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헌장은 왜 아직도

인권헌장 논의, 무엇이 문제인가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안)이 발표된 것은 2020년이다. 3년이 지난 지금, 인권헌장은 여전히 ‘안’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 3년 동안 인권헌장을 제정하라는 다양한 목소리가 있어왔고, 2022년 말 다양성위원회의 「서울대 인권헌장에 대한 미래세대 인식조사」(인권헌장 인식조사)와 오세정 전 총장의 담화문 발표로 인권헌장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하지만 인권헌장 제정의 진척도는 아직도 그대로다. 인권헌장은 왜 아직도 제정되지 않고 있는 걸까?

‘논란’이 된 인권헌장

많은 이들이 인권헌장에 반대하는 학내 세력의 존재를 인권헌장 제정 지연의 이유로 꼽았다. 조재현 총학생회장(자유전공 20)은 “2020년 한창 논의가 됐던 시기에 (인권헌장 제정이) 좌절됐던 가장 큰 이유는 극심하게 반대하는 일부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2020년 인권헌장(안) 발표 이후, 기독교 극우 성향의 외부 단체 ‘트루스포럼’은 ‘진정한 인권을 위한 서울대인 연대’(진인서)를 조직해 학내에 대자보를 게시했다. 온라인으로 ‘서울대학교 인권헌장·대학원생 인권지침 제정(안)에 관한 공청회’가 진행되자 동성애 혐오를 포함한 댓글이 다수 올라오기도 했다.

본부가 이들의 주장에 부담을 느끼고 인권헌장 제정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었다. 이도연 대학원총학생회장(보건대학원 박사과정)은 “(인권헌장에 대한) 입장들이 명확하게 갈리는데, (본부가) 부담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며 본부가 인권헌장을 제정하지 않은 것이 “정치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실제 본부는 인권헌장에 대해 ‘구성원 간의 의견 차이’를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다. 김지은 전 총학생회장(조선해양공학 18)은 “본부 측이 (인권헌장에 대한 찬반 논쟁이) 과열되는 것 자체를 신경쓰는 것 같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작년 12월 발표된 「인권헌장 인식조사」 결과는 서울대학교 학생의 대다수가 인권헌장 제정에 찬성한다는 것을 드러냈다. 다양성위원회에서 실시한 해당 조사에서, 인권헌장의 주요 조항에 대한 찬성률이 모두 95%를 넘긴 것이다. 이에 지금껏 반대 세력의 주장이 과대 대표되어 온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비정규직 없는 서울대 만들기 공동행동’의 이은세 학생대표(동양사 20)는 이를 비판하며 “합의의 부족을 이야기했던 대학 본부의 판단이 오히려 학내 구성원들의 생각을 왜곡했다”고 말했다. 김지은 전 총학생회장 또한 “이 정도로 찬성이 많이 나오는 학내 사안들이 많지 않다”며 “(반대 측) 의견이 유의미하게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인권헌장을 반대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문제는 인권헌장에 대한 반대 의견이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를 근거로 삼을 때가 많다는 데 있다. 2020년 인권헌장(안)이 처음으로 공개된 이후, 인권헌장 제정을 반대하는 의견은 트루스포럼에서 조직한 진인서를 중심으로 제기돼 왔다. 이들은 제3조(차별금지 및 평등권)에서 “성적 지향 및 성별 정체성”을 차별금지사유로 명시한 것을 주로 지적하고 있다. 진인서는 2020년 대자보에서 인권헌장이 “전통적인 남녀와 가족개념의 해체를 초래하는 무모한 실험”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2022년 「인권헌장 인식조사」 결과 발표 직후 게시한 대자보에서도 인권헌장이 제정되면 “부도덕한 성행위에 대한 부정적인 의사표시”가 차별로 규정된다는 점을 반대 이유로 들었다. 표면적으로는 인권헌장이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주장을 내세우지만, 사실상 동성애 혐오를 차별로 규정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인 셈이다.

혐오를 정당화하기 위해 사실과 다른 근거를 들기도 한다. 「인권헌장 인식조사」의 문항이 편향됐다는 주장이 그 사례다. 해당 조사의 책임자였던 고길곤 교수(행정대학원)는 조사 문항이 편향됐다는 비판이 사실과 다르다며 특정 조항에 대한 응답, 응답자 분포 등을 고려할 때 “결과가 왜곡됐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인권헌장 인식조사」에서는 제3조에 대한 찬반을 묻는 문항도 포함됐지만, 제3조에 대한 찬성률 역시 다른 조항과 비슷한 수준으로 높았다.

▲「서울대학교 인권헌장에 대한 미래세대 인식조사」 책임자 고길곤 교수

혐오가 왜 문제인가

인권헌장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지만,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 발언까지 바람직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떤 대상에 대한 혐오가 제한받지 않는다면, 당사자들은 대학을 안전한 공동체로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인권규범 제정에 관한 연구」(인권헌장(안) 연구) 책임자였던 송지우 교수(정치외교학부)는 비차별 원칙의 보호를 받아야 하는 당사자들이 “본인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식의 발언을 경험해야 하는 일들이 이어져 온 것”이라며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당한 제한 사유 중 하나가 바로 공동체 구성원에 대한 위협”이라고 설명했다.

