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으로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면 자살예방상담전화 1393 등에서 24시간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자살 관련 보도 기사 하단에 종종 보이는 네 자리 숫자 ‘1393’은 극심한 우울감이나 자살 충동을 느낄 때 언제든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자살예방상담전화’ 번호다. ‘OECD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달고 사는 한국엔 마음이 아픈 사람이 많다. 최근 ‘코로나 블루’의 확산으로 1393을 찾는 사람은 더욱 늘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자살예방상담전화의 월평균 상담 건수는 2019년 9,217건에서 2020년 14,171건으로 53% 상승했다.
그런데 1393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자살예방상담전화 상담사들은, 전화 받는 사람 역시 우울하다고 말한다. 타인의 우울함을 들어주는 이들은 어떤 아픔을 안고 있을까. 자살예방상담전화 상담사들의 노동 실태를 파헤쳐 봤다.
‘죽고 싶다’는 말을 듣는 노동자들을 아시나요?
자살예방상담전화(1393)는 여러 기관으로 나뉘어있던 기존의 자살예방상담전화를 보완한 통합 회선으로, 2018년 12월 보건복지상담센터 산하에 개설됐다. 4조 3교대로 일하는 자살예방상담전화 상담사들은 전국 각지에서 1393으로 걸려오는 전화를 24시간 응대한다. 수화기 너머 정신적 위험에 처한 내담자가 다시 안정적인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상담사의 주 업무다. 상담사는 내담자를 심리적으로 안정시키고, 지역 경찰서나 소방서, 정신건강복지센터에 연계해 돕는다.

1393 자살예방상담전화 홍보 포스터
익명으로 진행되는 자살예방상담전화에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전화를 건다. 스트레스를 털어놓거나 생계곤란을 호소하는 내담자부터 당장 자살 위험에 처한 내담자까지 광범위하다. 주로 극단적인 감정 상태의 내담자와 마주하는 상담사들은 욕설이나 성희롱, 협박성 발언에 종종 시달린다. 전 상담사 A씨는 “모욕은 물론 상담사 이름을 유서에 쓰고 위협하는 일도 자주 있다”고 털어놓았다.
2021년 3월 기준 1393으로 걸려오는 전화는 하루 평균 560건이다. 4조 3교대로 근무하는 20명의 상담사 한 명당 하루 평균 37건의 전화가 걸려오는 셈이다. 이 중 상담사가 실제로 응대할 수 있는 상담 전화는 약 12건에 불과하다. 자살예방상담은 상담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기에 상담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전화가 가장 몰리는 심야 시간대는 심리적으로 불안한 상태의 내담자들이 많지만 응대율이 30%대로 떨어진다. 현 상담사 B씨는 “모든 상담사가 최대한의 에너지를 짜내 상담을 하고 있지만 전화를 빨리 받지 않는다는 민원이 많다”며, “상담사들도 마음이 조급해져 내담자와 충분한 시간을 갖기보다 빨리 다음 전화를 받는 데 집중하게 된다”고 토로했다. 코로나 이후 상담이 급증하자 보건복지부는 임시로 자원봉사자를 모집해 인력을 보충했지만, 급증한 전화를 모두 응대하기엔 역부족이다.
끊을 수 없는 전화, 쉴 수 없는 상담사
밤낮없이 밀려드는 전화 너머로 “죽고 싶다”는 목소리를 수없이 듣는 상담사들은 늘 정신적 위험에 노출된다. 전 상담사 C씨는 “동료 상담사가 응대한 민원인이 통화 후 자살을 시도해 심각한 부상을 입었는데, 당시 상담사의 충격이 컸다”고 회상한다. 타인의 우울함을 들어줘야 할 상담사가 되레 심리적 외상을 입는 셈이다. A씨는 “상담사가 위기상황 상담을 반복할 때 정신적 스트레스와 함께 수면부족, 식욕저하, 생리 주기 변화 등이 나타나기도 한다”며 “일부 상담사들은 개인적으로 정신과 치료나 심리상담을 받는다”고 밝혔다.
