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점제가 바꾸는 고등학교

전면 도입 4년을 앞둔 고교학점제, 현장을 둘러보다

  수업을 선택해 듣고, 공강이 생기고, 졸업을 위해 학점을 채우고… 대학교 수업을 설명하던 말이 이제 고등학교 수업에도 적용된다. 고교학점제(학점제) 이야기다. 문재인 대통령이 후보 시절부터 중요한 정책 과제로 추진해온 학점제가 2025년부터 전국 모든 고등학교에서 시행된다. 학점제는 이미 지난해부터 모든 마이스터고에서 시행 중이며, 당장 내년부터는 전국의 특성화고에도 적용된다. 내년엔 경기도 내 모든 고등학교가 연구·선도학교로 지정된다.

  학점제는 중등 교육의 뿌리를 건드린다. 학점제를 반영하는 수능 개편안이 2024년 발표되고 2028학년도 수능부터 적용될 예정이다. 2025년 이후 입학생들부터는 모든 선택과목에 성취평가(절대평가)가 적용된다. 학업성취율 40%의 최소 학습성취기준(최소 성취기준)을 달성하지 않으면 수업 이수가 인정되지 않는다. 학점제는 과연 학교를 바꿀 수 있을까?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학점제를 시행 중인 학교 현장에 찾아갔다. 경상북도 예천에 위치한 공립 일반고등학교인 경북일고등학교(경북일고)와 서울시 관악구의 사립 마이스터고 미림여자정보과학고등학교(미림마이스터고)다.

연구학교 3년 차 경북일고,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좋지만”


  4월 2일 금요일 5교시는 정치와 법 시간이었다. 이 수업은 2학년 학생 중 정치와 법을 선택한 학생들만 수강한다. 코로나19로 인해 1, 2학년은 격주로 등교하는데 이 주는 2학년이 등교하지 않았다. 김유진 사회 교사는 ZOOM으로 학생들을 한자리에 모아 수업을 진행했다. 학생들은 헌법 조항을 보며 대통령제와 의원 내각제적 요소를 구분했다. 선생님의 질문에 마이크를 켜고 성실히 답하는 학생부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학생, 소그룹 토론 중 회의실에서 잡담하는 학생까지 다양했다.

  경북일고는 2019년에 학점제 연구학교로 지정됐다. 학생들은 기존 교육과정에 있는 선택과목과 1학년 2학기에 학생들이 요구해 새로 개설되는 과목 중 자신이 수강할 과목을 고른다. 김유진 교사는 학생들이 생활기록부를 신경쓰는 등 자신만의 합리적인 기준을 세우고 수업을 선택한다고 말했다. 하루 7교시 수업 중 3~4개 수업이 선택과목이며, 공강은 없다. 김 교사는 학생이 혼자 있을 때 예상치 못한 위험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며 공강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경북일고의 복도에 위치한 홈베이스

  경북일고에서는 학점제에 맞춰 교과교실제도 시행한다. 최근 신축된 이곳은 처음부터 교과교실제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교사마다 교실이 하나씩 배정된다. 학생들은 자신의 학급에서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매 시간마다 직접 담당 선생님의 교실로 찾아간다. 쉬는 시간마다 ‘민족대이동’이 생기는 이유다. 교사들은 학교의 크기가 크지 않았다면 많은 학생이 쉬는 시간에 한꺼번에 이동하기가 불편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학생들은 홈룸(자신의 학급)의 사물함 대신 홈베이스(복도 중간에 있는 큰 사물함)에 자신의 물건을 보관한다.

