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인권 울타리

 지방자치단체 인권 정치의 오늘

  지난 1년간, 지방정부의 인권 제도가 뒷걸음질치고 있다는 소식이 곳곳에서 들려왔다. 충청남도 의회에는 충남 인권조례 폐지 청구가 접수됐고, 대구광역시는 전국 최초로 인권위원회를 폐지했다. 대전광역시는 인권센터를 운영할 수탁 기관으로 성소수자 차별을 조장한 전력이 있는 반인권 단체를 선정했고, 제주특별자치도에서는 인권위원회 위원 6명이 인권 담당 공무원들로부터 위원회 활동을 방해받았다며 동반 사퇴하는 일도 벌어졌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작년 9월 성명을 발표해 지자체 인권조례 폐지, 인권기구 및 인권부서 축소와 같은 일련의 흐름에 우려를 표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가 추구해온 인권적 가치 실현의 노력을 역행하는 시도들”이라는 설명이다.

  2009년 광주광역시에서 최초로 인권조례가 제정되고, 2012년 국가인권위원회가 인권기본조례 표준안을 제시해 조례 제정을 권고한 것을 계기로 많은 지역에 인권 제도가 확산된지도 10여 년이 지났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우리 지역에 어떤 인권 제도가 있고, 왜 필요하며 무슨 역할을 하는지 체감하기는 쉽지 않다. 지자체 인권 제도가 존재했음을 오히려 연이은 폐지 소식으로 새삼 인식하게 되는 요즘, 지방자치단체 인권 정치의 가치와 현실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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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충남공동행동 활동가들의 인권조례폐지 반대 시위 ⓒ〈한겨레〉

지역 인권 제도 톺아보기

  지방정부 차원에서의 인권 제도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인권조례다. 조례는 지방의회의 의결을 통해 제정되는 자치 법규로, 지자체 소관의 사무 처리를 위한 규범적 근거 역할을 한다. 현재 전국 모든 17개 광역자치단체에 인권조례가 제정돼 있으며, 2022년 6월 기준 전국 226개 기초지자체 중 113개 지자체에서 인권조례를 제정했다. 

  인권조례의 종류에는 인권 사무에 대해 일반적으로 규정하는 포괄적 인권기본조례와 학생, 여성, 이주민, 노인, 장애인, 어린이 등 특정 사안을 위한 내용을 규정하는 부문별 인권조례가 있다. 인권조례의 내용은 지자체별로 차이가 있으나, 조항의 전체적 구성은 대체로 유사하다. 인권조례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는데, 하나는 인권 규범을 지역 차원에서 재확인하는 내용으로, 헌법 및 법률, 세계인권선언 등 국제규범에서 보장하는 인간의 존엄과 가치 및 자유와 권리를 인권으로 정의하며, 주민의 인권을 보장할 지자체장의 의무를 규정한다. 헌법이나 국가인권위원회법을 근거로 차별금지 조항을 두기도 한다. 다른 하나는 인권 규범을 행정에서 이행하기 위한 제도의 운영에 기반이 되는 근거를 마련하는 부분으로, 인권 기본 계획, 인권위원회, 인권센터, 인권영향평가 등과 같은 제도의 역할과 대략적인 운영 방안이 서술돼 있다. 충남인권교육활동가모임 ‘부뜰’의 이진숙 활동가는 “인권조례는 인권 기반 행정의 지향점이 되어준다”며 

“실효적으로 운영된다면 행정 행위의 적법성을 따지는 것을 넘어 인권 보장을 위해 가장 적합한 행정을 모색하기 위한 논의를 열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방정부의 인권 담당 부서는 조례에 따라 ▲지역 인권정책의 방향성 수립 ▲주민 및 공무원 대상 인권 교육 ▲인권침해 사례에 대한 조사 및 구제 ▲지역 정책에 대한 인권적 관점에서의 평가 및 수정과 같은 광범위한 업무를 맡게 된다. 인권 업무를 수행하는 조직의 구성은 각 지자체 별로 상이하다. 인권전담팀과 별도로 인권센터를 두어 인권센터에 인권침해 조사 및 구제 업무를 맡기기도 하고, 별도의 구분 없이 한 팀에서 모두를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인권센터의 경우에는 지자체에서 직접 운영하지 않고 민간 단체에 위탁하기도 한다. 추가로 주민이 제기한 인권침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심의, 조사하는 인권 옴부즈맨을 위촉해 주민이 인권침해에 대응할 수 있는 경로를 늘리기도 한다.

