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는 사람’이 머물다 간 자리

윤가은 감독의 ‘손님’(2011)
▲부모가 부재한 집, 나루는 혼자 빨래를 갠다. ⓒ영화 ‘손님’ 캡쳐

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모르는 사람 절대 문 열어주지 마!”라는 말은 보호의 언어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집에 홀로 두고 외출할 때 단단히 일러두는 이 말 속엔 아이의 안전을 염려하는 마음이 담겨있다. 보호해야 하는, 그리고 보호하고 싶은 대상에게 건네는 이 훈계는 사뭇 엄하게 느껴지는 만큼이나 따뜻하다. 신신당부하는 어른의 간절함을 통해, 아이는 제가 누군가의 보살핌 속에 있음을 어렴풋이 느낀다.

  아홉 살 나루와 여섯 살 기림 남매에게 이 당부를 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 같다. 두 아이는 욕설을 퍼부으며 현관문을 부술 듯 두드리는 손님에게 너무도 쉽게 문을 열어준다. 부모님이 충분히 가르쳐줬는데 단지 말을 안 들은 것일까? 그렇다기에 손님을 맞이한 아이들의 표정엔 어떤 경계심이나 불안감이 없다. 아무래도 부모는 아이들에게 걱정 어린 당부를 건넬 여유가 없었던 것 같다. 엄마는 아침부터 일을 나가 저녁 늦게나 들어오고, 아빠는 며칠에 한 번 집에 왔다가 기약없이 떠나기 때문이다.

  윤가은 감독의 ‘손님’은 이 아이들의 일상을 꺼내 보인다. 돌봄을 받지 못해 스스로 돌봐야만 하는 일상이다. 가정 속에서 상처받은 또 다른 이, 자경이 남매의 일상에 방문한다. 남매와 자경이 어쩌다 함께 보낸 하루가 19분의 길지 않은 러닝타임을 촘촘하게 메운다. 

연약함은 분노를 길 잃게 하고 

  영화는 기림과 나루 남매의 ‘손님’ 자경의 분노로 시작한다. 자경은 아빠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알고 불같이 화난 상태다. 자경은 아빠의 바람 상대가 사는 곳을 알아내 그곳으로 향한다. 그 사람을 만나면 경멸과 원망을 한껏 퍼부어줄 셈이다. 드디어 도착한 집, 자경은 문고리를 잡아 흔들며 문을 열라고 소리친다. 몇 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문이 열린다.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선 자경의 시선이 아래로 옮겨간다. 문을 열어준 사람은 까무잡잡한 남자아이, 나루다. 뒤이어 더 어려보이는 여자아이가 달려나와 제 오빠에게 누가 왔냐고 묻는다. 기림이다. 두 아이의 천진한 얼굴을 마주하자 자경은 당황한다. 나루와 기림은 아빠의 바람 상대의 자녀고, 기림은 제 엄마가 회사에 가서 늦게 들어올 거라고 말한다. 머리채라도 쥐어뜯어놓으리라 벼르며 여기까지 왔건만, 예상치 못한 아이들과의 만남에 자경의 분노는 김이 팍 새 버린다.

  자경은 집에 눌러앉아 아빠의 바람 상대를 기다리며 나루와 기림을 지켜본다. 나루는 손님 자경에게 오렌지주스를 가져다주고, 쏟아진 주스를 치우고, 다 마른 빨래를 걷어서 갠다. 오빠가 분주하게 집안일을 돌보는 동안 기림은 혼자 그림을 그리며 논다. 나루와 기림은 익숙한 듯 부모가 부재한 집에 단 둘이 남겨져 있다. 

▲부모가 부재한 집, 나루는 혼자 빨래를 갠다. ⓒ영화 ‘손님’ 캡쳐

  그러던 중 자경은 순식간에 남매의 일상에 개입하게 된다. 혼자 놀던 기림이 이마를 다쳐 울고 있는데, 동생이 아끼는 레고를 망가뜨려 화가 난 나루는 윽박지르며 기림을 때린다. 소동을 지켜보다 못해 자경은 나루의 뒤통수를 갈기며 동생을 때리지 못하게 막는다. 그러곤 교복 블라우스 끝자락으로 기림의 이마에 난 피를 닦아주고 반창고를 붙여준다. 떨어진 반창고를 다시 붙여달라는 기림의 부탁도 차마 거절하지 못한다. 

  반창고를 붙여주기 위해 눈높이를 맞춰 기림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자경의 시선 끝에 연민이 움튼다. 연민은 충분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 채 두 아이가 오롯이 보낸 긴 하루를 향한다. 금세 자경을 의지하며 따르는 기림의 외로움과, 온종일 집안일을 도맡아 한 나루의 책임감을 향한다. 자경은 적막한 집안 공기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무거웠을지 생각하며 형언할 수 없는 기분에 휩싸인다. 

▲기림에게 반창고를 붙여주는 자경의 시선 끝에 연민이 움튼다. ⓒ영화 ‘손님’ 캡쳐

‘모르는 사람’으로 남다

  예고없이 나루와 기림의 아빠가 집에 다녀간다. 그는 동시에 자경의 아빠다. 방에 숨어 아빠와 아이들의 모습을 엿보던 자경은 머리를 치는 깨달음에 아연실색하고 만다. 이 깨달음을 못박듯, 아빠가 떠난 후 자경은 아이들과 함께 라면을 먹으면서 자신과 나루, 기림이 모두 왼손잡이임을 발견한다. 잔인한 진실을 맞닥뜨린 자경은 배신감에 망연해진다. 하지만 남매의 집에 처음 들어올 때 거침없이 분노했던 것과 달리 이번엔 충격을 가만히 삼킨다. 

  나루가 자경에게 다가와선 엄마가 거의 다 왔다는 소식을 전한다. 자경이 씩씩대며 찾아왔던 아빠의 바람 상대다. 드디어 분노를 쏟아낼 기회가 코앞에 왔는데, 자경은 아빠의 바람 상대를 만나지 않은 채 그 집을 떠나려 한다. 그리고 나루와 기림을 향해 말한다. “너네 앞으로, 낯선 사람들한테 절대 문 열어주지 마!” 아이들이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지을 뿐 대답이 없자 자경이 짜증내며 재차 말한다. “씨, 무슨 말인지 몰라?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말라고.” 그제야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인다. 

  헤어짐의 순간 기림이 묻는다. “근데, 언닌 누구야?” 자경은 자신을 뭐라 말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얼렁뚱땅 “모르는 사람”이라고 대답하고 만다.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말라고.” ⓒ영화 ‘손님’ 캡쳐

  나루와 기림은 자경을 어떤 사람으로 기억할까. 기림을 때리는 나루를 말리고 기림의 이마에 반창고를 붙여준 사람. 늘 남매 둘이서 덩그러니 마주앉았을 식탁에 함께 앉아 라면을 먹은 사람. 그리고 모르는 사람에겐 문 열어주지 말란 당부를 남긴 첫 어른. ‘모르는 사람’과 함께 보낸 반나절은 남매의 삶에 퍽 인상적인 추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나루와 기림은 자경을 잊어버릴 수도 있다. 자경도 아마 나루와 기림의 집을 다시 찾지 않을 테다. 그러나 그날 자경이 베푼 투박한 보살핌의 온기와 보호의 언어만큼은 아이들의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경은 언제 들어올지 모르는 아빠와 늦게 들어온다는 엄마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남매의 일상 속 빈자리를 채워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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