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혁신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피해자 일상 회복 위해선 대학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중요”
이번엔 학교가 변할까?

“피해자 일상 회복 위해선 대학 차원의 제도적 지원이 중요”

대학원생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 관련 개선안 및 행동지침 발표돼

  지난 3월 서울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원총)는 ‘대학원생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개선안 및 피해 조력자를 위한 행동지침 제안(보고서)’을 발표했다. 보고서에는 대학원생 성폭력 및 인권침해 사건에서 발생하는 2차 피해의 유형 및 성격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제도적 개선안이 제시됐다. 피해 조력자·대리인이 사건대응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참조할 수 있는 지침을 제시한 건 이번 보고서가 처음이다.

  보고서는 필자들이 다년간 성폭력 및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를 대리하고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문제의식을 기반으로 작성됐다. 이들은 지난 몇 년간 대학원생 인권침해 문제에 대해 대중적인 공감대가 형성됐지만, 피해자의 실질적인 일상 회복에 대한 관심은 상대적으로 미비했다고 입을 모은다. 보고서를 작성한 문지호(영어영문 석사수료) 씨와 배경민(영어영문 석사과정) 씨, 이우창(영어영문 박사과정) 씨를 기자가 만났다.

Q. 개선안은 2차 피해의 유형과 성격을 구분하고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주를 이룬다. 성폭력·인권침해를 당한 대학원생이 겪는 2차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선 무엇이 가장 중요할까.

경민 기본적으로 제도가 탄탄해져야 한다. 학생에 대한 평가와 진로를 결정할 권한이 교수 집단에 집중된 대학원 속성상, 공동체의 분위기가 학생 피해자를 배제하거나 공격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그런 만큼 피해자를 지지해줄 제도의 역할이 더욱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피해자 보호 및 지원 장치가 굉장히 미흡하고, 2차 피해 방지를 위해 학교 차원에서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도 않는다. 근본적인 대책은 피해자를 지원하는 제도적 환경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창 대학원생 성폭력 및 인권침해 사건의 중요한 특징은 사건 발생 이후에도 피해자가 여러 제도적 환경과 권력관계의 영향력에 노출된 채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피해자는 진공 상태 속에서 외부와 독립된 상태로 지내는 게 아니다. 예를 들어, 지도교수가 가해자인 상황을 생각해보라. 사건 발생 이후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는다면 가해자가 계속해서 피해자에게 자신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지 않겠나. 제도적인 개입을 통해 피해자를 보호하고 피해자가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하는 노력이 필요한 이유다. 피해자 본인이나 그 주변인이 아닌, 제도가 피해자의 회복을 책임지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Q. 제도적 변화를 모색할 때 인권센터와 같은 특정 기관이 아니라 소속 학과나 단과대를 포함한 대학 전반이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이런 부분에 대한 설득이 잘 이뤄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다.

우창 이번 보고서는 인권침해 사건에 대응하는 대학 거버넌스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한 제안이다. 그러나 본부의 보직교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런 사고에 도달하기는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최대한 구체적으로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공동체가 잘 작동해야 한다’, ‘공동체의 문화를 개선해야 한다’라는 이야기의 큰 방향은 맞다. 다만 그렇게 얘기할 때 다양한 주체들에게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이해시키고, 그것을 실천에 옮기도록 설득하기 어렵다. 그래서 더 구체적인 층위로 들어가서 ‘누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본격적으로 제기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피해자를 보호하고 회복을 지원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사람을 명확하게 지정하고 책임을 부여해야 한다.

경민 대학원 내 성폭력 및 인권침해 사건과 2차 가해를 해결하는 것은 공동체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규정하는가의 문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고 생각한다. 대학원은 논문을 생산하고 수업을 제공하는 공간이면서, 구성원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사회적 네트워크를 구성하는 일상적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연구와 교육, 삶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학교는 피해자가 학문적 커리어를 지속할 수 있느냐뿐 아니라, 피해자의 일상의 지속에 대해서도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 구성원들이 학업을 수행하는 동안 안심할 수 있을 것인가, 만약 불의의 사건이 일어나더라도 공동체가 제도적으로 해결을 도모하고 피해자를 지지해줄 수 있는가, 그런 부분까지 제도적 지원의 시야를 넓힐 필요가 있다.