  이외에도 지자체의 중요한 인권 제도로는 인권위원회가 있다. 인권위원회는 지자체 내의 인권 관련 사안에 대한 심의·자문을 주기능으로 하는 조직이다. 지방 의회, 주민, 시민사회 활동가, 법률가 등 15명 내외의 다양한 주체들이 위촉돼 인권 관점에서 지자체 행정을 살핀다. 지역별로 조례에 규정된 권한에 차이는 있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인권위원회가 지자체장에게 인권 관점의 행정을 위해 권고할 권한을 가지기도 한다. 일례로, 서울특별시 인권위원회는 2019년과 2021년 서울퀴어문화축제와 관련한 시 행정 절차상의 성소수자 차별을 시정하도록 권고한 바 있다. 인권위원회의의 심의나 권고에 법적 구속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민간의 인권 전문가와 주민 당사자가 참여한다는 점에서 지자체 행정에 균형 잡힌 인권적 시각을 도입하고, 민주주의와 협치를 실현할 수 있다는 의의를 가진다. 충남 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지냈던 이진숙 활동가는 “인권위원회의 심의 및 자문, 권고 활동을 통해 주민들이 인권의 가치를 내면화 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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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광역시 인권위원회 폐지 철폐 요구 기자회견 ⓒ〈한겨레〉

지역 정치에도 인권이 필수인 이유

  인권 보장을 위한 정치적 노력을 지방자치단체 수준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권 보호의 일차적 의무는 중앙 정부에 있고, 법률상 독립된 지위를 가진 국가인권위원회는 2001년 설립된 이래로 국가 전체의 인권 수준 향상에 기여하고 있다. 구속력이 약한 자치법규 대신 법률을 활용한 규제가 더욱 효과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지역 수준에서 주민의 삶 속에 인권 정치가 촘촘히 자리 잡는 것이 인권 실현에 필수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금천구청에서 인권전문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안시형 주무관은 “지역에서 인권이 보장된다는 것은 주민의 일상생활과 밀접한 영역에서 인권이 존중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지자체의 행정 행위가 주민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만큼, 실질적인 권리 보장을 위해서는 인권 관점을 지자체의 행정에 반영해야 한다는 의미다. 대구광역시에서 활동하는 인권운동연대 서창호 활동가 역시 “행정이 주민의 복지와 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행정과 인권은 분리할 수 없다”며 인권이라는 가치 아래 지자체 행정이 작동해야 주민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지역 수준의 인권 보장 체계에는 중앙정부나 법률적 수준에서보다 신속하게 대응해 인권 문제가 심화되기 전에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유나 수원시 인권센터장은 “현실적으로 법률에 모든 것을 규정하기도 어렵고, 국가기관이 지역 사회의 인권 의제를 모두 들여다볼 수는 없다”며 지역 사회 내 ‘인권 컨트롤타워’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방 행정 기관 내에서 인권 시스템이 작동한다면 사전에 문제를 예방할 수도 있다. 안시형 주무관은 “다른 부서에서 업무 추진 시 인권 침해 우려가 없는지 먼저 자문을 구하기도 하며, 이를 바탕으로 행정 행위의 차별적 요소를 방지한 사례들이 있었다”고 밝혔다. 

