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는 흔히 ‘별들의 축제’라 불린다. 레드카펫 위의 스타들과 플래시 세례는 영화제의 백미다. 하지만 영화제는 별들이 모이는 축제이기 이전에, 관객과 영화의 특별한 만남의 장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관객의 해체는 영화제와 영화의 본질에 대해 성찰하는 계기가 됐다. 지난해 11월 6일 열린 강릉국제영화제 ‘뉴노멀 시대의 영화제’ 포럼에서 피어스 핸들링 전 토론토국제영화제 조직위원장은 영화제의 역할에 대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관객과의 관계를 다시 쌓아야 한다. 그리고 영화제의 정체성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영화제는 무엇을 해야 할지, 규모는 어느 정도 돼야 할지, 궁극적으로 영화제의 역할은 무엇인지.’
팬데믹과 함께한 지 어느덧 1년 반, 마냥 혼란스러웠던 첫해를 넘기고 영화제는 더 큰 질문들을 안고 다시 문을 열었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와 커뮤니티시네마페스티벌2021(커시페2021)을 중심으로 영화제의 사회적 가치를 짚어봤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지난 4월 31일부터 5월 8일까지 개최됐으며, 5월 3일 시작된 커시페2021은 6월 27일까지 이어진다.

새로운 연대의 방식
영화제에서는 영화를 통한 연대가 싹튼다. 전주국제영화제와 커시페2021은 국제 사회의 민주화 흐름에 적극적인 지지를 보냈다. 커시페2021은 ‘국제연대’ 섹션을 따로 마련해 미얀마와 홍콩의 민주화운동 상황을 공유하고 새로운 연대의 방식을 찾고자 했다. 미얀마의 민주화운동 역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창살로 막을 수 없는 자유》(2012) GV에서는 미얀마민주주의네트워크 소모뚜 대표가 현지의 생생한 상황을 소개했다. 소모뚜 대표는 지난 5월 21일 다락스페이스에서 진행된 GV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에 대한 한국 영화계의 전폭적 지지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문화예술 검열이 심각한 미얀마에선 미얀마의 현실을 다룬 미얀마 영화가 거의 전무하다. 민주화운동을 지지한 많은 미얀마 영화인들이 수배되거나 구속됐다. 소모뚜 대표는 이런 상황 속에서도 국제 영화계의 노력으로 영화를 통해 미얀마의 상황을 전달할 수 있음에 희망을 느꼈다고 말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미얀마 민주화운동뿐만 아니라 여성 혐오, 역사 문제, 빈곤, 소수자 등 현재진행형의 문제를 다룬 영화들을 전면에 내세웠다. 전주국제영화제는 지난 20년간 정치권력이나 자본 등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독립적인 영화를 발굴하고 지지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왔다. 영화제는 목소리가 지워진 영화인들에게 마이크를 잡을 기회를 건넨다. 피어스 핸들링 전 조직위원장은 강릉국제영화제 포럼에서 ‘영화제의 목적은 더 다양한 목소리를 소개하고 국제 영화계가 다양성을 반영하도록 하는 것’이라며 ‘독립영화의 흥행을 위해 영화제는 절실히 필요하고 계속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워졌던 주체들 가운데는 여성 영화인도 있다. 이번 전주국제영화제는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세계의 여성 독립영화 감독들을 발굴하는 ‘스페셜 포커스: 인디펜던트 우먼’ 섹션을 선보였다. 새로운 형식과 금기시되던 주제를 시도해 영화 역사에 발자취를 남긴 여성 감독들이 소개됐다. 전주국제영화제 자료집에서 문성경 프로그래머는 ‘인디펜던트 우먼’에 서 소개한 여성 감독들이 ‘여성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긍정하고 독립적인 존재로 자신이 본질에 닿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여성들’이라며 그들의 작품이 오늘날의 여성들에게 영감을 주길 희망한다고 언급했다.
커시페2021 역시 ‘움직이는 여성들’ 섹션을 통해 다양한 여성의 삶을 담은 다큐멘터리 4편을 소개한다. 무명씨네 이하늘 대표는 영화제가 “여성 창작자들이 상영작 선정에 있어 성별에 따라 판단되지 않고 평등한 절차를 거쳐 소개될 수 있다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여성 영화인에 대한 특별한 주목이 언젠가는 필요 없어질 때가 와야겠지만 아직은 필요한 작업이라고 강조했다.
대규모 상업영화 위주의 영화산업 생태계에서 영화제는 다양성과 공정함의 실현을 위한 영화인들의 연대 수단이다. 커시페2021을 주최하는 ‘커뮤니티시네마네트워크 사회적협동조합(커시네)’은 전국 지역의 영화단체와 소규모 영화상영공간의 주체들이 모여 2020년 결성한 협동조합이다. 커시페2021에 참여한 소규모 영화관들의 대다수는 법적으로 정식영화관 등록을 받지 못한 비상설 영화관이다. 정식영화관 등록 조건에 부합하기 위해선 상당한 자본이 필요하다. 소규모 공간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공동체 문화 프로그램을 운영하던 지역의 소규모 영화관들이 지속적 활동과 자립을 위해 설립한 단체가 커시네다.
커시페2021은 올해 커시네가 처음 선보인 영화제다. 5개 지역의 소규모 영화관에서 순회방식으로 개최되며, 전 지역이 함께 상영하는 ‘공통섹션’과 지역별로 상영하는 ‘지역섹션’으로 구성됐다. 지역섹션은 각 지역 영화단체가 자체적으로 꾸렸다. 공통 의제를 갖고 영화단체들이 연대하는 동시에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획이다. 이하늘 대표는 커시페2021을 통해 “영화가 가진 여러 차원의 사회적 가치와 의의를 새롭게 조망하고, 영화활동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영화인들은 영화제를 통해 공생의 방식을 찾고 있다.
영화제, 지역사회와 함께하다
지역주민은 영화제의 문을 두드리는 첫 관객이다. 지역에서 개최되는 영화제는 지역주민의 문화향유권 보장에 기여한다. 독립예술영화관은 수도권에 대거 집중돼 있다. 비수도권에서 독립·예술영화 관람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방 대도시들도 마찬가지다. 인구 4위의 도시인 대구에 독립예술영화관은 두 곳뿐이다. 대구에 거주하는 대학생 김보경 씨와 임하영 씨(가명)는 독립영화의 경우 상영관과 자리가 모두 부족해 원하는 영화를 보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상업영화관에서 간혹 독립영화를 상영하기도 하지만 역시 관 수가 적고 상영 기간도 짧다. 임 씨는 “독립영화에서 공감 가는 시각을 많이 발견하는데, 마음을 먹고 시간을 내지 않으면 보기 어렵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영화제는 짧은 기간이나마 지역민들에게 다양한 문화적 취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여러 선택지를 제공한다.