욕설을 퍼붓는 내담자라 해도 상담사는 쉽게 전화를 끊을 수 없다. 악성민원응대매뉴얼은 악성민원인에 대해 몇 차례 경고 후 통화를 끊을 수 있다고 안내하지만, 대부분의 상담사들은 매뉴얼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망설인다. 내담자의 극단적 선택을 어떻게든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B씨는 “상담사 역시 죽고 싶을 만큼의 스트레스에 노출된 후에야 매뉴얼을 적용해 볼 수 있다. 몇몇 내담자는 상담사가 섣불리 전화를 끊을 수 없다는 걸 알고 더 모질게 대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통화 후 회복을 위해 잠깐 쉬는 것도 상담사들에겐 허락되지 않는다. 쉴새 없이 밀려드는 전화 탓이다. 전 상담사 D씨는 “강렬한 감정을 쏟아낸 내담자와 상담 후에는 반드시 충분한 휴식과 재정비가 필요하지만, 급증한 상담 건수 탓에 바로 다음 상담에 투입된다”고 말했다. 상담사들은 휴식 시간까지 반납하며 상담 건수를 늘릴 것을 요구받는다. D씨는 “(1393을 관할하는) 보건복지상담센터는 응대율을 높이기 위해 야간 근무 휴게시간을 감소시켰다”며 상담사의 건강권이 고려되지 못함을 지적했다. 상담 건수를 평가하는 성과급 체계도 상담사를 쉴 수 없게 한다. B씨는 “분기별로 월평균 상담 건수를 일정 수 초과해야 성과급을 지급한다”며 성과급제로 인한 상담 건수 압박을 비판했다.
상담사의 정신건강을 위해선 충분한 휴식과 함께 주기적인 심리상담 서비스가 필요하다. 2020년 10월 국정감사에서 상담사들의 정신건강 문제가 제기되자 보건복지상담센터는 연말에 상담사들을 대상으로 2회의 심리상담을 실시했다. 이에 대해 B씨는 “가뭄에 콩 나듯 지적을 받아야만 시행되는 심리검사론 불충분하다”며 “정기적으로 상담사들의 정신건강을 관리하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자살예방상담전화를 관할하는 보건복지상담센터는 상담사에게 충분한 휴게시간과 심리 상담을 제공할 법적 의무가 있다.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은 사업주는 건강장해가 우려되는 경우 노동자의 신체적·정신적 안정에 필요한 휴식 시간을 부여하고 치료 및 상담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고 규정한다. 그러나 해당 조항은 상담사들에게 적용되지 못하고 있다. D씨는 “센터는 업무상 재해라 볼 수 있는 심리적 외상의 회복을 상담사의 몫으로 본다”며 센터의 소극적인 태도를 꼬집었다. 법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이유가 강제성이 없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이나래 집행위원장은 법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산업안전보건공단에서 적극적으로 시행지침을 내리고 고용노동부의 관리감독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상담사들의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의 상태를 장기적으로 추적할 전문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한양대 김인아 교수(직업환경의학교실)는 그 예시로 “스위스 국제노동기구에는 노동자들의 총체적 건강을 관리하며 순회하는 의사들이 있다”고 말했다. 국내의 사례로는 서울시감정노동종사자권리보호센터가 진행하는 ‘기관별 맞춤형 컨설팅’ 사업이 있다. 노무사, 의사, 상담전문가 등 전문가로 구성된 컨설팅단이 기관 내 감정노동자들의 어려움을 듣고 각 기관에 맞춘 감정노동자 보호매뉴얼을 자문해준다.
데스크를 떠나는 상담사들
고된 감정노동을 수행하는 상담사들을 더욱 지치게 하는 것은 업무 강도에 비해 턱없이 낮은 임금이다. 상담사들의 기본급은 약 210만 원으로, 공휴일 보장 없이 4조 3교대로 근무하는 상담사들의 출근 일수를 고려하면 최저임금 수준이다. 호봉제도 적용되지 않아 1년 일한 상담사와 16년 일한 상담사의 기본급이 같다. 민주노총 서비스연맹 서비스일반노조 콜센터지부 염희정 지부장은 “콜센터 이직률이 높은 이유 중 하나가 근속기간과 전문성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호봉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저임금 고강도 노동에 지친 많은 상담사가 데스크를 떠나면서 센터는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려왔다. 상담사들은 평균 근속기간이 3년 미만이며, 최근 2년 반 사이 20명이 센터를 떠났을 정도로 이직률이 높다. 인력 충원을 위해 잦은 채용 공고를 내도 지원자는 많지 않다. 올해 7월 채용에서 지원요건을 충족한 지원자는 14명으로, 모집인원인 25명보다도 적었다. 전 상담사 E씨는 “센터가 돈은 적은데 일은 힘들다는 소문이 업계에 파다하다”며 노동자들이 센터를 기피한다고 설명했다. 부족한 인력은 낮은 응대율로 나타난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9년 1월부터 2020년 7월까지 자살예방상담전화의 상담 실패율은 54%를 기록했다.