Q. 보고서의 다른 한 축은 조력자·대리인을 위한 행동지침이다. 성폭력·인권침해 사건에 있어 이들의 역할은 무엇이며, 행동지침이 그들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지호 사실 행동지침에서 제안한 조력자·대리인의 기본적인 역할, 예를 들어 정보의 제공이나 정서적인 지원 등은 근본적으로는 시스템이 제공해야 한다. 다만 현실적으로 제도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고 있기에 실제 사건에서는 조력자·대리인에게 많은 역할이 기대되곤 한다. 그러나 조력자가 마치 영웅처럼 모든 것을 맡아서 가해자와 싸우기를 기대하는 건 위험하다. 조력자·대리인은 실질적인 권한이나 책임이 있는 상태가 아니므로 조력 과정에서 수행할 수 있는 역할에는 한계가 있다. 그런 만큼 누군가 조력자·대리인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할 때, 자신이 무엇을 제공할 수 있는지를 인지하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 봤다.

Q. 대학원생 성폭력·인권 침해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 보고서에 담긴 내용 외에도 강조하고 싶은 부분이 있다면?

지호 제도와 문화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며 상호구성하는 관계에 있다. 제도가 경직되면 그 제도의 경직성으로 인해 경직된 문화가 만들어지기도 한다. 정해진 제도의 상한선에 매여 그 이상은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태도로 제도 개선에 대한 논의 자체를 축소하는 식이다. 하지만 제도는 고정된 게 아니다. 현재의 제도적 환경이 어떻게 바뀔 수 있는지, 또 어떻게 바뀌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그런 논의에 구성원이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문화가 자리 잡는다면, 구성원들 모두가 공동체의 성폭력·인권 침해 문제에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창 대학의 의사결정권자들이 책임을 다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지금까지를 돌이켜보면 특정 사건이 발생했을 때 서울대의 의사결정권자들은 침묵하거나 중립을 표방하면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기를 거부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학교에서 입장을 확실히 할 때다.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인권 침해가 일어나면 안 된다는 것, 가해자에겐 적절한 처벌이 내려져야 한다는 것, 사건 이후에도 피해자의 학업은 문제없이 지속돼야 하며 이를 위해 학교가 가능한 지원을 하겠다는 것. 총장을 비롯한 의사결정권자가 이런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하고, 공적인 행위자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를 명확히 밝혀야 한다.

경민 공동체에 소속된 구성원으로서 그 공동체가 제도적으로 혹은 암묵적으로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무엇을 ‘정상’이라고 인지하고, 또 무엇을 ‘비일상’으로 치부하고 있는지 말이다. 모든 구성원이 설사 그 제도의 집행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더라도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의식을 가지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저 한 명의 구성원이 아니라, ‘참여자’라는 책임의식을 스스로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Q. 앞으로 보고서가 어떤 식으로 활용되길 바라시는지 궁금하다.

우창 피해자나 피해 조력자는 사건을 마주해 자신이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삶에서 그러한 사건이 일어나리라 예상치 않았기에, 그 상황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 자체를 던지지 못하기도 한다. 그런 상황에 놓인 이들이 자신의 행동을 준비하는 데 이 보고서가 활용되길 바란다. 덧붙이자면, 피해자나 피해 조력자들이 무력함과 고립감을 많이 호소하곤 한다. 보고서를 통해 나와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이 어떻게 사건에 대응하며 좀 더 나은 결과를 가져가는지를 확인하고 좌절감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좋겠다.

지호 보고서에서 호명하고 있는 기대 독자는 제도 자체인 동시에 피해자와 조력자·대리인, 주변인까지 포함한 여러 행위자다. 이 보고서는 그들에게 대학 내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다는 점에서 사건 해결을 위한 논의에 이미 참여하고 있는 셈이다. 끝으로, 이후의 사건 대응에서 참고할 수 있는 문서가 생겼다는 것 자체가 의의를 가진다고 본다. 물론 아직은 초안 단계이기 때문에 앞으로 훨씬 구체화돼야 할 것이다. 이후에 이뤄질 제도적 개선을 반영하는 작업 역시 필요하다.

댓글 댓글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

Previous Post

교육 혁신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Next Post

이번엔 학교가 변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