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비인간동물을 착취하면서 말이죠. 인형이니 괜찮다는 변명으로 리얼돌 체험방이 퍼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는 강화될 뿐입니다. 몰랐으면 편했을 ‘불편한’ 이야기, 그렇지만 알아야 하는 이야기. 좌시해서는 안 될 현실이었습니다.

  마감기간, 161호 기사를 살펴보다 흠칫했습니다. ‘자체휴강시네마’를 운영하는 박래경 대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독립·예술영화가 어렵고 우울한 영화라는 고정관념이 너무 세져 버렸다.” “코미디를 찍으라는 것은 아니지만 (중략) 숨 돌릴 틈이 있는 영화들이 만들어지면 좋겠다.” 어쩌면 좌시해서는 안 될 문제가 많다며 욕심을 낸 것이 아닐까. <서울대저널>을 두고 하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2020년 상반기, 코로나19가 바꿔놓은 일상에 적응하기도 바쁜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에 <서울대저널>이 숨 돌릴 틈도 없을 정도로 어렵고 우울한 이야기만 다룬 것은 아니었을까요. 돌이켜보니 기사를 쓰는 기자들도 많이 벅차하던 학기였던 것도 같네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 사회의 문제에 시선을 맞추느라 독자분들과 기자님들에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한 것 같아 걱정됩니다.

  이번 호를 끝으로 저는 편집장 자리를 다음 편집장에게 넘기게 됩니다. 스스로에겐 한없이 아쉽고 남들에겐 한없이 고마운 <서울대저널> 생활이었습니다. 저와 함께 달려온 기자님들께도, 부족했을지 모를 기사를 읽어주신 독자 분들께도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읽는 데 너무 벅차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함께 빽빽하게 채워넣은 161호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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