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임자가 없다.”
최근 후임 인사로 고민 중이라는 한 서울대 교수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떤 임무나 일에 알맞은 사람을 일컫는 말, ‘적임자’. 과연 교수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은 누구일까. 학계로부터 ‘알맞지 않은 사람’ 취급받는 여성박사들의 이야기가 여기 있다.
남자라는 ‘스펙’
E 씨는 ‘적임자가 없다’는 그 학과에서 10년간 강사로 활동했다. 해당 학과는 소위 여초 학과로 여학생 비율은 높지만 교수진의 성비는 정반대다. 학과 운영은 철저히 남성교수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E 씨는 인사권을 쥐고 있는 학과 남성교수들이 후임으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E 씨에 따르면, 학과 교수들은 주로 남성들이 학과 문화에 잘 녹아들 수 있는 ‘적임자’라며 남성 연구자들을 선호해왔다. E 씨는 교수들의 머릿속 차기 교수 후보에 여성은 제외됐다고 주장했다. E 씨의 주장은 사실일까. 해당 학과 졸업생들의 증언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학생들과의 회식 자리에서 ‘왜 여교수를 뽑느냐’는 말을 남긴 교수는 2018년 10월경 E 씨를 만나 “○○대학에 지금은 우리 전공 학과가 없지만 혹시 학과가 생기면 밀어주겠다”고 말했다. E 씨는 아직 학과도 개설돼있지 않은 학교에 E 씨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말에 서울대 교수 자리에 자신을 뽑지 않으려 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인문사회계열 강사 F 씨는 지난 2012년 박사학위를 받은 뒤 8년 동안 교수가 되기 위해 노력해왔다. 대학원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낸 그는 “졸업 후에 바로 잘 풀릴 줄 알았다”고 털어놨다. 교수가 되기 위해선 SSCI급 논문을 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F 씨는 논문 작성에 주력했다. F 씨는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도 논문에 매달리며 여러 대학에 교수 자리가 생길 때마다 지원했지만 번번이 탈락했다. 논문이 한 편씩 쌓일수록 의문도 쌓여갔다. F 씨는 “SSCI급 논문이 하나도 없을 때 교수 임용에 떨어지면 ‘논문이 없어서 그렇다’는 소리를 들었다. 논문을 하나 쓰고도 안 됐을 땐 ‘논문이 하나밖에 없어서 그렇다’고 얘기했다”고 회상했다. F 씨가 논문을 하나 더 쓴 뒤에도 탈락하자 주변에선 ‘두 개는 좀 아쉬워, 세 개는 있어야지’라고 얘기했다. 점차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교수님들은 논문이 제일 중요하다던데, 왜 나는 번번이 떨어지지?” F 씨 주변의 남자 연구자들은 SSCI급 논문 하나 없이도 교수가 되는 데 무리가 없었다. F 씨는 “여자라는 점에서 제일 중요한 스펙 하나를 놓쳤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정부와 대학은 무엇을 해왔나
E 씨와 F 씨의 사연은 교수 임용에 여전히 성차별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이러한 ‘유리천장’을 깨기 위해 지난 2003년 정부는 국공립대 여성교수 채용목표제를 도입했다. 정책의 핵심은 크게 두 가지였다. 우선, 여성교수의 정원을 별도로 마련했다. 전국 국립대 교수 정원을 1,000명 늘리며 이중 200명을 여성 정원으로 배정했다. ‘의자’의 개수 자체를 늘리고 그중 여성의 몫을 할당해 역차별 논란 등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것이었다. 서울대에도 32명의 여성교수 정원이 배정됐다. 정부의 여성 정원 배정은 여성교수의 수를 급증시켰으나 단발성 조치에 그쳤다. 2006년을 끝으로 정부의 여성 정원 배정은 중단됐다.
국공립대 여성교수 채용목표제의 또 다른 핵심은 법을 바꾼 것이다. 2003년 교육공무원법이 개정돼 국공립대는 3년마다 여성교수 임용계획을 수립하고 추진실적을 매년 교육부에 보고할 의무가 생겼다. 또한 대학의 적극적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임용계획과 추진실적에 대한 평가를 정부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과 연동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서울대는 2011년 국립대학 법인으로 법적 지위가 변하면서 교육공무원법 적용 대상에서 제외됐다. 여성교수 임용계획을 수립하고 추진실적을 보고할 의무가 사라진 것이다. 이에 대해 교무과 관계자는 “(법인화 이후) 여성교수 임용에 관한 법적 규제는 없어졌지만, 여성교수를 늘리기 위한 노력들은 계속 있어왔다”고 설명했다. 서울대는 올해 1월 ‘국립대학법인 서울대학교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서울대법)’이 개정되고 나서야 여성교수 임용 3개년 계획을 다시 수립하게 됐다.

