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나는 대학 입시 실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입시곡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였는데 중간에 내가 도저히 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객관적으로 까다로운 것은 아니지만 왼손부에 어려운 테크닉이 몰려 있어서, 두 손가락뿐인 내 왼손이 소화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악보 반 쪽 정도의 분량만을 몇 주 넘게 붙잡고 연습해도 진전이 없었다. 피아노 선생님은 답보 중인 날 보며 몹시 속 터져 하셨다. 제자가 입시에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잘 좀 해보라며 타박을 주시기도 했다.
역시 큰 발전이 없는 상태로 레슨을 받으러 간 날이었다. 그날따라 선생님은 어딘지 민망한 미소를 띠고 계셨다.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말씀을 꺼냈다. 제자를 이해해보고 싶어서 직접 왼손의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을 접은 채 엄지와 새끼손가락만으로 입시곡을 연주해봤는데, 너무나 어려웠다고. “내가 너보다 훨씬 못 치더라. 네가 대단한 거였어.” 선생님은 그동안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강요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건넸다. 이후 그분은 내 왼손의 생김새와 움직임을 속속들이 파악해 그에 맞게 연주를 지도하려고 애쓰셨다.
내게 예술이란 그런 것이었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바라본 끝에 그 존재만의 아름다움을 길어 올리는 것. 나의 피아노 선생님은 예술적인 예술 교육을 베푼 사람이다. 그분은 사회에서 ‘결여’라고 여겨지는 나의 신체조건을 고스란히 껴안았다. 나에 대한 빈틈없는 이해를 바탕으로 진행된 그분의 레슨은 늘 깊이 있는 조언을 수반해 내 연주를 차츰 성장시켰다. 나를 존엄히 대하는 사람이 있어 나는 존엄한 예술가가 될 수 있었다.
이번 호 취재를 위해 만난 예술 전공생들은 선생님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은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건 예술적이지 않다”고 답답해했다. 예술 교육은 예술적이어야 한다고, 학생들은 또렷이 말했다. 이들이 말하는 예술은 내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작품 너머의 사람을 보는 것, 배우는 이의 삶과 꿈이 이 세계를 구성한다는 사실을 존중하는 것. 나는 우리의 바람과 현실 사이에 벌어진 아득한 괴리를 직시했다. 한탄과 분노를 가까스로 삼키며, ‘예술적인 예술 교육’의 온기를 입었던 사람으로서 내가 무얼 할 수 있는지 고민했다. 학생들이 고백한 상처의 무게에 비해 내 손끝의 문장들은 한없이 얄팍하고 무력했다. 다시, 평생 열 손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여 피아노를 연주했을 나의 선생님이 세 손가락을 접어 베토벤의 음악에 다가갈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 가만히 헤아렸다. 기사를 써내지 않을 수 없었다.
그토록 따스한 레슨을 거쳐 들어왔던 학부를 곧 떠난다. 이것은 대학생으로 쓰는 마지막 글이다. 동시에 저널에 남기는 마지막 글이다. 소수자 곁에 서겠다는 가치를 공유하는 저널은 내가 소수자로서의 경험을 두려움 없이 나눌 수 있는 예술적 공간이었다. 종종 저널에서 내 장애 정체성이 너무도 쉽게 포용될 때 나는 얼떨떨했다. 과월호에서 장애인의 노동에 관한 특집기사를 기획한 동료 기자들은 내게 당사자로서의 의견을 구하길 주저하지 않았는데, 그들의 과감하고도 신중한 감수성은 나의 피아노 선생님과 닮아 있었다. 기획 회의에서 내가 장애에 대해 말할 때 나를 오롯이 응시하던 동료들의 편견 없는 시선도 선명히 떠오른다. 그 눈빛들이 내 마음에 스며 나라는 존재의 존엄을 성립시켰다는 진실 앞에 겸허해진다. 애써온 시간의 고단함을 묻고 소망을 심는다. 나를 숱하게 감화시켰던 저널의 예술성이 다시금 피어나 오래도록 풍성하길 바라는, 소망의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