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대한 웨딩마치를 울리기까지
웨딩플래너를 만나자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164호

웨딩플래너를 만나자 미지의 세계가 열렸다

예비신부 A씨의 웨딩박람회 가상 체험기
* 웨딩박람회 체험 당시 제공받은 문서를 시각화한 자료입니다.

※ 본 기사는 기자의 웨딩박람회 체험 및 전·현직 웨딩플래너(2명), 웨딩박람회 참석 경험자(3명)와의 인터뷰를 종합해 에세이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기사의 내용은 특정 업체와 무관하며, 가상의 인물을 설정해 새롭게 작성한 글임을 알립니다.

2021년 1월 18일 월요일

  어제 남자친구 부모님을 만나서 밥을 먹었다. 어머님이 “이제 슬슬 결혼 준비해야지?”라며 벼르고 벼르던 말씀을 하시길래 “네, 네” 하고 말았는데,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뭔가 시작해야 할 것 같긴 하다. 전부터 9월쯤 결혼식 올리자는 얘기 오갔으니까 준비 기간이 촉박하진 않겠지만 미리미리 시작하는 게 좋겠지?

  막상 결혼 준비를 시작하려 하니까 뭐부터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결혼에 대해선 막연하게 생각한 게 전부라, 갑자기 세부적인 것들을 챙기려니 아득하다. 아는 게 없기는 남자친구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웨딩’을 검색해보니까 ‘웨딩박람회’라는 게 나온다. ‘웨딩’과 ‘박람회’라니, 단어 조합이 신기하다. 하지만 대강 어떤 느낌인지 알 것 같다. ‘스드메’며 청첩장이며 웨딩홀이며 한복이며 하는 다양하고 복잡한 결혼 준비 절차들을 한 자리에서 간편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기회겠지? 마침 이번 주말에 가까운 데에서 열리는 웨딩박람회가 있다길래 ‘둘러나 보자’ 싶어서 홈페이지에 들어가 예약을 걸었다.

2021년 1월 23일 토요일

  아침에 남자친구를 만나 웨딩박람회 장소로 향하는데 약간은 긴장됐다. 두근두근. 웨딩 느낌 물씬 나는 사진액자가 진열된 입구를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박람회장 내부는 떠들썩하다. 낯설지만 어딘가 친숙한 분위기다. 홀 중앙엔 꼭 영화 ‘해리포터’에 나오는 호그와트 연회장 같은 긴 탁자가 있다. 족히 열댓 명은 될 것 같은 플래너들이 한 열을, 예비부부들이 나머지 한 열을 차지하고 마주 앉아 열띤 상담을 벌이고 있다. 학부모들 불러다 입시상담 해주는 학원 같기도 하고, 왁자지껄하게 흥정이 오가는 시장통 같기도 하다.

  홀 오른쪽 구석엔 웨딩드레스를 입은 마네킹들이 늘어선 쇼윈도가 있고 반대쪽엔 미니 주얼리 샵이 차려져 있다. 공간이 참 알차게도 채워져 있다. 이곳저곳을 구경하면서 안내 직원을 따라가니, 탁자에 앉아 있던 한 플래너가 벌떡 일어나 밝게 인사한다.

  “신랑님, 신부님, 오늘 상담을 맡은 OOO 플래너예요.” ‘신부님’이라니, 순간 당황했다. 목사님, 신부님 할 때 그 신부님은 아니겠지? 29년 인생에서 처음 듣는 호칭에 잠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멀뚱멀뚱 쳐다보니까, 살갑게 웃으며 “이쪽으로 앉으세요, 신부님.” 하고 쐐기를 박는 플래너님. 아, 나 이제부터 신부구나.

결혼식 날 어떤 신부로 보이고 싶어요?

  자리에 앉자 플래너님이 ‘상담 서비스 참고사항’이라고 적힌 종이 한 장을 내민다. A4용지 한 바닥을 꽉 채운 표에 커봐야 6~7포인트 정도 될 것 같은 작은 글씨들이 빼곡하다. 표의 정체는 체크리스트. 예비신랑, 예비신부의 간단한 신상정보와 결혼 준비 계획, 원하는 결혼 방향을 기입하는 양식이다.

