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너머엔 현장이 있다

   여름의 한가운데서 이번 호를 시작했다. 세 기자는 학교를 돌며 청소노동자를 만났다. 학교 지도를 놓고 엉성하게 선을 그려 구역을 나눴고, 각자 맡은 구역의 모든 건물에 찾아갔다. 취재계획을 짜면서도 꽤나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지만 현장에 가면 문제가 보이리라 믿었다. 처음 가보는 건물을 헤매며 휴게실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주뼛대며 명함을 건네고, 당신의 노동엔 어떤 어려움이 있느냐고 물었다. 

   현장은 분명 문제를 품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현장을 처음 찾은 이에게 저절로 드러나지 않는다. 혹여나 자신이 말했다는 게 알려질까 몹시 조심스러운 모습 앞에서 사실 내가 쓰려는 한 편 기사를 위해 이들의 삶에 덜컥 들이닥쳤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휴게실 위치의 불편함을 토로하고 정년 연장을 희망사항으로 꼽는 당사자들의 언어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짬짬이 쉬어야 하는 청소라는 노동의 성격을, 몇 년이라도 더 일하고 싶은 그들의 처지를 알아야 했다. 한 문장을 쓸 때마다 이 문장이 가리키는 현실을 과연 나는 얼마나 잘 알고 있나 되묻는다.

   커버스토리 아이템을 정하는 자리에서 동료 기자들은 청소노동이란 주제를 다루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이미 말해진 숱한 이야기가 구하지 못한 삶이 있었고 한 번 더 말을 얹는 이러한 시도가 어떤 의미가 될지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바라건대, 마땅한 추모의 언어가 사그라든 자리에 무력감만 남아 있지 않게 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가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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