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서울대저널>은 인권헌장을 다룬 특집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는 인권헌장(안)이 발표되고 1년이 지났지만 인권헌장 제정에 이렇다 할 진척이 없다고 평가했다.(165호 ‘인권헌장, 왜 안 해?’ 기사 참조) 보도 이후의 상황은 어떨까. 인권헌장 제정의 현주소를 짚어봤다.
인권헌장 제정은 어디쯤 왔나?
인권헌장 제정과 관련해 유의미하게 진척된 부분은 많지 않다. 인권헌장 제정을 담당하는 학생지원과는 헌장 제정을 위해 다각적 검토를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 인권헌장 제정 추진 현황과 관련한 <서울대저널>의 질문에 “구성원 간에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어 이를 다각적으로 검토하는 중”이라고 답했던 것과 같은 입장이다(165호 ‘시작은 선언이었지만, 결과는 창대하리라?’ 기사 참조). 하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학생지원과는 “인권헌장 쟁점 조항인 제3조에 대해 학내 구성원 간에 의견 차이가 좁혀지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현재 논의되는 인권헌장은 학내 인권규범의 필요성에 대한 공감대가 확산되는 흐름 속에서 만들어졌다.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2020)는 ‘인권규범 제정은 2019년 서울대학교 주요 추진 사업 가운데 하나’라고 언급했다. 오세정 총장 역시 2019년 <한겨레> 인터뷰에서 ‘무엇보다 서울대 공동체 전반에 인권 가치가 뿌리내리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며 ‘구성원들의 권리와 책임을 천명하는 인권규범을 제정, 선포하겠다’고 인권규범 제정의 의지를 드러냈다. 대학원생 인권보호 지침 마련을 위한 연구도 이뤄져 2020년 3월 초안이 발표됐다. 두 제정(안)에 대한 학내 의견수렴 및 법률 자문, 수정 작업을 거친 후 작년 10월 공청회가 진행됐으나 그 이후로 학교가 추진하고 있는 인권헌장 관련 사업은 찾기 어렵다.
학내 인권 규범의 제정 시도는 2013년 추진된 인권 가이드라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권 가이드라인은 인권헌장과 달리 공식 규범화를 목표로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인권센터 이주영 전문위원은 “그때는 학내 규범화는 크게 생각지 않았고, 교수연구실이나 학과에 열 개 정도의 간단한 지침을 제공하고자 했던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련된 인권 가이드라인 초안을 두고도 의견차가 여럿 있었다. 당시 인권센터장을 역임했던 정진성 교수(사회학과)는 “무엇을 차별이라고 볼지를 놓고 이견이 있었다”며 “정규직-비정규직이나 교수-직원은 다 차이가 있다는 말들이 오갔다”고 상기했다. 가이드라인을 다듬기 위한 여러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중단됐다.
이후 학생 중심으로 인권규범 마련을 위한 노력이 이어졌다. 2016년 총학생회 산하 인권 가이드라인 특별위원회(특별위원회)를 주축으로 인권 가이드라인이 마련됐고, 9월 하반기 정기 전체학생대표자회의에서 제정안이 통과됐다. 특별위원회는 본부와의 대화를 통해 규범화를 시도했으나 2017년 시흥캠퍼스 반대 점거 농성으로 본부와 마찰이 지속되면서 논의가 진전되지 못했다.
잇달아 발생한 학내 인권 침해 사례로 인권헌장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2018년 학생들은 학생에 성폭력과 갑질을 저지른 사회학과 H교수를 규탄하는 천막농성을 진행했다. 그해 여름, H교수 사건대응을 위한 학생연대는 천막농성 해제 조건으로 학교가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을 위한 제반 작업을 진행할 것을 다짐받았다. 인권 침해 사건을 예방하고 구성원의 실질적인 인권 보장을 위해 포괄적인 인권 규범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후 학생과 교수가 함께 참여한 인권센터 연구팀의 「서울대학교 인권 개선 과제와 발전 방향」(2019)에서 학내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대한 합의된 인식 부재가 인권 문제 발생 시 혼란과 갈등을 빚는 핵심 원인 중 하나라고 지적했다.