  표 중간쯤엔 ‘맞춤상담 설문조사’라고 해서 다지선다형 질문 열 가지 정도가 있다. “결혼 준비 과정에서 의사결정권은 누구에게 있는 편입니까? 1번 신랑님, 2번 신부님, 3번 부모님, 4번 기타” 음, 3번 부모님! 다음 질문, “신랑신부님이 생각하는 웨딩 스타일은? 1번 알뜰살뜰, 2번 선택과 집중, 3번 할 건 다 하기” 아무래도 알뜰하게 준비하는 게 낫겠지? 1번…

  나름 고심하면서 시험을 치듯 하나하나 체크해나가는데 마지막 질문의 마지막 선지에서 탁 막혀버렸다. “결혼식 당일에 가장 듣고 싶은 말은? 1번 고급스럽다, 2번 어려보인다, 3번 귀엽다, 4번 단아하다, 5번 신부스럽다?”

  궁금증을 못 참고 물었다. “‘신부스럽다’가 뭐예요?” “왜, 있잖아요. 보통 결혼식장 가면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신부요.” 시원하게 이해되지 않아서 더 물어보고 싶은데 옆에서 남자친구가 속도 없이 “4번 골라. 너 단아한 스타일 좋아하잖아. 아니다, 3번도 괜찮겠다. 난 귀여운 게 좋아”라며 훈수 두는 바람에 못 물어봤다. 플래너님도 “신부님은 단아한 스타일이신 것 같아요”라고 거들길래 얼떨결에 4번을 골랐다. 그런데 정말 신부스러운 게 어떤 걸까?

예비신부의 숙제, 선택하기

  신부스럽다는 말의 의미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신부가 할 일이 뭔진 너무 잘 알 것 같았다. ‘고르기’다. 맞춤상담 설문조사 질문들에 다 답한 다음엔 그야말로 고민과 선택의 연속이다. 표 하단에 결혼 준비를 위한 세부 항목들이 적혀 있는데 많기도 참 많다. 플래너님은 “이제부터 저랑 상담하시면서 이것들 하나하나에서 어떤 업체 선택할지 견적 내보시는 거예요”라고 말하며 계산기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는다.

  가장 먼저 선택해야 할 건 ‘스드메’다. 일명 스튜디오 웨딩 사진 촬영, 웨딩드레스 그리고 메이크업. 플래너님은 내가 기입한 양식을 훑어보더니, SNS나 블로그에서 미리 봐둔 드레스와 스튜디오 컨셉이 있는지 묻는다. 딱히 없다고 하자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한다. 아깐 못 봤는데 박람회장 벽면 하나를 차지한 책장에 앨범들이 가득 꽂혀 있다. 책장으로 간 플래너님은 이내 앨범 몇 권을 골라 자리로 돌아온다. 두 손으로 들기 벅차 보이는 두툼한 앨범을 다섯 권이나.

  플래너님은 앨범을 손수 넘기며 수많은 업체의 드레스 사진, 스튜디오 촬영 사진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와, 다 예쁘긴 정말 예뻐서 눈이 즐겁다. 영화에서나 보던 낭만적이고 고급스러운 웨딩 사진들의 향연에 ‘내가 정말로 결혼하는구나’ 실감이 난다.

  다섯 권을 다 보고도 플래너님은 두 차례 더, 다섯 권씩 앨범을 가져왔다. 총 열다섯 권을 보는 동안 플래너님은 내 외모와 성격, 취향과 기호를 빈틈없이 물어보면서 딱 맞는 업체를 추천해주려고 애썼다. “신부님 하고 계신 귀걸이 보면 세련된 거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웨딩홀도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봐드릴게요.” “신부님은 조용조용한 성격인 것 같은데 드레스는 실크 재질의 우아한 거, 메이크업은 은은하게 잘하는 이 샵 어때요?” “신부님 사진 찍을 때 표정 자연스럽게 잘 지으세요? (음… 아니요.) 그러면 얼굴 표정이 두드러지지 않게 전신샷 잘 찍는 스튜디오 위주로 보여드릴게요.”

