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이 죽어가는 시대에 부쳐

 ‘읽다’라는 동사에 얼마나 큰 의미를 부여해볼 수 있을까요. 이번 봄에 들어 글은 이미 죽은 사업이지 않냐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느새 우리 사이에는 읽었냐는 물음보단 봤냐, 혹은 들었냐는 물음이 당연해졌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개씩 쏟아지는 영상의 홍수 속에서 부실한 활자들은 휩쓸려가고 맙니다. 글이 죽어간다는 것은 곧 읽지 않는 시대가 도래한다는 것. 서로를 만나고 맞닿으려는 간절한 손 뻗음이 점차 사라지는 것만 같아 서글퍼집니다. 글쓰기란 견우성과 직녀성만큼이나 먼 타인과 타인 사이를 이어줄 다리를 짓는 작업입니다. 기사에는 내가 아닌 남의 얘기를 차곡히 담아야 하기에 우리는 매주 화요일마다 둘러 모여 무엇을 또 어떻게 이야기할지 머리를 싸맵니다. 각자의 골머리를 앓으면서도 서로의 고민에 한마디 말을 얹어줍니다. 긴 시간 대화를 나누며 글을 구상하다 보면 어느새 서로의 마음에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더더욱이 쓰는 마음과 읽는 마음의 가치는 바래지 않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 멀리에서부터 우리 코앞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짓는 게 기자의 몫이라면, 그 다리를 건너는 건 독자의 몫입니다. 부실하거나 다른 샛길로 샐까 노심초사하며 쓴 글을 성가시고 귀찮더라도 기꺼이 건너 주는 것. ‘읽다’라는 동사의 원 형태는 ‘읽어 주다’가 아닐까요. 읽는 행위는 글자를 그저 독(讀)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解)의 영역으로 나아간다고 믿습니다. 이 교량의 목적지는 나 아닌 남의 마음이니까요. 지면 가장 끝에 붙은 기자수첩은 우리를 읽어 준 사람에 부치는 편지이기도 합니다. 워프는 불가능한 이해의 우주에서 타인을 향해 건너가는 일에 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글이 죽어가는 시대이니만큼 떼를 써봅니다. 다음에도 다다음에도 우리는 다리를 짓습니다! 그게 어디로 가닿을진 모르겠지만 함께 건너 주시길. 읽어 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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