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흘렀지만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이태원 참사를 접한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참사의 충격은 분명 모두에게 전달됐다. 우리는 이태원 참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서로 다른 시선을 가진 세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이태원 참사가 남긴 파장을 살펴봤다.
*각 사례는 인터뷰이들의 경험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일상에 균열이 생긴 날
삼각지역 근방에 거주 중인 대학생 정윤주 씨는 평소 이태원을 자주 찾았다. 집에서 가깝고, 다른 지역에선 보기 힘든 이국적인 분위기의 상점과 식당이 많기 때문이다. 윤주 씨는 이태원을 찾을 때마다 성별과 인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인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윤주 씨에게 이태원은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듣고 싶은 노래를 들을 수 있는 편안한 공간이었다.
10월 29일 13시경, 윤주 씨는 친구에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약속 장소는 이태원역에서 도보로 약 15분 거리에 있는 태국 음식 전문점으로 정해졌다. 두 사람이 평소 자주 가던 식당이었다.
지하철에 오른 윤주 씨는 그날따라 유독 사람이 많다고 생각했다. 사람들 틈에서 SNS를 확인하던 윤주 씨는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다. 어쩐지 보기 드문 의상에 진한 화장을 한 사람들이 평소보다 많이 보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친구를 만난 윤주 씨는 “약속 장소를 잘못 정했다”고 후회할 만큼 많은 인파를 경험했다. 핼러윈 축제를 즐기기 위해 예쁘게 화장을 하고 복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많았지만, 복잡한 거리에서 다들 즐겁다기보단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윤주 씨와 친구는 인파를 피하려 경찰차가 드문드문 서 있는 길을 따라 이태원 외곽 카페로 향했다. 휴대전화를 확인하자, 또 다른 친구에게 자신도 이태원에 있다는 메시지가 와있었다. 윤주 씨는 ‘사람이 너무 많으니 오늘은 못 보겠다, 조심히 들어가’라고 답장을 보냈다. 사람이 너무 많았고,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카페 안까지 들어와 이야기를 나누기도 어렵고 피곤해 두 사람은 예정보다 일찍 귀가하기로 했다.
역으로 가는 길, 경찰차와 구급차 소리가 들렸지만 윤주 씨는 그저 싸우거나 취해서 쓰러진 사람들이 있으려니 짐작할 뿐이었다. 평소에도 사람이 많으면 시비가 붙거나 다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그 이상의 큰일이 났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역에 가까워지자 다시 인파가 심해졌고, 윤주 씨와 친구는 주위를 둘러볼 여유도 없이 사람들 틈에 딱 붙은 채 지하철을 탔다.
간신히 올라탄 지하철은 역시나 꽉 차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도 힘들어 SNS나 뉴스를 확인하지도, 옆 사람들의 대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이태원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윤주 씨는 멍하니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뉴스를 본 윤주 씨는 무심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무사히 집에 돌아온 것도, 참담한 사고 현장을 직접 보지 못한 것도 운이 좋았단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자신이 이기적이라고 느껴졌다. 사고를 일으킨 것도,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아니기에 죄책감이나 책임감을 느낄 의무는 없었음에도.
윤주 씨는 이번 참사에 대한 각종 뉴스나 담론을 최대한 피하는 중이다. 그는 뉴스를 볼 때마다 “나 역시 조금만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큰 사고를 당할 수 있었고, 내가 일상적으로 하는 행동, 가는 장소가 모두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무척 불안하고 두려워진다”고 말했다. 윤주 씨는 여전히 참사의 후유증을 겪고 있다.

낯설고도 익숙한, 아프면서도 무던한
늦은 밤, 집에 있던 성민 씨(가명)는 남자친구로부터 뉴스를 전달받았다. 이태원에서 30여 명이 심정지 상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성민 씨는 곧장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를 확인했다. SNS에는 아무런 여과 없이 사고 현장을 담은 영상들이 난무했다. 영상 속 거리에서 울려퍼지는 음악 역시 다르게 들렸다. 평소라면 모두 즐겁게 춤을 췄을 음악의 비트가 심폐소생술을 위한 메트로놈처럼 느껴졌다. 익숙하다고 여겼던 존재들의 낯설고 참담한 모습에 충격을 받은 성민 씨는 곧장 참사 영상을 껐다.
마약, 가스 누출, 폭행 등 SNS에서는 참사의 원인에 대해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 성민 씨는 “나 역시 이태원에서 단지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그렇게 큰 사고가 일어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며 “압사 사고라는 게 너무 생소하다 보니 모두 마약이든 폭행이든 특정한 원인을 찾고 싶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새벽까지 SNS와 뉴스를 확인하다 잠든 성민 씨는 눈을 뜨자마자 다시 뉴스를 확인했다. 성민 씨는 급격히 늘어난 사망자 수에 불안해져 우선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친구들에게도 안부를 물었다. 성민 씨의 주변에는 다친 사람이 없었고, 일상은 아무 일도 없던 듯 다시 시작됐다.
하지만 성민 씨의 마음은 공허했다. 희생자들은 자신과 나이, 관심사, 거주지가 너무 비슷한 사람들이었다. 10월 31일 월요일, 성민 씨는 강의실에서 교수님, 학우들과 참사에 대해 공적인 대화를 나눌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각자 아무 말 없이 자리에 앉아, 시험지를 받고, 답안을 적은 뒤, 흩어질 뿐이었다. 결국 강의실엔 아무런 이야기도 남지 않았다.
인터넷에선 참사에 대해 많은 말이 오갔다. SNS나 커뮤니티에 종종 올라오는 ‘놀다가 죽었다’, ‘위험하다고 느껴졌으면 피했어야 했다’는 식의 이야기를 보면 화가 났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재난을 반복적으로 겪었고, 많은 담론을 접해왔다. 지친 걸지도, 어쩌면 혼란스러운 걸지도 몰랐다. 참사를 바라보는 모든 시선이 공유되면 참사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합의하는 데도 과연 도움이 될까.

