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는 지면 위에 도드라진 점을 손가락으로 만져서 읽는 문자다. 시각장애인의 일상생활은 점자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점자책은 시각장애인의 학습활동과 문화생활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자책 출판 현황은 밝지 않다. 한국장애인단체총연맹에 따르면 2020년 출판된 도서 중 점자도서 비율은 0.2%에 불과하다. 점자책 출판의 미진은 시각장애인의 학습결손과 학습 의지 저하 등의 문제를 초래하고 있다. 점자책 출판 과정의 어려움과 활성화 방안을 톺아봤다.
점자책의 수서에서 출판까지
점자책은 어떤 과정을 통해 만들어질까. 점자책은 일반 도서들과 달리 점자도서관이나 시각장애인 관련 복지관 산하의 복지센터에서 출판된다. 한국점자도서관 사업기획팀 윤소희 팀장은 “점자책 출판사로 명명된 일반 출판사는 도서출판 ‘점자’가 유일하다”라며 “전국 약 40여 개의 점자도서관이 점자책 출판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점자책 출판은 점자로 출간할 도서를 수서하는 과정에서 출발한다. 수서는 출간할 자료를 구매하거나 기증받아 입수해 검수하고 회계 처리하는 업무를 말한다. 수서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이뤄진다. 첫 번째는 시각장애인 당사자가 필요한 도서를 점자책 출판 기관에 의뢰하는 방식이다. 윤소희 팀장은 “한국점자도서관에서 펴내는 점자책 10권 중 1~2권은 당사자에게 신청받은 책”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점자책 출판 기관에서 도서를 선정하는 방식이다. 윤 팀장은 “시의성을 고려해 베스트셀러나 유행하는 자기계발서, 이슈가 되는 내용의 책들을 주로 수서한다”고 이야기했다.
이렇게 수서된 도서들은 점역(점자 번역)을 위해 텍스트 파일로 전환된다. 대부분 일반도서를 구입해 직접 타이핑을 하거나 도서를 스캔해 텍스트 파일로 자동 변환하는 과정(OCR 스캔)을 거친다. 직접 타이핑을 할 경우, 빠뜨린 내용이나 오탈자가 발생할 확률이 매우 높다. OCR 스캔 역시 정확도가 85~90%에 그쳐 특수문자나 엔터가 잘못 입력되는 일이 부지기수다.
따라서 타이핑이나 OCR로 입력된 텍스트 파일은 반드시 교열을 거친다. 교열은 일반적으로 3차까지 이뤄진다. 1, 2차 교열은 보통 전문적인 점역 교정사가 아닌 자원봉사자가 진행한다. 윤소희 팀장은 “점역에 대한 기초적인 내용이 담긴 교열 자료기집으로 교육하면 자원봉사자의 작업이 어렵지는 않다”고 설명했다.
다만 3차 교열부터는 점역을 전문으로 하는 점역 교정사의 역할이 필수적이다. 표, 그래프, 그림 등에 들어가는 대체텍스트는 점역 교정사가 작업해야만 한다. 구체적인 지침이 없기 때문이다. 대체텍스트는 시각장애인이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도록 묘사하거나 설명해주는 글이다. 윤 팀장은 “국립장애인도서관의 교과서 지침이나 데이지(독서장애인을 위한 전자책) 제작 지침에 예시들이 수록돼있지만 부족하다”며 “점역 교정사의 경험과 책에 대한 전문지식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이야기했다.
교열이 끝난 텍스트는 점역 소프트웨어를 통해 점역된다. 하지만 점역 소프트웨어로 점역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이 를 점역 소프트웨어에 그대로 입력하면 이후 미점역된 부분을 일일이 찾아야 해 오랜 시간이 걸린다. 점역 교정사는 미점역 기호로 점역이 불가능한 부분을 표시해 이 과정을 단축한다. 점역 소프트웨어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수행할 수 없는 작업이다.