현재 서울대는 본부 교원인사위원회 위원의 20% 이상을 여성이 맡도록 정관에 규정하고 있다. 이와 달리 단과대 인사위원회의 경우 여성위원의 비율에 대한 규정이 없다. 단과대 중 유일하게 공과대학만 인사위원회 여성위원의 비율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고 있었다. 공대는 지난 2017년 내부 규정을 바꿔 인사위원회에 여성위원 한 명 이상을 반드시 포함하도록 했다. 여성교수 비율이 낮은 대표적인 단과대로 꾸준히 지목되자(2019년 기준 4%) 이를 의식해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공대 교무행정실 관계자는 “공대의 경우 그동안 인사위원회 위원 중 여성이 없었기 때문에 내부 규정을 마련함으로써 여성교수의 입장을 대변하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여성교수 비율이 낮은 다른 단과대에도 이와 같은 규정이 마련될 필요가 있다.
서울대는 교수 채용 과정에서의 성차별을 감시하기 위해 ‘대학교원임용 양성평등추진위원회(양성평등위원회)’를 두고 있다. 양성평등위원회는 2011년 보고서를 통해 ‘여성 후보자가 부당하게 탈락하거나 명확하지 않은 기준 적용으로 여성 지원자가 불리한 판정을 받은 것으로 판단되는 경우 등에 이의를 제기해 재심사하거나 채용절차 진행이 중단되도록 하는 등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고 자평한 바 있다. 그러나 양성평등위원회가 실질적으로 기능하기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각 학과의 채용심사 현장에서 직접 감시하는 것이 아니라, 심사가 끝난 뒤 제출된 서류만을 검토하기 때문이다. 또한 양성평등위원회는 지난 2003년 설립 당시 운영계획에 ‘향후 필요시 위원장을 포함해 15인 이내의 전임교원으로 위원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함’이라 명시한 바 있다. 그러나 설립 17년이 지난 지금, 양성평등위원회의 위원은 아직 총 8명에 불과하다. 교무과 관계자는 “인원이 꼭 많아야 감시를 제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서울대 내 단과대가 15개 존재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실질적인 감시를 위해 충분하지 않은 숫자다.

‘역차별’도, ‘쿼터제’도 아니다
대학 교원인사위원회에 참여했던 한 남성교수는 지난 2018년 <한국대학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여성교수가 논문이나 연구 실적이 좋은 경우도 많지만, 막상 남녀가 동시에 지원했을 때 비슷한 조건이라면 인사위에서는 남성을 뽑는다’며 ‘여성만 뽑는다는 전제조건이 없으면 여성을 뽑기 힘든 구조’라고 말했다. 서울대 역시 교수 채용 시 지원자를 여성으로 제한하는 식의 조치를 몇 차례 단행했다. 2018년 경제학부 사례가 대표적이다. 당시 경제학부는 ‘그동안 성별 구분 없이 점수대로 뽑다 보니 여성교수가 임용되지 않는 측면이 있었다’며 채용공고에 지원자를 여성으로 제한한다는 조건을 달았다. ‘공대보다도 더한 금녀 구역’이라는 그간의 학내외 비판을 의식한 조치였다.
올해 1월 교육공무원법에는 ‘교원 중 특정 성별이 4분의 3을 초과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됐다. 이 조항은 서울대법에도 반영됐다. 서울대는 여성교수 비율 25% 달성을 위해 연도별 목표 비율을 학칙에 명시했다. 2021년 18.3%를 시작으로 2030년까지 25%로 맞추겠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표가 실제로 이행될 수 있을지 장담하긴 어렵다. 교무과 관계자는 “교수 채용은 학과 단위로 이뤄지기 때문에 본부에서 임의로 할당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앞으로 학과에서 교수를 채용할 때 (여성교수 비율을) 유념해달라고 협조를 구할 뿐, 학과에 강제적인 부담을 줄 순 없다”고 밝혔다. ‘노력해야 한다’는 권고 조문에 불과한 현행법엔 강제성이 없어, 여성교수 비율이 25%를 달성하지 못하더라도 제재를 받지 않는다.
이러한 조치들과 관련해서 ‘역차별’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됐다. ‘쿼터제’는 실력 없는 여성이 쉽게 교수가 될 수 있게 만든다는 게 주된 논리다. 역차별 논란과 관련해 배은경 교수(여성학 협동과정)는 “교수 채용 과정에서 여성을 배제하는 현상은 여전히 존재한다”며 “적극적 조치를 역차별로 봐선 안 된다”고 강조했다. 양현아 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여성에 대한 적극적 조치를 ‘쿼터제’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쿼터제’라는 표현은 여성을 물건처럼 대상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양 교수는 “적극적 조치의 정신은 소수자를 우대하고 혜택을 준다는 개념보다 훨씬 더 고양된 것으로 소수자성을 지지하고 누적된 차별을 인식하고 있다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교수사회의 남성 중심적인 문화를 바꾸기 위해 일정 숫자의 여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소수집단을 소외시키는 조직의 문화가 변화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소수집단 규모인 ‘크리티컬 매스(Critical Mass)’를 넘어서야 한다는 뜻이다. 남성 중심적 문화 속에서 여성교수는 ‘교수’가 아닌 ‘여성’교수로 정체화될 우려가 있다. 뿌리 깊은 학계의 남성 중심성에 균열을 내기 위한 적극적 조치는 여전히 유효하다. 여성 연구자들이 학문을 지속할 수 있도록 보다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