11월 3일 목요일 아침 8시 30분, 성민 씨는 등교를 위해 강남역에서 사람이 꽉 찬 지하철을 탔다. 바로 지난주에 대형 압사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출근 시간 지하철엔 여전히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이 많았다. 질서 통제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람들 틈에 겨우 선 성민 씨는 휴대전화로 뉴스를 확인하고 가슴이 더 답답해졌다. 성민 씨가 보고 싶었던 모습은 유가족에 대한 지원금 지급이나 실무자의 사퇴만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재난을 철저히 예방할 시스템을 논의하는 모습이었다. 이대로라면 대규모 축제나 출퇴근길 지하철 등 언제 어디서 당장 압사 사고가 또 발생해도 이상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통제할 수 없는 무력감
두현 씨(가명)는 1년째 경호원으로 근무 중이다. 과거 의무경찰로 복무한 경험과 체격이 좋단 점을 살려 경호회사에 취직했다. 각종 공연 및 행사가 원활히 진행되도록 현장의 안전을 살피고 인원을 통제해 사고를 예방하는 것이 두현 씨의 일이다.
인파 통제 업무는 딜레마에 빠지기 쉬운 일이다. 행사장에 사람이 너무 많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목소리를 크게 내고 대열에서 벗어나는 사람에겐 엄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단순히 불편하고 기분 나쁘다는 이유로 경호원에게 욕설을 뱉는 사람을 많이 만날 수 있다.
두현 씨는 선배와 회사에 조언을 구했으나 되돌아온 답은 ‘좋은 게 좋은 것’이었다. 선배는 행사 진행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사람이 붐벼도 적당히 무시하라고 조언해줬다. 회사는 행사가 절차대로 진행되고, 경호 대상만 무사하면 괜찮다며 그저 “잘하고 있다”고만 말했다. 아무 사고도 없이 근무를 마친 날 “참 잘했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저 “참 편했다”라고들 말했다. 무사고만이 이어지면 행사장에 모인 군중도 통제자도 점차 긴장을 잃어갔다.

두현 씨는 이태원 참사를 보며 ‘내가 저 자리에 있었다면 사고를 막을 수 있었을까?’란 질문을 던졌다. 군중도, 군중을 통제하는 실무자들도 안전을 1순위로 생각하지 않는 일상을 피부로 겪어왔다. 두현 씨는 “이태원 참사에서 중요한 건 경찰의 수보다, 군중과 통제자가 모두 ‘현 상황이 위험하다’는 하나의 생각에 공감하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일터에는 안전사고에 대해 경각심을 느끼는 사람들이 늘었다. 통제를 벗어나는 사람에게 큰 소리로 주의를 줘도, 위험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강경히 진정시켜도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줄었다. 회사에서도 더 강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라는 매뉴얼이 내려왔고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도 늘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가 얼마나 이어질지는 의문이 들었다. 다소 삼엄해진 회사의 분위기가 참사가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 사고가 나면 쏟아질 비난과 처벌을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채용 인원을 늘리거나 안전 교육을 강화하는 등 장기적인 대응은 없었다. 예전처럼 인원 통제에 대해 불만을 표하는 사람들도 다시금 하나둘씩 늘고 있었다. 참사가 일어나고 한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도, 다들 참사를 조금씩 잊어가는 것 같았다.
두현 씨는 무력감을 느낀다. 큰 사고는 잊을 만하면 일어나고, 수많은 논쟁이 오고 가는데도 왜 시간이 지나고 보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 걸까. 두현 씨는 “큰 사명감 같은 건 없지만, 한 사람이라도 다치지 않고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늘 고민하고 애를 써도 ‘나만 유난인가’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고 말한다.

참사를 돌아보는 시선은 저마다 다르다. 참사는 누군가에겐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일로, 누군가에겐 자책하는 일로 남았다. 하지만 참사 이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은 같았다. 모두가 안전한 사회를 바랐다.
격렬하고 뜨겁지는 않더라도, 지치지 않고 따뜻한 시선으로. <서울대저널>은 인내심 있게 참사를 바라보는 작업에 동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