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냐고, 혹은 미워하냐고 묻는 일은 쉽지 않다. ‘당연히’ 사랑해야 할 것만 같은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라면 더더욱 그렇다. 묻는 것만으로도 관계에 금을 내거나 혹은 금이 났음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가족을 다루는 영화의 서사구조는 대개 따뜻하고 편안하다. 갈라섰던 가족이 끝내 화합하는 클리셰를 따르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가족 영화의 안온한 유리창에 돌을 던진 두 영화가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에올》)와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두 여자》)다.
두 영화는 관습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모녀 관계를 풀어간다. 두 영화의 모녀는 나를 사랑하냐고, 혹은 미워하냐고 묻기를 피하지 않는다. 피를 내고 머리를 잡아 뜯으며 싸워댄다. 매체 속에서 전형화, 평면화되던 모녀 관계의 밑바닥을 들춰낸다.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의구심이 낳는 파동과 일렁임은 스크린 밖까지 전해진다.
모녀의 혈투

《에에올》은 서로에게 소원한 모녀의 이야기다. 주인공 에블린은 남편 웨이먼드와 미국에서 바지런히 세탁소를 운영해온 중국계 중년 여성이다. 그녀는 바쁘다. 국세청 감사에 정신없는 와중에 엄격하고 보수적인 아버지의 생신 축하연도 준비해야 한다. 그런데 외동딸 조이는 할아버지에게 동성 애인을 소개하겠다고 자꾸 고집 피우고, 그녀는 그런 딸이 마냥 철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던 어느 날 에블린은 다중우주와 그 우주를 파괴하려는 악당 ‘조부 투파키’의 존재를 알게 된다. 그녀는 자신의 딸 조이와 똑같이 생긴 다른 우주의 조이가 세계를 위협하는 악당 조부 투파키란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에블린은 복잡한 가정사를 해결하면서도 세계를 구하기 위해 악당에게 맞선다.
엄마에게 서운한 딸과 그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의 갈등 구도는 흔하다. 그러나 그 갈등이 우주를 파괴할 규모로 표현되는 일은 흔치 않다. 《에에올》에서 모녀는 온 우주의 자신과 수하를 동원해 싸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둘은 문자 그대로 ‘치고받고’ 싸운다. 몸담은 세계가 터질 정도로.

자신의 자동차로 이정을 치는 수경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공식 스틸컷
《두 여자》 역시 사이가 좋지 않은 모녀의 이야기다. 엄마 수경과 딸 이정은 속옷을 공유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게 다르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경은 딸 이정이 매사에 느리고 둔해 답답하다 생각하고, 이정은 엄마가 다혈질이고 무관심하다고 생각한다. 작은 가게를 운영하는 수경은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외향적이고 젊게 산다는 칭찬을 듣는다. 반면 이정은 스스로 친구도 없고, 모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이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수경은 어서 이정을 내버리고 자신의 남자친구 종열과 살림을 합쳐 둘이서만 오순도순 살아가고 싶다.
여느 때나 다름없이 다툰 날, 수경의 자동차가 이정을 친다. 수경은 차가 급발진했다며 자동차 회사에 소송을 걸지만, 이정은 엄마가 자신을 죽이려고 일부러 그랬다고 믿어 자동차 회사 측의 증인으로 선다. 도무지 딸을 이해할 수 없는 수경과 드디어 엄마에 맞서기 시작한 이정. 둘은 한 지붕 아래 사는 게 꼭 당연한 것만은 아니었음을 깨닫는다.
둘의 역사가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짐작하기도 어렵다. 수경은 이정을 키우기 위해 일에 매진했다. 그러나 딸의 졸업식 날에는 자기 약속을 가기 바빴고, 화가 날 때마다 딸을 때렸으며, 죽여버리겠단 말도 습관처럼 뱉었다. 이정은 자동차 사고를 계기로 엄마를 마음껏 싫어하려 하면서도 관성적으로 애정을 갈구한다. 수경과 이정 앞에서는 ‘모녀’도 ‘두 여자’를 지칭하는 단어일 뿐이다.
사랑의 부재는 의심하면 할수록 걷잡을 수 없을 만큼 크게 느껴진다. 두 모녀들은 나를 사랑하긴 하냐는 물음 아래서 난투를 벌인다. 싸움의 여파는 파괴적이다. 조이는 엄마에게 품은 공허와 원망을 모든 것을 없애버릴 힘으로 표출하고, 이정은 스스로를 갉아 먹으며 억지로 참아내려 한다.
차라리 서로에게 무심한 채로 지냈다면 어땠을까. 둘 사이에 사랑이 있는지 없는지의 문제를 덮어두었더라면 조금 서먹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에 그쳤을 테다. 허나 에블린과 조이, 수경과 이정은 떨쳐낼 수 없는 인력이라도 있던 양 충돌한다. 아무 문제없는 듯 살아가더라도 언젠가 터질 일은 아니었을까. 모녀의 싸움은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엄마는 억울하고