  긴 상의 끝에 드레스 업체와 스튜디오, 메이크업 샵을 얼추 골랐다. 여기까지만 해도 기진맥진해졌는데 플래너님은 이제부터 시작이란다. “네? 뭘 더 할 게 있어요?” “그럼요, 신부님!” 예식 장소는 어디로 대관할 건지, 양가 부모님 한복과 신랑 예복은 대여할 건지 맞출 건지, 염두에 두고 있는 예물은 뭔지, 결혼식 당일 스냅사진의 원본 파일을 별도로 신청할 건지 사본만 받을 건지… 끝없는 질문에 입이 떡 벌어진다.

  질문에 답할 때마다 결혼 준비 예산 견적도 치솟는다. 스튜디오 촬영 30만 원, 메이크업 30만 원, 드레스 120만 원, 신랑 턱시도 맞춤 100만 원, 신랑신부와 혼주 한복 각각 60만 원 해서 120만 원… 스드메와 예복만 해도 400만 원이 훌쩍 넘었는데 계산기를 두드리는 플래너님의 손놀림은 멈추지 않는다. 내가 고른 업체들의 단가가 모여서 저런 숫자를 만들어내다니, 아찔하다. 타닥타닥 계산기 소리가 고막을 쿵쿵 울린다. 본식 스냅사진 50만 원, 폐백, 이바지, 구두, 부케, 청첩장 등등. 여기에 예물비 300만 원, 식대 포함한 웨딩홀 대관료 600만 원은 별도다. 어느새 계산기 화면에 적힌 숫자는 여덟 자리. 워낙 큰 숫자다보니 뭐 하나씩 더 추가할 때마다 오십만원, 백만원 더해지는 게 우습다.

  삶은 B와 D 사이의 C라고 했나. 정말이지, 결혼 준비는 Bride와 D-day 사이의 Choice인 것만 같다. ‘신부님’이라는 새로운 자리에 오자마자 눈앞에 쌓이는 숙제들에 압도되는 기분이다. 플래너님은 내 의향에 전적으로 초점을 맞춰서 이런저런 선택지를 정성스레 제공한다. 고맙기도 하지만, 결국 그 많은 정보를 둘러보고 고민해서 결정해야 하는 건 내 몫이라는 생각에 부담스러워진다. 이 모든 게 ‘그날’의 결혼식을 가장 만족스럽게 치르기 위한 거겠지?

  결혼식은 나만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문득 깨닫고 남자친구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왜 너한텐 질문 안 할까?” 남자친구가 답한다. “결혼식 주인공은 신부잖아. 네 의견이 중요하지.” 음, 잘 모르겠다. 아름다운 신부가 되기 위해 이 많은 ‘선택 노동’을 소화하는 게 주인공의 조건인가?

예비 며느리 노릇도 외주 되나요?

  사실 제일 궁금한 건 예단이었다. 결혼 얘기가 나오자마자 엄마가 예단은 어떻게 드려야 할지 걱정하기도 했고, 남자친구 부모님 주변에 최근 자식들이 결혼한 분들이 많다고 하기에 신경이 쓰였다. 지인들이 예단, 예물 어떻게 했는지 들으시는 이야기가 많을 테니까.

  플래너님에게 혹시 예단 관련 정보도 갖고 계시는지 묻자 기다렸다는 듯 파일 하나를 꺼내 보내준다. 열어보니 ‘예단 건네는 매뉴얼’이라는 제목이 붙은 두 페이지의 서류다. 예단의 의미와 품목, 전달 시기, 의사소통 요령 등이 자세하게 적혀 있다.

* 웨딩박람회 체험 당시 제공받은 문서를 시각화한 자료입니다.

  쭉 읽어내려가다가 “(예단을 고를 때) 시부모님의 취향을 섬세하게 파악하기 위해선 신부님의 센스가 관건”이라는 지령을 보니 조금 심란해졌다. 내가 예비 시부모님께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성의를 다하는 것과, 그분들을 위해 센스를 발휘하라는 지침이 매뉴얼에 문장으로 써 있는 것은 다르니까.

  여기서 끝이 아니다. 플래너님은 예단에 함께 넣어 보낼 편지 예시도 보여줬다. 박람회 업체 내에서 전수되는 양식인 듯했다. 장문의 편지는 “아버님, 어머님의 예비 며느리 OO예요.”로 시작해 “아무것도 모르는 철없는 저지만, 열심히 배워서 지혜로운 며느리, 현명한 아내가 되겠습니다.” 등의 참하고 공손한 말들로 이어진다. 마무리는 “예쁘게 잘 사는 모습 지켜봐주세요. 예쁜 딸이 되고 싶은 예비 며느리 올림.”이라는 애교 가득한 인사.