  교과교실제는 학점제와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한 교시에 학급마다 편성된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학생이 선택한 과목을 수강하기 때문이다. 선택과목이 확대되고 한 교시에 진행되는 수업 개수가 많아지면, 그에 맞춰 필요한 강의실 수 역시 늘어난다. 안효선 교감은 “학생 수에 따라 크기가 큰 반과 작은 반을 나누려면 다양한 크기의 강의실을 확보하고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학점제를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 학생들은 들을 과목을 직접 선택하는 데에 대체로 만족하고 있었다. 3학년 학생인 김민교 씨는 “수능에서 선택하는 과목 수보다 더 많은 과목을 선택해야 해서 처음에는 부정적으로 느껴졌다”면서도 “수업을 여럿 들어보면서 수업 선택을 할 수 있는 것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3학년 이수경 씨는 “내가 하고 싶은 것, 자신 있는 것을 공부하니까 좋다. 과학탐구Ⅱ 과목을 선택했는데 나중에 대학에서 배울 것을 미리 공부해본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 씨는 “성취평가 수업의 경우 A 기준만 넘으면 되니까 다들 견제하지 않고 공부했다”고 교실 분위기를 전했다.

  학생들의 불만도 제기된다. 3학년 박차영 씨는 학생들이 각자 다양한 과목을 선택하다 보면 한 과목당 수강하는 학생 수가 적어져 좋은 등급을 받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선택과목 중 성취평가로 진행되는 과목도 있지만 여전히 상대평가가 이뤄지는 수업도 있기 때문이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이 몰려 선택하기 부담스러운 과목도 있다. 가령 미적분 수업의 경우 이과 학생들이 많이 선택해 문과 학생들이 기피하기도 한다. 진로와 흥미에 따라 미리 과목을 선택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학생들도 있다. 이수경 씨는 “진로가 확실하지 않은 친구들은 과목 선택 자체를 부담스러워한다”고 말했다. 

  정치와 법이나 한국지리 등 배우는 주제별로 과목이 나뉘어 있는 사회 교과와 달리 비교적 덜 세분화된 영어 과목에서는 수준별 수업과 유사한 모습이 나타나기도 한다. 김지언 교사는 2학년 공통과목 영어1과 3학년 선택과목인 실용영어를 맡고 있다. 현재 3학년 학생들은 실용영어와 심화영어독해 중 선택할 수 있다. 김 교사는 “심화영어독해의 심화라는 말 때문에 수업이 어려워 보여서 학생들이 실용영어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며 “원치 않게 수준별 수업이 된 것 같은 느낌”이라고 말했다.

  학점제로 인해 교사의 수업 준비 부담은 증가했다. 김유진 교사는 “한 교사가 담당하는 수업 개수는 기본 세 과목으로 이전에 비해 늘었다”고 설명했다. 교사가 느끼는 부담은 담당 과목에 따라 사뭇 달랐다. 김지언 교사는 “다른 학교의 동료 교사는 영미문학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과목을 수업하느라 힘들어한다”고 전했다. 반면 김유진 교사는 “(일반고에서 잘 배우지 않던) 국제정치 같은 과목도 고등학생용 교과서가 있어서 수업을 준비하는 데에 크게 부담스럽지는 않다”고 말했다.

▲교과교실제를 시행 중인 경북일고의 학급 팻말 사진

  교사는 소속 학교의 수업뿐만 아니라 지역 내 공동교육과정 수업을 담당하기도 한다. 공동교육과정은 같은 지역에 있는 학교들이 함께 개설하는 수업으로, 현재는 학생들의 7교시 일과가 끝난 후 야간에 주로 진행된다. 다른 수업들과 마찬가지로 성적이 나오고 생활기록부에 기록되는 정규교육과정에 해당한다. 경북일고의 경우 근처의 예천여자고등학교, 대창고등학교와 함께 공동교육과정을 개설한다. 이번 학기에는 교육학, 빅데이터 분석, 중국어 회화, 영화 제작 실습 등의 과목이 개설됐다. 이번 학기 공동교육과정으로 교육학 수업을 담당하는 김지언 교사는 “교사가 직접 수업을 신청해 담당하기 때문에 학생과 교사 모두 수업을 원해서 하는 것”이라며 수업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냈다.