이렇게 번역된 점자는 교정 과정을 거친다. 교정은 점자에 오탈자가 없는지, 그래프와 그림에 대체텍스트가 적절히 삽입됐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이다. 교정은 주로 시각장애인이 진행하며, 원본 텍스트와 점자를 비교할 때는 비시각장애인이 함께 한다. 시각장애인이 직접 원본을 확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교정이 끝나면 최종편집과 출력, 제본을 거쳐 점자책으로 출판된다.

한국점자도서관의 점자책 서고
점자책 출판의 장애물
전문가들은 점자책 출판에서 가장 어려운 절차가 교열이라고 입을 모은다. 사람이 직접 읽으며 오류를 일일이 찾아내는 작업인 만큼 오랜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자책 출판에 투입되는 인력은 턱없이 모자라다. 윤소희 팀장은 “점자도서관은 기존 업무도 수행해야 하기에 교열에 많은 인력을 투입할 수 없는 상황”이라며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점역 교정사의 수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2021년 6월 점자법이 시행되며 공공기관은 시각장애인이 요구하는 공문서를 모두 점자로 제작 및 보급하도록 규정됐다. 이에 따라 점역 교정사 수요가 증가하고 있으나 현재 국내에서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점역 교정사는 200여 명에 불과하다. 지난 6월 성동여성인력개발센터에서 미취업 여성을 대상으로 점역 교정사 및 점자출판인 양성과정을 실시하는 등 국가적 차원의 지원이 전개되고 있으나 수요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다.

출판사가 텍스트 파일을 제공한다면 텍스트 추출과 교열 과정을 생략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출판사는 불법 유통을 우려해 파일을 넘겨주지 않는다. 윤소희 팀장은 “국립장애인도서관에서 국가사업을 위해 출판사로부터 납본받는 텍스트 파일도 원본과 다른 부분이 많다”라고 설명했다. 출판사에서 최종 수정 이전의 파일만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최종 원본과 다른 파일을 수령하게 되면 또 다른 절차가 생겨나 오히려 출판을 지체시키는 셈이다.
표, 그래프, 그림 점역에 그래픽 점자가 도입되며 점자책 출판계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됐다. 그래픽 점자란 양각화를 통해 그래픽을 직접 만져볼 수 있게 하는 점자다. 도서출판 ‘점자’ 김동복 대표는 “표나 그림에 대체텍스트를 삽입하는 방법도 있지만 최근에는 그래픽 점자를 요구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픽 점자는 아직 자동화 기술이 개발되지 않아 제작에 시간이 많이 든다. 윤소희 팀장은 “일러스트레이터를 다룰 수 있는 점역 교정사가 부족해 그래픽 점자를 삽입하는 데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며 인력 부족을 호소했다.

청자 주전자를 양각화한 그래픽 점자
책 부족에 가로막힌 향학열
윤소희 팀장은 “작년 한 중학생이 도형 단원이 포함된 문제집의 그래픽 점자를 의뢰했는데, 만들어야 하는 도형이 100개가 넘었다”고 전했다. 이처럼 그래픽이 상대적으로 많이 포함된 학습서는 점역에 많은 인력과 시간이 요구돼 특히나 출판이 미진하다. 점자 학습서 부족은 시각장애인 학생들의 학습에 지장을 준다. 서울시각장애인연합회 김대근 사무처장은 “수능을 위한 EBS 교재가 제때 공급되지 못해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학습에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다른 학생들은 서점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는 교재를 시각장애인 학생들은 2~3개월이나 늦은 시점에야 받아볼 수 있다. 원하는 과목의 책을 모두 받아볼 수도 없다. 김동복 대표는 ”점자책 수능특강 신청이 1인당 5과목으로 제한되어 있어 수험생들끼리 돌려 보는 실정”이라고 밝혔다.