지역에서 창작활동을 이어가는 영화인들에게도 영화제는 좋은 기회다. 커시페2021은 지역의 창작자와 작품을 소개한다. 무명씨네 지역섹션의 ‘최진영 감독 전: 초기단편’ 기획이 대표적인 예다. 이하늘 대표는 지역섹션을 통해 “지역에서 영화감독으로 살아가며 장편 감독으로까지 성장한 최진영 감독을 조명하고 다양한 장르에 도전하는 지역 감독들의 존재를 알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최 감독의 첫 장편인 《태어나길 잘했어》(2020) 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전주국제영화제도 전북 지역의 영화인들을 발굴하고자 지역 공모 프로그램과 지역영화인 대상 제작 지원 사업인 ‘전주숏프로젝트’를 운영했다.
한발 더 나아가 커시페2021은 지역 영화제의 확장을 통해 사회적 가치를 제시한다. 커시페2021은 공동체가 함께하는 영화관인 ‘커뮤니티시네마’를 제안한다. 커뮤니티시네마에서는 지역주민들의 문화향유권을 보장하고 영화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사회적 의제들을 시민들과 공유하는 사회적 가치 활동이 이뤄진다. 이하늘 대표는 “영화를 통해 사회적 담론을 지역사회에 이야기하고 확장시키는 것이 커뮤니티시네마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소규모 영화제인 덕에 관객과 창작자 사이에 더 내밀한 대화가 가능하다. 이 대표는 커시페2021이 “커뮤니티 단위가 만드는 영화 축제”라며 “무대와 무대 아래의 위계 없이 대화의 장을 마련할 수 있다”고 말했다.

영화관에서 대안 찾기
영화제는 사회적 의제의 담론을 형성할 뿐만 아니라 실천 방안을 모색한다. GV를 통해 각 섹션 의제의 전문가·관계자들과 교류하고, 포럼과 컨퍼런스를 통해 영화계 안팎에서 영화제의 역할을 논의하기도 한다. 커시페2021 국제연대 섹션의 소모뚜 대표 GV에서 관객들은 미얀마 민주화운동을 실질적으로 도울 방법을 질문했다. 기후위기와 환경문제를 다룬 ‘전환도시’ 섹션 GV에서는 현재 활동 중인 환경운동가들을 만난다.
왜 하필 영화로 사회 문제를 다뤄야 할까? 이하늘 대표는 영화가 가진 “일상화의 힘”을 강조했다. 이 대표는 “영화는 가장 접근성이 높고 보편적인 예술 장르”라며 “시민들의 삶 속에 다양한 형태로 녹아들어 사소한 수다나 작은 의식 속에서 (사회적 문제의식이) 발현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예술인 영화는 타인과 우리의 거리를 좁히는 매개체가 된다.
무엇보다 강력한 영화의 힘은 공감이다. 김옥영 작가는 전주국제영화제 에세이 모음집 『영화는 무엇이 될 것인가?』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는 타인의 삶을 발견하고 이해함으로써 우리가 우리 자신의 삶을 발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었고, 그 노력을 통해 우리를 서로 연결시키는 통로였다.’ 영화는 타인과 사회를 보는 우리의 상상력을 길러준다. 영화제라는 공론장은 상상력을 동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방법을 제시한다.
영화는 같은 공간에서 관람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 진정한 가치가 드러난다. 많은 관객과 영화인들은 코로나19를 겪으며, 영화관에서 함께 울고 웃은 뒤 열띤 토론을 하고 창작자를 만나는 일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입을 모은다. 피어스 핸들링 전 조직위원장은 강릉국제영화제 포럼 기조발언에서 코로나19 이전의 영화제에 대해 ‘무대 위 감독들과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고, 주변 사람들과 떠들고 토론하고 즐기고 줄 서며 영화 사랑을 얘기하는 곳’이었다고 회상했다. 물리적인 체험으로서의 영화제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평소 느낄 수 없는 감정을 공유하는 만남의 장이었다. 다른 관객들과 모르는 사이인데도 같이 영화를 즐기려고 약속을 잡고 만난 느낌이었다.” 김보경 씨가 전한 영화제의 추억이다. 영화제는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행사다. 낯선 이웃들과 함께 새로운 세계에 뛰어드는 공동체적 모험이다. 영화의 사회적 가치를 지키고자 힘쓰는 영화제들에 어느 때보다 큰 응원과 관심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