  공동교육과정 이수를 위해 다른 학교로 이동하는 학생들에게는 택시비가 지원된다. 비용은 학점제 연구학교에 지원되는 예산으로 충당된다. 안효선 교감은 “현재는 지원금으로 원활하게 진행되는 부분이 있는데, 앞으로 모든 학교에서 학점제를 진행한다면 현재와 같은 충분한 지원이 있을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강사 채용도 우려되는 건 마찬가지다. 교내 교사가 수업할 수 없는 과목은 외부 강사나 대학교수를 초빙해 진행하고 있는데, 안 교감은 학점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이후에도 원활한 채용이 가능할 정도로 예산을 지원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우려를 표했다.

  경북일고에서 기자가 만난 세 사람은 학점제의 실행 취지에 긍정적인 시선을 보냈다. 김유진 교사와 김지언 교사는 학점제의 시행 취지에 동감했다. 안효선 교감은 “학생들은 원하는 과목을 다양하게 배울 수 있다는 점을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말했다. 학점제의 한계에 대한 지적도 나왔다. 김지언 교사는 “입시부터 바뀐 후에 교육과정이 바뀌어야 한다. 학생들이 ‘실용’영어를 선택할 수 있다 해도 수능특강 위주의 영어 입시는 변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학점제 4년 차 미림마이스터고, 직업교육과 학점제를 조화시키기 위해선

  4월 6일 4교시, 한 교실에선 1학년 3D 애니메이션 수업이 한창이었다. 교사의 우렁찬 말소리와 함께 학생들의 타자 소리, 마우스 클릭음이 교실을 가득 채웠다. 앉은 자리마다 컴퓨터가 놓여 있었고, 개인 노트북을 지참한 학생들도 있었다. 교사는 커다란 빔프로젝터에 프로그램을 켜놓고 공이 튀어 오르는 애니메이션 제작 방법을 설명했다. 같은 시각 또 다른 교실에서는 응용프로그래밍개발 수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 기능을 알면 회사에 들어갔을 때 좋다”는 교사의 설명이 이어졌다. 미림마이스터고는 뉴미디어웹솔루션과·뉴미디어소프트웨어과·뉴미디어디자인학과로 구성된 IT 전문 마이스터고다.

  미림마이스터고를 졸업하려면 198학점을 들어야 한다. 김지훈 영어 교사는 마이스터고에서의 학점제를 코스 요리에 비유했다. “(학점제가 시행되는) 일반고에서는 뷔페처럼 다양한 과목 중 일부를 선택한다면, 미림마이스터고에서는 세 가지 코스 중 하나를 선택한다.” 여기서 코스란 인력양성유형(희망 진로)에 따라 권장되는 전공 과목을 의미한다. 기존에는 선택한 학과에 따라 이수해야 할 과목이 정해져 있었다면, 현재는 한 학과 내에서도 인력양성유형을 선택해 그에 맞는 수업을 고른다. 이를테면, 뉴미디어소프트웨어학과에는 응용SW개발자·시스템프로그래머·디자인융합개발자라는 세 인력양성유형이 있고, 그에 따른 권장 선택교과가 있다. 학생들은 한 학기에 7과목 정도를 듣는데, 그중 2과목이 선택교과다.