실제 2022년 진인서가 대자보를 게시한 이후 인권헌장 제정을 찬성하는 대자보를 게시했던 몸짓패 ‘골패’의 남지원(사회 20) 씨는 “(혐오가 포함된) 자보가 공공연하게 붙어 있고 그것에 대해서 아무도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면 상처받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걱정했다”며 대자보를 게시하게 된 배경을 설명했다. 혐오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는 것이다. ‘권력형 성폭력·인권침해 문제해결을 위한 서울대인 공동행동’(권서공)의 최다빈 집행위원장(사회 19) 또한 “(혐오에 대한 문제 제기가 없으면) ‘학교에서 공개적으로 혐오 발언을 해도 되는구나’라는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라고 말했다. 인권센터 이주영 연구교수는 “(혐오 발언이) 그것 자체로 문제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편견이나 차별적 태도를 갖도록 부추기는 효과가 있다”며 혐오 발언이 공동체 전체에 미치는 악영향을 설명했다.

역설적으로 인권헌장은 이런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인권센터 강효원 연구원은 인권헌장이 “지향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권헌장이 공동체가 지향하는 가치에 대한 합의를 선언하는 효과도 갖는다는 것이다. ‘인권헌장 학생추진위원회’(학추위) 권소원 위원장(경제 19)은 구성원의 권리에 대한 약속을 만드는 것이 “안전한 공간을 만들어가는 첫 시작”이라며 인권헌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진인서의 인권헌장 반대 대자보 게시 이후 골패에서 게시한 대자보

본부의 노력

본부의 의지에서 원인을 찾는 이들도 있었다. 결국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서는 본부의 역할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권서공 최다빈 집행위원장은 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본부의 역할에 대해 “왜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인권헌장을 평의원회에 상정하지도 못하는가에 대해 아쉬움이 남는다”고 평가했다. 학추위 권소원 위원장 또한 “코로나19로 서명을 모으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 1천 명 가량의 서명을 조직해 본부에 갔음에도 불구하고 평의원회에 안건 상정이 되지 않았다”며 본부가 적극적으로 제정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본부의 입장은 어떨까. 김영오 전 학생처장은 인권헌장 제정에 대해 본부도 분명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밝혔다. 김 전 학생처장은 특히 “본부 내에서는 우리 사회 인권과 다양성 논의를 서울대가 선도한다는 책임과 의무에 대한 인식이 컸으며, 오세정 전 총장이 학생처에 인권헌장 제정을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 당부한 바 있다”고 밝혔다. 다만 “논의가 학내에서만 이뤄지지 못하고 외부 세력도 개입해 학교 밖의 여러 정치 상황과 섞여버리는 왜곡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대학 내 갈등과 분열이 과잉되는 상황 자체에 대한 부담이 확실히 존재했던 점”을 제정을 더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못한 원인으로 꼽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본부가 반대 측의 혐오를 방관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도 나온다. 학추위 권소원 위원장은 “공청회 당시의 혐오 표현에 대해 본부가 ‘논란’이라는 표현을 사용해 외부 세력의 혐오 발언을 타당한 여론의 일부라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보였으며, 학내외 혐오세력에 대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써 구성원을 보호해야하는 학교 본부의 기본적인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학추위 권소원 위원장

이제는 제정할 때

많은 이들은 더 이상 인권헌장을 미뤄선 안 된다고 말한다. 권소원 위원장은 “공동체에서 혐오와 폭력을 용인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를 거쳐가는 사람들의 삶을 폭력에 노출시키는 것과도 동일한 행위”라며 서울대가 안전한 공간이 되기 위한 인권헌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고길곤 교수는 “논의가 부족해서 인권 헌장을 늦출 단계는 아닌 것 같다”며 “인권헌장을 도입한 다음에 이것을 어떻게 개선할지 논의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우선 인권헌장을 제정해야 실질적인 인권 보장을 위한 인권헌장의 발전 방향을 의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에 있어서는 대학이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점도 강조됐다. 권소원 위원장은 “혐오가 만연한 사회에서 모두의 합의를 기다린다는 것은 그 혐오에 공동체 구성원들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주영 연구교수 또한 “너무나 당연한, 보편적인 원칙인 비차별·평등에 대해 (합의가 없다는 이유로)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라며 인권헌장 제정에 있어 본부가 선도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고길곤 교수는 “인권은 누가 주는 게 아니다”라며 학생들의 관심을 촉구하기도 했다. 인권헌장의 당사자인 학생들이 스스로 인권헌장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제정을 위해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2022년 「인권헌장 인식조사」 결과 인권헌장에 대한 찬성률은 높게 나타났지만, 인권헌장에 대한 관심도는 낮았다. 특히 대학원생에 비해 학부생의 관심도가 낮게 나타났다. 고 교수는 “학생들이 인권에 대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 보호해 주겠다고 하는 것은 인권헌장의 지속성의 차원에서 어렵다”며 학생 차원에서의 노력을 주문했다.

“왜 아직도 안 되고 있지?”

인권헌장에 대해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송지우 교수가 답한 문장이다. 「인권헌장(안) 연구」로부터 3년, 인권헌장은 공청회 등 여러 차례 의견 수렴 절차를 거쳤고, 지난 해에는 인식조사도 시행됐다. 하지만 제정은 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렇다면 인권헌장 제정을 위해서는 무엇이 더 필요할까. 남지원 씨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오세정 전 총장도 제정 의지를 밝혔고 구성원들의 찬성률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왜 아직도 제정이 되지 않았는지 의아하다는 것이다. 서울대가 안전한 공동체가 되기 위해, 이제는 정말 제정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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