인권헌장이 공식 규범이 되려면
인권헌장 제정은 인권헌장이 학내 규범으로서 자리 잡을 때 완성된다. 인권헌장 제정 업무는 본부 학생지원과에서 담당하고 있다. 학생지원과는 인권헌장에 대한 학내 의견 수렴 및 공청회 개최, 규범화 절차 진행 업무를 진행한다. 인권헌장을 규정으로 제정하기 위해서는 학사위원회 심의 후 평의원회 심의를 거칠 필요가 있다. 학생지원과는 “학내 논의를 통해 의견이 모이면 규정 제정 절차에 따라 학사위원회에 상정 후 평의원회에 상정도 돼야 한다”고 설명했다.
인권헌장 제정의 구체적 방안에 대해서는 입장 차가 있었다.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2020)에서 연구팀은 정관에 위임 규정을 두고 별도의 규정으로 인권헌장을 제정하는 방식을 제안했다. 규정의 형태로 제정해 구속력 있는 규범으로 기능하도록 하고, 동시에 정관에 위임 규정을 둬 인권헌장이 무효화될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규정의 제정은 평의원회 의결만으로 이뤄질 수 있지만, 정관 변경을 위해서는 평의원회와 이사회 심의 및 의결, 교육부 승인이 필요하다.
정관에 위임 규정을 두고 규정을 만드는 연구팀 제안대로라면, 규정 제정과 정관 변경이 모두 필요하다. 연구팀의 제안과 달리, 학생지원과는 규정 제정 과정만 요구된다고 봤다. 학생지원과는 “정관 변경까지는 아니고 규정 제정을 위해 평의원회 통과까지 필요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사회 요청 시 이사회 논의도 가능하지만, 기본적으로는 규정 제정이므로 정관 변경 없이 평의원회 통과로 충분하단 것이다.
두 방안 모두 평의원회 심의는 필수적이다. 이 과정에 학생의 직접적인 참여는 불가능하다. 전체 평의원 50명 중 45명이 교원이며, 5명은 직원이다.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각각 학생 대표 한 명이 참관인으로서 평의원회 본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것에 그친다. 평의원회에 안건을 상정하는 것 역시 제한돼 있다. 평의원회는 안건 상정에 대해 “(대학 본부의) 부서에서 공문으로 평의원회에 제출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3조 논쟁’을 이겨낸 인권 규범
하지만 인권헌장은 제정 절차에 돌입하지 못한 채 논의 단계에 머물러있다.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에 포함한 인권헌장 제3조의 내용 때문이다. (165호 “인권헌장 3조가 뭐길래?” 기사 참조) 서울대 기독교수협의회, 서울대 인권가이드라인 반대학생연대 Say No, 진정한 인권을 위한 서울대인 연대 등은 2016년 인권가이드라인과 최근의 인권헌장 제정 과정에서 차별금지 조항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개진했다. 2020년 국정감사 현장에서도 같은 상황이 반복됐다. 국민의힘 조경태 국회의원은 오세정 총장에게 “성적 지향과 관련해 객관적인 팩트에 기반한 비판조차 못 하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며 제3조를 문제시했다.
인권헌장을 마련한 연구팀에서는 성적 지향과 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금지는 국제인권법을 비롯한 주요 인권규범에서 명시된 사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연구를 책임진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는 지난 3월 <서울대저널>과의 인터뷰에서 “인권존중 문화가 정착된 다수 국가의 대학에서 이미 당연하게 여겨지는 원칙”이라고 설명했다.

이미 국내에도 ‘3조 논쟁’을 극복하고 제정된 인권 규범이 있다. 초·중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서울특별시 학생인권 조례와 해당 조례를 바탕으로 올해 4월 발표된 제2기 학생인권종합계획(2021~2023)이 그 예시다. 학생인권조례의 경우 제5조 차별받지 않을 권리에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에 대한 차별금지가 명시돼 있으며, 학생인권종합계획의 경우 ‘성소수자학생 보호 및 지원’을 기술하고 있다.
