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고는 한국과학사학회지 제43권 1호에 게재된 장민제·신인호·임소연의 논문 ‘기계는 어떻게 여성의 목소리를 갖게 되는가?: 1980-90년대 버스 자동 음성안내 도입을 중심으로’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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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베이터부터 대중교통, 인공지능 음성비서까지 우리의 일상 속에서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기계음은 여성의 목소리이다. 아침에 눈을 뜰 때부터 잠들기 직전까지 우리는 수많은 여성 목소리의 기계음을 들으며 살아간다. 여성의 목소리로 아침잠에서 깨고,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지하철 개찰구를 통과하며, 여성의 목소리로 안내되는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여성의 목소리가 나오는 AI 음성 비서 서비스를 활용하고, 여성의 목소리로 안내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한다. 이렇게 어디에나 있는 여성 목소리의 기계음은 기계음이 여성의 목소리인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게 하고, 심지어 여성의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활용되기에 근본적으로 더 적합한 물리적 속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기존의 젠더화된 기계음에 대한 설명은 여성의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더 선호되는 현상의 원인을 주로 여성 목소리가 지닌 특정한 속성에서 찾아왔다. 가령, 음높이(pitch)가 높은 목소리를 내는(여성을 모방하는) 기계가 이용자들에게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더 질 높은 상호작용 경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여성의 목소리가 기계음으로 주로 사용되는 이유를 남성과 구분되는 여성 목소리의 속성에서 찾으려는 시도들 속에는 기계음이 여성의 목소리로 고착화한 현상의 원인이 특정한 하나의 물리적 속성 혹은 생물학적 특성으로 환원될 수 있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특정한 성별을 지닌 기계음이 채택되는 과정에서 사람들의 선호나 인식이 자연스럽게 반영됨에도, 이런 환원은 기계음이 여성의 목소리로 굳어지게 한 사회적·역사적 맥락을 배제한다. 우리나라에서 기계음이 여성의 목소리로 고착화한 역사를 살펴보면, 기계음의 여성화는 여성 목소리의 생물학적 혹은 물리적 속성에 기인하는 것이라기보다 집단적 기대와 사회적 구조에 더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특히 버스에서 안내양이 사라지고 음성안내장치가 도입되기 시작한 1980년대의 상황은 기계음의 여성화에 어떤 사회적 요인들이 작용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1980년대 초반 버스에 탑재되기 시작한 자동음성안내장치는 안내양을 대체하기 위해 등장했다. 안내양은 1960년대 초반부터 버스에서 승객의 안전을 책임지고 정류장을 안내하는 역할을 도맡았다. 본래 버스 안내원이라는 직업은 1950년대까지만 해도 주로 젊은 남성들이 담당했다. 하지만 척박한 노동환경 속에서 남성 안내원들이 승객들과 마찰을 빚는 일이 잦아지고, 이것이 사회적 문제로까지 비화하자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이 안내원 업무를 전담하게 한다. 1961년 8월 정부는 버스의 안내원을 모두 여성으로 교체하라고 지시했는데, 그 근거로 거친 남자보다는 ‘상냥하고 친절한’ 여자들에게 승객을 안내하도록 하여 명랑한 시민교통을 이룩해야 하며, 여성의 유휴노동력을 개발하여 산업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들었다.
1980년대 서울 시내에 지하철이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전까지 서울 시내에서는 버스가 주요 교통수단이었고, 이 버스 시스템을 지탱하던 것은 저임금으로 장시간 노동하던 안내양과 버스 기사들이었다. 특히 당시 안내양은 터무니없이 적은 임금을 받으면서 하루 18시간씩 서서 근무했는데, 이들은 주로 농촌에서 상경한 나이 어린 여성들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후반이 되면서 안내양의 열악한 노동환경 문제가 널리 알려지고, 사회 전반의 임금 수준이 높아지면서 버스 회사는 안내양 고용에 부담을 느끼게 된다. 1980년대에는 지하철 개통으로 버스 회사의 수입이 감소하고 안내양 구인이 점차 어려워지자, 안내양의 빈 자리를 채우기 위해 자동음성안내장치와 전광판, 자동문 등의 기계 장치가 차츰 도입되기 시작한다.
이때 도입된 안내방송은 모두 여성의 목소리로 녹음됐는데, 여기에는 당시 사람들이 ‘이상적인 안내양’에게 기대하던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성’의 이미지가 투영됐다. 자동음성안내장치 도입 당시 광주시 당국의 문건에 따르면 안내방송은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음성으로 방송하여 명랑한 분위기를 조성할 것’이 강조되었는데, 이는 지자체 당국이 기계음에 여성의 모습을 부여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여성의 모습’은 기계장치 도입 이전 당대 사람들이 버스 안내양에게 기대했던 순종적이고 친절한 여성의 이미지와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안내양에 대한 교육은 승객들의 불손한 태도에도 항상 평정심과 명랑함을 유지하고, 적당한 높이의 목소리를 낼 것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은 새롭게 등장한 음성안내장치를 ‘아가씨’ 혹은 ‘컴퓨터 안내양’으로, 안내음성을 ‘앳된 소녀의 명랑한 목소리’와 ‘상냥한 안내양의 목소리’로 자연스럽게 의인화해 받아들이며 기계 장치에서 여성의 모습, 특히 여성 안내양의 모습을 매우 당연한 듯이 기대했다. 이는 1960년대 이뤄진 버스 안내 노동의 성별화가 안내 노동과 여성의 모습을 결합시키는 형태로 작용했고, 그것이 안내음성의 여성화를 자연스럽게 이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은 당시 ‘자동화 붐’을 타고 엘리베이터(엘리베이터 안내양), 114(상담원) 등 주로 여성들이 담당하던 보조적 노동을 대체하는 데까지 이르며 심화한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여성 목소리의 기계음이 당시 사회 구성원들이 서비스직 여성들에게 기대하던 이미지를 그대로 투영한 사회적 산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여성화된 기계 안내음에는 유휴 인력으로 취급되며 보조적인 노동을 할당 받았던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당시 여성에게 기대되던 사회적 역할이 그대로 반영됐다. 그리고 여성의 목소리로 굳어진 기계 안내음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하지 않고 여성의 목소리인 채로 남아있다. 앞서 살펴본 버스 안내양의 사례를 통해 기계음이 특정한 여성의 목소리로 굳어진 현상은 사회·문화적으로 형성된 것이고, 그 배후에 특정한 사회적 관계와 물적 조건이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면, 젠더중립적인 기계음을 개발하는 것과 같이 여러 현상에 잠재하는 편견과 차별을 찾아내어 수정하려는 시도들이 결코 무용한 일이 아닌,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의미 있는일들로 정치하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장민제(경영 16, 과학기술학 연계전공)
경영학과 과학기술학(STS)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만드는 사회적 관계와 물적 조건을 탐구하는 데 관심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