▲미림마이스터고 실습실

  학점제 운영에는 네 가지 모델이 있다. 학과 내·학과 간·학교 간·학교 밖 모델이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학과 내 모델에 해당한다면, 학과 간 모델은 다른 학과의 수업도 수강하는 것으로 일정 학점 이상 이수할 경우 부전공 자격이 함께 주어진다. 보통 대학에서는 주전공의 전공선택 과목에 추가로 부전공 과목을 듣는데, 미림마이스터고에서는 전공선택 과목을 부전공 과목으로 대체해 듣는다. 부전공을 선택할 경우 본래 자신이 속한 과의 전공과목을 일부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다. 김지훈 교사는 교원 수의 부족 등으로 발생한 상황이라며 내년부터는 전공선택 과목과는 별도로 부전공 과목을 들을 수 있게 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학교 밖 교육과정은 주변 대학 등과 연계해 진행하는 수업인데, 아직 시행에 어려움이 많다. 별도의 교육과정을 승인받고 교과서 개발 및 인정을 받는 데에만 1년 반에서 2년이 소요된다. 김지훈 교사는 “재작년 말부터 중앙대에서 인공지능과 데이터 분석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데, 학점으로 인정받기 위해 교육과정 및 교과서 인정 등의 절차를 모두 거치려면 내년은 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교사는 교육부와 교육청 내 중등 교육과 직업교육을 총괄하는 부서가 서로 다른 데서 혼란이 발생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학교 밖 교육과정을 진행하는 데 대해 부서별로 입장 차가 있어 지침이 늦어진다고 알고 있다”고 말했다. 직업교육 담당 부서는 대학에서 취업에 유용한 기술을 배우는 것을 긍정적으로 여기는 한편, 중등 교육 담당 부서의 경우 연계 대학의 입시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스펙이 될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학점제의 특징적 변화인 최소 성취수준은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기준은 과목별로 다르게 산정된다. 교과협의회를 통해 과목마다 40~50%로 기준을 세운다. 현재는 전문교과Ⅱ 실무과목에만 별도로 최소 성취수준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최소 성취수준을 달성하지 못하는 학생은 찾아보기 어렵다. 2020학년도 1학기 기준으로 최소 성취수준을 충족하지 못한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김지훈 교사는 “실무과목 특성상 수행평가를 위주로 평가한 것도 영향을 미쳤고, 교사는 (학생이) 최소 성취수준을 맞출 수 있도록 교육할 의무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학점제의 장단점을 실감하고 있었다. 뉴미디어소프트웨어학과 3학년인 김수현 씨는 정보처리 수학과 웹사이트제작, 컴퓨터 시스템 일반을 선택했다. 김 씨는 “진로와 연결되는 과목을 선택했다”며 “취업을 위한 포트폴리오를 채울 때 유용하다”고 말했다. 한편 인력양성유형에 따라 학생들에게 권장 선택교과가 제시되지만, 학생들이 자신에게 더욱 필요한 과목을 고르는 데 어려움을 겪기도 한다. 미림마이스터고에서 수업 선택은 전해 8월 즈음 진행하는데, 김 씨는 “(과목을) 잘 알지 못하는 시점에서 수업을 선택해야 한다”며 과목을 선택할 때 많은 고민을 했다고 털어놨다. 김 씨는 수강해야 하는 과목이 그냥 정해져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미림마이스터고 학생들이 쉬는 시간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마이스터고에서 만난 교사들은 학점제의 취지에 동감하면서도 한계를 지적했다. 특히 마이스터고의 특성과 학점제가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학점제는 입시 위주의 교육을 변화시키겠다는 취지로 학생의 과목 선택권을 보장한다. 반면 마이스터고는 취업을 목표로 특정 전문 능력을 계발하는 학교인 만큼 학생들이 밟아야 하는 커리큘럼이 비교적 명확한 편이다. 이형섭 전공 교과 교사는 기존에 모든 학생이 필수적으로 배우던 과목이 학점제 시행 이후 선택과목으로 편성돼, 특정 과목을 아예 배우지 않는 학생들이 생겼다고 지적했다. 이 교사는 기존에 배우던 과목을 모두 필수과목으로 둘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선택과목으로 바뀐 경우도 있다고 설명하며 “학생들이 중요한 수업을 듣지 않고 졸업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실용성 높은 기술을 가르쳐야 하는 직업교육 특성상 전문성 높은 교원을 확충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다. 김지훈 교사는 “타 과목 교사가 새로운 과목의 연수를 받고 개론 수준의 기초 내용을 가르치는 건 가능하지만, 실제로 기업에서 사용하는 기술을 가르치는 건 어려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학생과 교사들은 학점제로 인한 변화와 학점제의 장단점을 명확히 느끼고 있었다. 미림마이스터고 김지훈 교사는 “시행착오나 어려움은 어느 정책에서든 있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현장이 보내는 우려의 신호를 경청하고 정책을 수정하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다. 학점제는 시행착오를 최소화하고 무사히 전면 시행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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