  지자체의 권고가 중앙 정부 정책에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다. 한 지역 내의 인권 정치가 중앙 정부의 정책을 인권친화적으로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수원시 인권센터는 2015년 공무원 시험 시 화장실 이용을 제한하는 것이 응시자의 인격권을 침해한다고 보고, 수원시를 대상으로 제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 당시 공무원 시험 규정상 시험 시간 중 화장실을 갈 수 없었고, 응시자들은 시험장 내에서 소변봉투에 용변을 봐야 했다. 수원시는 권고를 받아들여 경기도와 행정안전부에 제도 개선을 건의했고, 수원시 인권센터 역시 행정안전부와 인사혁신처를 대상으로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제기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수원시 인권센터의 진정에 따라 제도 개선을 권고했으며, 행정안전부는 지방공무원 임용 시험 중 1회에 한해 화장실에 갈 수 있도록 규정을 변경했다. 이 사례는 한 지역의 인권 정치가 가지는 영향력이 비단 지역 내로만 한정되지 않고 우리 사회 전체로의 확장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비수도권 지역 주민의 인권 실현을 위해서도 지방에서의 인권 정치는 중요하다. 서창호 활동가는 “인권 논의가 수도권에만 집중돼 있어 비수도권 주민이 지방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인권적 행정에서 배제되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지역민이 겪는 문제는 상대적으로 주류 언론이 주목하지 않고, 중앙 차원에서의 정책적 주목도도 낮기에 지자체 내 인권 정치가 없다면 수도권에 비해 문제의 개선이 어려운 것이다. 이진숙 활동가는 “소외된 의제들을 가까이에서 발굴하는 데 있어 지역 인권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지자체는 중앙에 비해 해당 지역의 특수한 맥락 속에서 발생하는 인권 문제를 발빠르게 파악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는 역량을 가질 수 있다. 이진숙 활동가는 충남 지역에서 특히 주목하는 인권 의제로 ‘정의로운 전환’ 관련 사안을 꼽았다. 충남은 전국 석탄화력발전소의 50% 정도가 밀집한 지역이다. 기후 위기 대응을 위해 석탄발전소를 폐쇄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노동자의 고용 문제나 지역 공동체의 변화 등이 충남의 당면한 인권 의제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지역의 특수성은 정책 수립 과정에도 반영된다. 금천구청에서 근무하는 안시형 주무관은 

“금천구에는 많은 이주민이 거주하고 있고, 가산디지털단지를 중심으로 다양한 기업에서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다”며 이에 인권정책 기본계획을 수립하기 위한 연구용역에서 노동과 이주 분야에 대한 심층 조사를 실시했다고 밝혔다. 이처럼 지방자치단체 차원의 인권 정책은 각 지역의 상황에 맞춰 설계돼 보다 실효적으로 작동할 수 있다. 

지역 정치에 인권이 뿌리내리려면

  지방자치 단위의 인권 제도는 주민의 삶을 나아지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필요한 정치다. 그러나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만으로 인권 친화적 행정이 실질적으로 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다. 제도가 존재함에도 그를 뒷받침하지 못하는 여러 현실적인 문제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례가 제정되기만 하고 방치되는 ‘보여주기식’ 인권 행정이 대표적이다. 조례에 규정된 인권기본계획 수립, 인권 담당 부서 설치, 인권위원회 조직 등도 시행하지 않는 지역이 많다. 인권조례의 충실한 작동을 위한 시행규칙이 없는 곳이 많은 것도 문제다. 인권조례가 제정된 지자체는 백 곳이 넘지만, 인권조례에 명시된 제도의 운영을 위한 시행규칙까지 제정한 지역은 광역과 기초를 합쳐 15곳밖에 되지 않는다. 인권 업무의 절차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시행규칙이 없으면 지자체장이나 담당 공무원의 의지 혹은 역량에 기댈 수밖에 없어 인권조례의 취지가 구현되지 않을 수 있다. 인권 업무에 배정되는 공무원 수 자체가 적고, 그마저도 전문성이 없거나 다른 업무를 병행하는 경우도 많다.

