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 회의에 군대라는 아이템을 가져갔을 때만 해도 큰 고민은 없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군대 문제였지만 외려 모든 첨예한 논점을 다루고 거기에 그럴 듯한 답을 담아낼 수 있으리라고 자신만만해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이후 기사를 본격적으로 기획하면서부터는 고민의 연속이었다.
그 중 몇몇 대목을 지면 위에 옮겨와본다. 기획회의에서 한 기자는 당시 커버팀이 구상해간 기사를 가리켜 붕 떠있는 것 같다는 피드백을 남겼다. 여성징병제와 관련해 세간에 떠도는 쟁점을 전문가의 의견과 함께 싣자는 구성이였다. 기자들 역시 군대 문제에 서로 다른 생각과 입장을 갖고 있음에도 그 사이의 긴장과 균열을 짐짓 봉합한 채로 멀찍이서 건너다보듯 문제에 접근하고 있음을 간파당한 것이다. 그 회의 자리가 마무리되고 나서 기자가 자기 자신을 소외시킨 글쓰기가 얼마나 싱거워질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한 취재원은 사족이 덧붙은 질문을 건네는 내게 ‘그 질문엔 이미 기자님의 생각이 담긴 것 같다’며 내가 늘어놓은 조악한 해석으로는 포섭하지 못하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인터뷰 자리에서는 티내지 않으려 애썼으나 취재원의 지적에 속으로 ‘아차’ 했음을 이제와 밝힌다. 기자는 자신이 어떤 위치에서 현상을 바라보는지 늘 민감하고 섬세해져야 함을 그날의 부끄러움과 더불어 잊지 않고 싶다.
자기가 발붙이고 선 자리에서 가지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할 것. 그럼에도, 부분적일 수밖에 없는 관점의 한계를 극복하며 편협해지지 않도록 애쓸 것. 맥락화되지 않은 세상의 많은 격언과 교훈들이 그러하듯 이번 기사를 쓰며 얻은 이 두 깨달음은 그것을 어찌 잘 조화시켜야 하는지 나의 깜냥으론 아직 어렵기만 하다. 하지만 다음 기사, 또 그 다음 기사를 만나서 조금씩 연습해가다보면 기사 말미에 이름 석자를 달아두는 일의 무게를 좀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