  편지까지 읽고 나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내가 먼저 자료를 요청하긴 했지만 업체가 시부모님 사랑까지 챙겨주는 세심함을 장착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수요가 있으니까 이런 매뉴얼도 전수되는 거겠지 싶어서 씁쓸해진다. 결혼한다는 건 예쁨받는 며느리가 된다는 뜻인가 보다.

일생일대의 장기 프로젝트

  올해 9월에 결혼 예정이라는 우리의 말에 플래너님이 화들짝 놀란다. 너무 늦게 왔다는 거다. 상담 내내 우리가 느긋해 보여서 일러야 내년쯤 결혼할 줄 알았단다. “여기 와 있는 예비부부들은 대부분 내년 봄에 결혼하시는 분들이에요.” “1년이나 남았는데 지금부터 준비해요?” “평생 한 번 하는 건데 보통 그렇게 준비하죠.”

  그러면서 플래너님은 백지 한 장을 꺼내 일반적인 결혼 준비 타임라인을 그려준다. 6~8개월 동안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차례차례 촘촘히 적힌 타임라인은 꼭 장기 사업 프로젝트 계획서 같다. 기간이 넉넉하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나 보다. 조급해진다.

* 웨딩박람회 체험 당시 제공받은 문서를 시각화한 자료입니다. 업체에 따라 세부적인 안내사항에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9월 예식이면 넉넉하게는 3월, 이르면 다음 달 말에 스튜디오 촬영 준비에 착수해야 한다는 말이 이어진다. 이유인즉슨 결혼식장에 웨딩 사진을 진열해놓으려면 하루 빨리 촬영 일정을 잡고 사진을 보정하는 기간을 거쳐야 한다는 거다. 플래너님 말을 듣고 있자면 ‘스튜디오 촬영이 결혼식의 시작이구나’ 싶어진다. 스튜디오 촬영 땐 웨딩드레스도 세 벌을 갈아입으니 본식보다 더한 ‘미니 예식’인 셈이다.

  플래너님은 스튜디오 촬영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기 위해 드레스투어 일정도 서둘러 잡으라고 신신당부를 한다. 드레스투어는 두세 군데의 웨딩드레스 매장을 돌며 예식 날과 스튜디오 촬영 때 입을 드레스를 고르는 절차인데, 네댓 곳을 방문하는 경우도 있고 갔던 곳을 두어 번 더 가서 재차 입어보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품이 많이 들고 신중해야 하는 과정이라는 것. “두 분은 지금 촉박하니까 다음 달에 투어 스케줄 잡는 거 어떠세요?”라는 제안은 일단 사양했지만… 이 일정을 무사히 소화할 수 있을까 싶은 위기감이 든다. 다음 주 제출인 줄 알았던 학기말 레포트가 내일까지였다는 걸 깨달은 기분. 그런데 아직 한 글자도 안 쓴 기분.

  내가 좀 지쳐 보였는지 플래너님이 기운을 북돋아 준다. “그래도 이번 한 번뿐인데, 후회 없이 하셔야 하잖아요.” 그 말에 나도 남자친구도 마법에 걸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번 결혼하는데 이 정도 시간과 돈은 기꺼이 들여야지. ‘이번 한 번뿐’이기 때문에 미리미리 시작해서 이런 수고도 감수하는 거 아니겠어? “네….” 하고 수긍하다 다시 타임라인을 봤다. ‘이번 한 번뿐’이라는 마법의 주문에 걸려들긴 했지만, 한숨이 나오는 건 어쩔 수 없다.

  박람회장을 나서는데 피곤이 몰려온다. 시계를 보니 벌써 두 시간이 훌쩍 지났다. 결혼이 이렇게나 하기 힘든 거였구나. 나는 살짝 간만 보러 온 건데… 결혼식까지 처리할 일이 첩첩이 쌓여 있다는 사실을 원치 않게 알아버렸다. 두 어깨가 무겁다. 이거 꼭 다 해야 하나? 문이 닫히기 전 흘끗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붐비는 박람회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저렇게 많은 사람이 하는 걸 보니 해야 할 것 같긴 하다. 결혼식만 끝나면 한숨 돌리겠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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