해당 규범의 차별금지 조항에 대한 반대에 많은 이들은 정면으로 반박했다. 동성애를 부추긴다는 반대 여론에 조희연 서울시 교육감은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차별금지 조항을 동성애에 대한 부추김으로 해석하는 단계를 우리 사회가 이제는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차별적 행동 및 혐오표현 사용을 금지하는 학생인권조례 제5조 3항에 대해 표현의 자유 침해 등을 이유로 헌법소원이 제기됐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를 기각했다. 차별·혐오표현 금지가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3조 논쟁’ 와중에도 고통받는 이들이 있다는 것도 지적됐다. 연대하는 교사잡것들 진냥 활동가는 “성소수자 혐오가 가져오는 괴롭힘과 폭력이 있기에 대응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발돋움이 필요하다
숱한 반박에도 불구하고 많은 구성원이 인권헌장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다. 작년 서울대학교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학추위) 주최로 진행한 인권열차 사업에서는 학내 892개의 서명과 외부 인권 유관단체 및 해당 단체 소속 94개의 서명을 받았다. 송지우 교수와 홍성욱 교수(생명과학부)는 서울대 교원 150여 명의 연명과 함께 인권헌장의 중요성을 논변하는 의견서를 본부에 제출하기도 했다.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 서울대 구성원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학생 사회에서는 추진력 있는 목소리가 나오지 못하고 있다. 2년 가까이 총학생회가 구성되지 못하는 가운데 단과대학생회장연석회의는 인권헌장과 관련해 진행되는 사업이 있냐는 <서울대저널>의 질의에 “현재 인권헌장 관련 진행사업이 없다”고 답했다. 학추위 측에서도 “(작년 말 이후) 평의원회 안건 상정이 계속해서 되지 못해 별다른 일을 하고 있지 못하다”고 답했다.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총학생회(원총) 역시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업을 진행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다만 원총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는 인권 침해의 대응책을 강구하면서, 올해 3월 「대학원생 성폭력,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보호를 위한 개선안 및 피해 조력자를 위한 행동지침 제안」을 발표했다.
인권헌장 제정의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본부의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이어지고 있다. 송지우 교수는 “서울대학교 본부에서 규범화 절차를 시작해야 한다”며 “헌장이 학내 규범 체계에 편입되기 위해 거처야 하는 일련의 절차가 있고, 이 과정에서 다시금 내용의 상세한 검토가 이루어지는데 인권헌장은 이런 절차조차 시작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2016년 이후 인권 가이드라인 제정을 위해 노력했던 김보미 전 총학생회장은 역시 “본부의 책임이 가장 크다”며 “조직적인 반대에 부딪히더라도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지 처리할 주체”라고 지적했다. 김 씨는 “논의가 필요하면 (논의를) 진행하든 설득을 하든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본부와 오세정 총장은 의견수렴을 위해 검토 중이라는 입장을 드러냈다. 오세정 총장은 “(제정을 위한) 의견수렴이 좀 더 필요하다고 판단돼 관련자들과의 대화를 계획하고 있으나 코로나 사태로 진행하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답했다. 오 총장은 “지금은 인권헌장에 관한 논의를 다시 촉발하기에 코로나 상황 등으로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고 판단된다”며, “인권헌장 필요성에 대한 서울대의 의지에는 변화가 없기에 학생처에 긴 호흡으로 검토를 지시”했다고 설명했다. 학생지원과는 장기적 관점에서 인권헌장 제정을 검토 중이라고 답했다. 검토의 구체적 방식에 대해서는, “인권헌장이야말로 학내 구성원의 의견 수렴이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돼, 이를 최대한 고려하면서 관련 규정에 의거 진행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인권헌장은 일련의 인권침해 사건이 발생하는 과정에서 여러 주체의 노력이 모여 축적돼 온 결과물이다. 인권헌장 제정이 더이상 ‘이렇다 할 진척이 없다’로 평가받지 않을 수 있도록 계속해서 주시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