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좋아하세요

《더 퍼스트 슬램덩크》(2022)

※영화와 원작 만화 『슬램덩크』에 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 열기가 뜨겁다. 누적 관객 수 400만 명을 넘기며 일본 애니메이션 국내 최다 관객 기록을 경신했다. 원작 만화 『슬램덩크』가 한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기는 했지만, 『슬램덩크』가 연재된 것은 30여 년 전인 90년대다. 원작을 읽었던 팬들의 관람만으로는 흥행 현상을 설명하기 어렵다. 우리는 왜 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일까.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슬램덩크』는 평범한 고등학교 농구부가 전국대회에 도전하는 과정을 그린 만화다. 주인공 ‘강백호’가 속한 북산고등학교 농구부는 특별한 점이라고는 없는 약팀이다. 주장인 ‘채치수’는 전국제패라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매년 예선에서 탈락해야 했다. 그러나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신입생 ‘서태웅’, 농구를 처음 접하지만 지치지 않는 열정과 체력을 가진 ‘강백호’, 중학교 시절 뛰어난 선수였지만 농구를 그만두고 방황하던 ‘정대만’, 부상을 입었던 ‘송태섭’ 등 새로운 선수들이 들어오면서 북산고등학교 농구부는 활력을 얻는다.

사진 설명 시작.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선수들이 줄지어 서 있다. 사진 설명 끝.

©IMDb

최강 산왕

  원작이 지역 예선부터 전국대회 본선까지 북산의 여정을 따라 이야기를 진행하는 반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의 마지막 경기인 전국대회 32강전, 산왕공업고등학교와의 경기만을 다룬다.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이야기를 끝맺기 위한 결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산왕과의 경기는 『슬램덩크』에서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가장 후반부에 배치돼 있을 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분량이 할애된다.

  전년도 우승 팀인 산왕은 북산이라는 팀에게, 그리고 각 선수들에게 가장 큰 도전이다. 일본 최고의 선수가 되고자 하는 서태웅은 고교 최고라고 평가받는 ‘정우성’을 넘어야 하고, 재능은 뛰어나지만 체력이 부족한 정대만은 특출난 재능은 없지만 끈기를 가진 ‘김낙수’를 만난다. 채치수는 자신보다 화려한 ‘신현철’을, 송태섭은 자신보다 키가 큰 ‘이명헌’을 상대하게 된다.

  산왕과의 경기를 치르면서 북산의 선수들은 제각기 깨달음을 얻고, 그때까지의 모든 노력을 거쳐 성장한 북산은 마침내 산왕을 상대로 극적인 역전승을 거둔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이러한 원작의 줄거리를 거의 그대로 따른다. 상징적인 장면들부터 구체적인 경기 내용까지, 원작의 산왕전을 애니메이션으로 충실히 옮겼다.

No.1 가드

  산왕전의 내용만 보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많은 일본 만화 원작 영화들이 그렇듯이, 원작의 내용을 스크린에 재현하는 데 집중한 영화처럼 보인다. 그러나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완전히 새로운 영화다. 가장 중요한 요소인 주인공이 다르기 때문이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주인공은 강백호가 아니라 송태섭이다.

  송태섭은 원작 만화에서는 북산의 주전 선수 5명 중 가장 비중이 작은 인물이다. 팀 동료들에 비해 활약도 적고, 특별한 사연을 가진 것도 아니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그 이유에서 송태섭은 새로운 ‘슬램덩크’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기도 하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에서 등장하지 않았던 송태섭의 가족을 등장시켜 송태섭에게 새로운 서사를 부여했다. 영화는 현재 산왕과의 경기와 과거 송태섭의 이야기를 오가며 진행된다. 원작에서 농구부 매니저 ‘이한나’를 짝사랑하는 게 유일한 개성이었던 송태섭은, 《더 퍼스트 슬램덩크》에서 형의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인물로 다시 그려진다.

  이러한 각색은 원작을 보지 않은 관객들도 영화를 즐길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원작은 초반에 북산 선수들을 한 명씩 소개하고, 산왕전이 진행되는 시점은 독자가 이들에게 이입하기에 충분한 서사가 주어진 이후다. 하지만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산왕전만을 다루는 만큼 그 이전의 이야기는 모두 생략된다. 이때 관객들이 감정을 이입할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송태섭의 과거를 다루는 부분이다. 영화가 원작의 내용만을 다뤘다면, 배경지식이 없는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송태섭이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줄거리를 재구성함으로써,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원작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적으로 완결성을 갖는 영화가 됐다.

사진 설명 시작. 애니메이션의 한 장면. 서태웅과 정대만의 얼굴이 클로즈업되어 있다. 사진 설명 끝.

©IMDb

왼손은 거들 뿐

  그럼에도, 《더 퍼스트 슬램덩크》는 진정 『슬램덩크』를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라고 해야 한다. 영화는 『슬램덩크』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원작의 명장면들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이다. ‘채소연’이 강백호에게 “농구… 좋아하세요?”라고 묻는 장면이 그 예시다. 원작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장면이지만, 영화는 이 장면을 회상을 통해 보여준다. 짧은 상영시간 안에 삽입된 수많은 명장면들으로 인해 강백호가 과거를 회상하는 장면은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원작을 읽었던 관객들에게 추억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하다.

  영화는 필수적이지 않은 내용은 과감하게 설명하지 않는 서술 방식을 취한다. 강백호는 왜 서태웅을 싫어하는지, 서태웅은 왜 일본 최고의 선수가 되고자 하는지, 정대만은 왜 쉽게 지치는지 등은 원작을 읽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내용들이다. 원작을 읽은 관객들은 사소한 장면에서도 더 많은 것을 감상할 수 있다. 『슬램덩크』를 읽으며 울고 웃었던 사람이라면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볼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이 영화 또한 사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뚫어

  원작에서도, 영화에서도 변하지 않는 것은 포기하지 않는 태도다. 산왕에 큰 점수 차로 뒤질 때, 북산의 감독 ‘안한수’는 “포기하면 그 순간이 바로 시합 종료”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은 강백호의 기행으로 팀은 다시 투지를 되찾고, 불가능해 보였던 역전에 성공한다.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도 3점 슛을 쏘는 정대만, 코트 밖으로 나가는 공을 향해 몸을 던지는 강백호, “한 골만 넣자”고 외치는 ‘권준호’ 모두 포기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영화가 송태섭을 중심으로 각색되면서 새롭게 부각되는 주제의식도 있다. 바로 그가 부담감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이 부담감은 상대 가드인 이명헌에 대한 의식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세상을 떠난 형에 대한 트라우마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고,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다. 이 부담감은 영화에서 산왕의 ‘존 프레스’(압박 수비)로 구체화된다. 따라서 송태섭이 산왕의 수비를 돌파하는 장면은 이명헌에 대한 부담감을 극복하는 장면일 뿐만 아니라 형의 목표를 대신 이루는 장면이자, 어머니에게 자신을 증명하는 장면이 된다. 당연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이기도 하다.

바로 지금입니다

  《더 퍼스트 슬램덩크》의 흥행은 『슬램덩크』가 이야기하는 가치들이 2023년의 관객들에게도 호소력을 가진다는 점을 보여준다. 어떤 일을 좋아하는 마음과 좋아하는 일을 위한 노력은, 시대를 초월해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이다. 앞이야기를 몰라도 이입할 수 있게 한 각색과, 뒷이야기를 알아도 긴장감을 느끼게 만든 연출 덕분이기도 하다. 『슬램덩크』의 영광의 시대는 바로 지금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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