만성적 인력 부족은 자살예방상담의 전문성 약화로 이어진다. 상담사의 이직률이 높아 경험이 풍부한 장기근속자가 적기 때문이다. 지원자를 늘리려 채용 기준도 완화됐다. 기존에는 자격 요건을 사회복지·정신건강 전공자 혹은 자격증 소지자로 제한했으나 이를 국가·공공기관 콜센터 상담업무 1년 이상의 경력으로 대체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에 대해 D씨는 “자살예방상담은 전문적인 지식과 경력을 필요로 하는데 채용 기준 완화로 (상담사들이) 내담자에게 섣부르게 접근하게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최근 이뤄진 ‘팀 분리’는 전문성 약화를 더욱 부추겼다. 본래 자살예방상담전화는 보건복지상담센터 내 ‘위기대응상담팀’이 긴급복지·아동학대 민원과 함께 담당했으나, 전문성을 위해 올해 7월 자살예방상담 업무만 전담하는 ‘자살예방상담팀’이 분리됐다. 그러나 팀 분리 과정에서 1393 개통 이후의 입사자만 자살예방상담팀에 포함되며 논란이 일었다. 개통 이전부터 자살예방상담을 해온 장기근속자는 배제된 것이다. C씨는 “자살예방상담은 1393 개통 이전에도 위기대응상담팀에서 16년간 진행해왔지만, 센터가 경력을 인정하지 않아 더이상 자살예방상담을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자살예방상담에 장기근속자가 배제되며 상담사들의 업무 강도와 부담감은 늘어났다. 숙련도가 낮은 신입 상담사들이 도움을 청하곤 했던 장기근속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복지부는 자살예방상담팀의 전문성을 위해 경력 3년 이상의 관리자를 배치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배치된 관리자 4명 중 절반은 자살예방상담경력이 없었다. 또한 관리자들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만 근무해 상담이 가장 몰리는 심야 시간대에 도움을 줄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상담사들이 데스크를 떠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저임금 고강도의 노동조건 개선이 급선무다. 현재의 4조 3교대 근무체계 아래 상담사들은 제대로 된 휴식 시간 없이 4일 연속 야간업무를 주기적으로 반복해야 한다. B씨는 “인력충원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장기근속을 위해 근본적으로 임금체계와 교대근무체계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담사가 소진되지 않는 노동 환경을 만드는 것은 자살예방상담의 질과도 직결된다. 염희정 지부장은 “상담사의 처우를 개선하고 1인당 상담 건수를 줄여야 깊이 있는 상담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한다.

작년 11월, 보건복지상담센터 상담사들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다. ⓒ보건의료노조 보건복지공무직지부
전화 받는 이도 건강할 수 있도록
2018년 산안법 개정 시 고객응대근로자 보호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콜센터 노동자의 통화거절권 논의가 사회적으로 확산됐지만, 자살예방상담전화와 같은 특수 상담업무 직군의 작업중지권은 함께 논의되지 못했다. 자살예방상담사의 작업중지는 자칫 내담자의 극단적 선택에 영향을 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나래 집행위원장은 “(자살예방상담의) 작업중지권은 고민되는 문제”라면서도 “그동안 노동자 개인이 심리적 고통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어떻게든 유지됐다”며 작업중지권에 관한 사회적 논의 자체가 부족했다고 비판했다.
상담사와 내담자를 모두 보호하는 작업중지를 위해 귀기울여야 할 것은 현장 상담사들의 목소리다. 김인아 교수는 “작업 중지 여부의 판단은 사실 상담사들이 가장 전문가”라며 상담사의 역할을 강조했다. 상담사의 통화거절권을 규정한 악성민원응대매뉴얼이 있지만, 센터가 해당 매뉴얼을 만들면서 상담사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은 없었다.
포괄적인 노동환경 개선 과정에서도 상담사의 참여 확대가 요구된다. 노사협의회는 근무 여건 개선을 위해 노동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대표적인 기구다. 그러나 C씨는 “노사협의회에서 정작 중요한 사안은 통보식으로 처리되거나 (센터가) 인사권과 경영권을 내세워 권위로 해결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지난 7월 자살예방상담팀 분리가 결정될 때도 상담사들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 김인아 교수는 “노동자와 함께 해결책을 만들어나가기 위한 지속적인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며 노동자가 참여하는 민주적 운영 문화가 회사와 사회 전반에 정착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모두가 코로나19 이후 급증하는 국민의 우울감에 주목할 때, 그 우울함을 받아내는 사람들의 노동은 지워지곤 했다. 자살예방상담전화 상담사들은 저임금의 고된 감정노동에 지쳐 센터를 떠나갔으며, 남은 상담사들은 떠나간 동료들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더욱 무거운 짐을 떠안아야 했다. 텅 빈 데스크와 노동자들의 병든 몸은 자살예방상담전화 상담사들의 권리 보장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부족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우리의 아픔이 그들의 통화에 위로받은 만큼, 이제는 우리가 노동자들의 아픔을 ‘들어줄’ 차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