왼쪽부터 조이, 웨이먼드, 에블린, 에블린의 아버지다. 국세청 감사를 받고 있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공식 스틸컷
에블린과 수경이 공통으로 하는 말이 있다. 모든 엄마가 해봤을 법한 말이기도 하다. “너는 애가 도대체 왜 그러니?”
에블린과 수경은 넉넉지 않은 살림을 유지하기에 바빠 자식의 목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줄 여유가 없다. 에블린은 미덥잖은 남편을 두고 가장으로서 세탁소를 꾸려온 중국계 이민자다. 수경은 홀로 이정을 키우면서 쑥뜸과 쑥 좌훈을 하는 가게를 운영해 왔다. 두 딸이 불만을 표할 때면 마음이 답답하기만 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라는 억울 섞인 말이 절로 나온다.
숨 돌릴 틈 없이 살아온 두 엄마는 포기해온 게 많다. 에블린은 연기, 요리, 무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선 다중우주의 자신들을 보며 박탈감을 느낀다. 남편 웨이먼드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오지 않았더라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돈다. 한편 수경은 자유를 꿈꾼다. 술에 취한 수경은 이정에게 “내 젊은 시절이 너를 키우느라 다 갔다”고 말한다. 남자친구 종열에겐 “이제 예쁘고 자유롭게 살고 싶다”고 말한다.
치열한 삶의 고단함은 늘 두 엄마의 마음에 얹혀 있던 듯하다. 에블린은 남편과 가족을 원망하기도 하고, 자신의 삶이 최악이라는 생각에 조부 투파키의 말을 따라 완전한 공허로 빠져들 뻔한다. 수경은 가게에서 손님들이 쑥뜸을 들이며 흘린 땀과 뱉는 욕은 죄다 자신의 몫이었다고 이정에게 토로한다. 그렇게 쌓여온 스트레스가 가끔 너를 향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받아주기 힘드냐며 자신의 무관심과 폭력을 변호한다.
두 엄마의 억울함은 비슷하지만 딸을 대하는 태도는 다르다. 에블린은 헌신적이고 강인한, 전형적인 동양의 어머니상을 보여준다. 그녀가 다중우주의 싸움에 끼어들게 된 것은 비록 다른 우주의 딸일지라도, ‘조부 투파키’를 없애 악의 영향력을 줄이자는 다중우주 사람들의 의견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에블린은 다른 우주의 조이들이 스스로를 무가치하고 사라져야 할 존재라 이야기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 없어 싸움을 이어간다. 어떤 우주의 조이든 간에 딸의 얼굴을 한 모든 존재를 보듬으려 했다.
수경은 ‘엄마’가 되길 거부한다. 그녀에게 딸은 일종의 ‘감정 쓰레기통’이다. 자신을 감정 쓰레기통으로 여기는 수경에게 이정이 자신은 어디에 화를 푸냐고 묻자, 수경은 이정에게 “너도 딸 낳아”라고 무심하게 말한다. 수경은 엄마나 가족이란 이름에 갇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남자친구 종열의 딸 소라와 인사하는 자리에서도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껄끄러워 한다. 소라의 친구가 인사해오자 “나 얘 엄마 아니야”라 말하며 선을 긋는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여자로서의 자유다.
딸은 억눌렸다