  전문가들은 인권에 대한 지역 정치인들의 부정적인 태도와, 지자체장의 의지에 따라 인권 행정의 이행 여부가 결정될 수밖에 없는 환경도 문제로 꼽았다. 이진숙 활동가는 충남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있을 당시 “단체장과 공무원들이 인권위원회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회의를 최대한 잡지 않으려 했다”며 제도가 형식적으로는 존재하지만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는 상황을 비판했다. 이 활동가는 소속 정당과 무관하게 정치인들이 인권 문제에 대해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서창호 활동가는 “홍준표 시장의 의사에 따라 인권위원회가 폐지된 대구광역시의 경우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제도조차도 없애버린 상태”라며 지역 정치인의 성향이나 의도에 따라 인권 제도가 흔들리는 상황을 비판했다. 서 활동가는 대구 지역에 인권 정치에 우호적인 정치인이 있냐는 질문에는 없다고 대답했다. 

  지역의 인권 제도가 제힘을 발휘하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인권 행정에 대해 규정하는 상위 법률이다. 서창호 활동가는 “국민의 인권 보장을 위한 국가와 지방 정부의 구체적 의무와 권한이 법률에 구체적으로 적시돼 있지 않다”며 인권기본법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이유나 인권센터장 역시 지역 내 인권기구 설치 및 운영에 대한 법률상의 근거가 없어서 인권 행정의 존립이 불안정한 지역이 많다고 우려했다. 제도가 조례 수준에서만 규정돼 있어 전혀 이행하지 않아도 조치를 취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자체장이 인권에 대해 특별히 관심이 있지 않다면 인권 제도가 추동력을 잃게 돼 있다. 실제로 2021년에 국가인권위원회와 법무부가 공동으로 ‘인권정책기본법’을 발의한 바 있으나 여전히 국회에서 입법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진숙 활동가는 “법률을 통해 권력과 분리된 지역 인권위원회의 지위를 보장하고, 행정을 인권 관점으로 심의하는 적극적 역할이 실현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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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인권위원회와 법무부의 인권정책기본법 제정 논의 현장 ⓒ국가인권위원회

  지역 내 인권 의제에 대한 주민들의 관심과 논의를 이끌어내는 것도 어려운 과제다. 이진숙 활동가는 “노동시간이 길어 주민들이 자치에 참여할 수 있는 시간적 자원이 부족하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적했다. 인권을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진영 논리로 해석하는 경향도 주민들의 무관심에 영향을 준다. 대구 지역에서 활동하는 서창호 활동가는 “인권은 보수와 진보에 상관없이 보편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가치임에도 시민들은 인권 문제를 진보 진영의 의제로만 여기는 것 같다”며 전통적으로 보수 정당을 지지하는 대구 시민들의 정치적 성향이 인권에 관심을 갖는 데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분석했다.

   법제의 명확한 한계와 지역 인권 정치에 대한 주민들의 낮은 관심도 등 지역의 인권 정치는 분명히 어려운 상황에 있다. 하지만 지역에 인권 행정을 정착시키고자 하는 다양한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금천구에서는 2019년, 금천구에서 시행한 인권교육을 이수한 시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인권조례를 직접 제정했다. 시에서 인권위원회를 폐지한 대구에서는 시민 단체들이 모여 독자적인 시민인권위원회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충남 지역의 이진숙 활동가는 “지역민이 문제의식을 느끼는 의제를 인권 의제로 포섭해 주민들이 인권과 민주주의의 이행 과정에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다고 인식하도록 노력 중”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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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금천구 주민 인권 배움터 수료식ⓒ〈한겨레〉

  모두가 안전한 공동체를 위해, 살갗에 와닿는 인권 울타리는 꼭 필요하다. 그러나 인권 행정의 실현은 겨우 지자체장의 의지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현실이다. 인권이라는 중요한 가치에 기반해 가장 가까이서 주민의 삶에 손을 내밀어야 할 지방 행정이 정치적 견해 혹은 이해타산에 따른 개인의 결정에 좌우되도록 방치할 수 없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부터의 인권이 보장되도록 노력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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