대학에서도 점자 학습서는 부족하다. 대학 전공서적은 표와 그래프의 교열·교정이 일반 학습서보다 더 까다롭다. 그래픽의 수도 많을 뿐더러 대체텍스트를 정확히 삽입하기 위해선 전공지식이 요구된다. 하지만 이를 수행할 수 있는 점역 교정사는 매우 적다. 작업이 된다 해도 역시 시간이 오래 걸린다. 김동복 대표는 “학기 초에 신청한 전공서적을 학기 말이 돼서야 받아볼 수 있다”고 이야기했다.
점자책 출판의 미진함은 시각장애인이 진로를 탐색할 때도 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 김대근 사무처장은 “행정직이나 임용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책을 읽어야 하는데 점자책이 충분히 마련돼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시험 하나를 준비하려면 매번 필요한 도서를 신청하고 오랜 시간 출판을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오디오 기술이 점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윤소희 팀장은 “중도 실명자를 비롯해 점자를 모르는 시각장애인들은 오디오 기술이 더 편리한 것은 맞다”면서도 “학습에 있어선 오디오 기술이 적절치 않다는 것이 지배적인 의견”이라고 설명했다. 점자 텍스트 없이 오디오만으로 학습하면 학습 효과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김대근 사무처장은 “점자책을 읽으면서 필요한 부분을 여러 차례 읽을 수 있지만 음성은 그럴 겨를을 주지 않는다”며 점자 번역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이런 측면에서 “국가고시가 점자 시험지가 아닌 음성 시험으로 치러지는 것이 시각장애인에게 불이익을 준다”고 비판했다. 음성으로 시험지가 제공될 경우, 시각장애인 응시자는 지문을 여러 번 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손끝으로 더 넓은 세상을 읽어내기 위해
전문가들은 점역 기술의 자동화를 위한 기술 개발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김동복 대표는 “표 점역과 그래픽 점자 기술의 발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표, 그래프, 그림 점역을 자동화한다면 점자책 출판 시간이 대폭 단축되리라는 의견이다. 윤소희 팀장은 AI를 통한 자동화 기술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윤 팀장은 “이와 같은 기술 개발을 위해선 다양한 케이스를 모으는 게 관건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제도적 개선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있다. 윤소희 팀장은 “점자책 출판이 확대되기 위해선 출판사의 텍스트 파일 제공이 절실하다”며 출판사의 협조를 촉구했다. 저작권법 33조는 ‘공표된 저작물은 시각장애인 등을 위하여 점자로 복제·배포할 수 있다’고 이미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강제성이 없어 법률이 실질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를 보완해 지난 6월 시각장애인의 점자사용 권리 신장과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점자법이 시행됐다. 점자법 제12조에 의하면 각급 학교는 시각장애인 학생 및 교원이 사용하는 교과용 도서를 점자로 제작·보급해야 한다. 공공기관은 시각장애인이 원하는 경우 일반 활자 문서를 동일한 내용의 점자로 제공해야 한다.
한편 김동복 대표는 점자법이 저작권법 33조처럼 실효성이 없어질 가능성을 우려했다. 점자법 시행에도 불구하고 많은 공공기관은 비용과 시간 절약을 이유로 점자보다 음성 서비스를 제공하려 한다. 비대면으로 실시간 공유되는 자료에 대해서는 텍스트 파일조차 제공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김 대표는 “법적 명문화는 좋으나 실행 과정에서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무엇보다 우선인 것은 시각장애인을 배려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다. 김동복 대표는 어릴 적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한 경험을 통해 시각장애인과 함께하기 위한 철학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시각장애인이라는 용어도 없을 당시, 친구들은 저시력자인 김 대표를 배려해 바닥과 대비가 뚜렷한 흑구슬과 백구슬을 사용했다.
시각장애인과의 공존은 말이 아닌 행동에서 출발한다. 제도의 개선과 명문화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따라야만 실효성이 갖춰진다. 공존과 통합의 의지가 동반될 때 점자법은 점자책 출판 확대로 이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