앞서 걷는 수경을 바라보는 이정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공식 스틸컷
바쁜 엄마의 무관심 속에서 조이와 이정은 미성숙한 성인으로 자랐다. 여전히 두 딸은 좋아하는 아이에게 장난이라도 치듯 툭툭 주변을 건들며 엄마의 관심을 요구하며 주변을 맴돈다. 엄마의 눈으로는 철없고 고집만 부리는 듯 보이지만, 딸 나름의 호소였다.
조이는 사춘기 소녀 같다. 부모와 다투고 방문을 쾅 걸어 잠그면서도 부모가 먼저 문을 두드려오기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영화의 엔딩에서 조이는 다 끝났으니 집을 떠나겠다며 자신의 차 문을 열어 놓고도 미적댄다. 조부 투파키는 유치한 말투를 사용하고 어린아이 같은 옷을 입는다. 산만하게 구는 모습까지 어리광을 부리는 아이처럼 보인다.
이정은 유아기적인 면모를 보인다. 그녀는 엄마를 잃어버린 5살 아이처럼 마트를 쏘다니고, 이리저리 고개를 휘두르며 수경을 찾는다. 유일하게 자신을 이해해준다고 느낀 직장 동료 소희에게 과한 애착을 보이기도 한다. 술에 취해 거의 눈을 감은 채로 웅얼웅얼 자신의 가족사를 털어놓는 모습은 꼭 아이가 잠꼬대하는 듯하다.
둘의 마음은 엄마의 작은 관심에도 일렁이지만, 동시에 체념에 젖어 있다. 조이는 엄마와의 대화를 위해 주변을 얼쩡거리고, 엄마가 자신의 동성 애인을 할아버지에 선뜻 소개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어김없이 자신에게 무관심한 엄마를 볼 때면 작게 한숨을 쉬고 돌아선다. 조부 투파키는 악당이 된 이후에도 결국 에블린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엄마에 대한 체념은 일말의 희망도 없이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없애겠다는 극단적인 허무주의로 이어졌다.
이정이 수경에게 바라는 건 오직 사랑뿐이다. 그녀는 수경에게 그간의 무정에 대해 한 번만이라도 사과해달라며 엉엉 울었다. 첫 생리를 했던 날 쓰는 법도 알려주지 않고 생리대를 건네고 마는 엄마를 보면서도 그 작은 관심 하나에 안도가 되어 좋았다고 했다. 성인이 된 지금도 가끔 수경이 먼저 말을 걸거나 부탁을 해오면 내심 기뻐하지만, 그 목적이 재판이나 재혼임을 알고 나면 입꼬리를 다시 내린다. 엄마의 무정함으로부터 이정은 자기가 모자라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 느낀다. 그녀는 수경이 언제든 말버릇을 따라 자신을 정말 죽여버릴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그 둘의 봉합법
두 모녀의 충돌은 어떻게 봉합될지 예상하기 어렵다. 두 딸이 바라는 건 엄마의 ‘당연한 사랑’이지만 이미 엉켜버린 관계를 풀 만큼의 사랑이 그리 쉽게 충족될 리 없다. 완전히 엉킨 실타래를 온전히 풀어낼 방법이 있을까. 두 영화는 다른 방식으로 매듭을 푼다.
《에에올》는 실타래를 풀지 않고 일단 품기로 했다. 혼돈의 난투 속에서 고요가 찾아온 순간은 에블린과 조이가 돌멩이로 존재하는 우주로 갔을 때였다. 둘은 단단한 알맹이인 돌이 돼서야 처음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눈다. 바위는 돌이, 돌은 자갈이, 자갈은 모래가 된다. 그 풍화의 과정을 거치면 안에 맺혀있던 무언가도 같이 사라지고 희미해진다. 함께 바람과 물에 깎여가는 과정이 엄마와 딸의 맞닿지 못할 듯 단절된 사랑을 연결해준다.
결말에서 모든 일이 끝나고 떠나겠다는 조이 앞에서 에블린은 아무렇지 않게 “너 살쪘다”는 말을 던진다. 둘은 껴안는다. 엉킨 실타래도 돌처럼 굳어 언젠가 닳아 없어질 때까지 함께 하기로, 굴러떨어지는 조이를 따라 함께 굴러떨어졌던 것처럼 그저 함께 있기로 한 것이다.
《두 여자》는 품을 수도 없을 만큼 커진 실타래를 알렉산더 왕처럼 반으로 툭 자르기로 했다. 집에 정전이 나자 목욕하던 수경이 이정을 부른다. 이정은 휴대전화 플래시로 알몸의 엄마를 비춘다. 수경은 그 빛에 의존한 채로 욕실에서 나와 딸과 함께 입는 속옷을 꺼내 든다. 잠깐의 찰나 같은 속옷을 입은 두 여자는 어둠 속에서 서로에게 불빛을 비춘다.
전기가 나간 집에서 수경은 냉동고 속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꺼내 이정에게 건넨다. 이정은 이게 있는지도 몰랐다고 읊조린다. 둘의 사랑은 오래간 방치됐다가 정전 때문에야 겨우 존재를 알리는 아이스크림 같다. “엄마, 나 사랑해?”라는 이정의 물음에 수경은 곧장 호탕하게 웃다가 뭐라 답하지 못하고 웃음을 멈춘다. 지난한 사랑싸움에 방전된 모녀는 비로소 종전을 마주한다.
이정은 가출하는 대신 출가한다. 유치하게 생긴 어린이용 가방만 남긴 채 떠난 이정은 처음으로 수경과 같이 입지 않을 속옷을 산다. 수경은 이정이 떠난 빈방을 보고 거실로 나와 화를 다스리려 배우기 시작했던 리코더를 불어본다. 중간중간 음이 나가고 틀리지만 꿋꿋이 연주한다. 둘은 각자 살아갈 것이다. 반으로 갈린 실타래를 하나씩 손에 쥐고.

에블린과 조이가 돌인 다중우주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공식 스틸컷
다시 갇혀 있던 모든 관계를 생각한다. 우리는 어쩌면 관계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 무조건적 사랑을 맹신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믿음 아래서 관계의 진실함은 묻지 못할 것이 된다. 우린 그렇게 차마 속마음을 꺼내지 못한 채 서로를 거리를 두고 맴돌며 살아가길 택하기도 한다.
두 쌍의 모녀는 담담하게 관계의 밑바닥을 바라봤다. 안온한 껍데기 안에 있던 엉킨 마음을 헤집어 꺼냈다. 피를 내는 난투를 벌인 후에 그 마음을 보살필지 도려낼지 택했다. 그러니 맴돌기보단 차라리 부딪히자. 함께 같은 궤도로 돌아가든 다른 궤도로 흩어지든 상관없다. 비록 서로가 중심은 아닐지라도 어떤 존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 주위를 맴도는 행성으로 존재할 수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